47-59.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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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팔 또 이리 될 것 같더라···.”
야로스 발렌켄드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뭐라고 말 했나요, 야로스?”
“아, 아닙니다 중대장님. 제가 좌측 구석을 맡겠습니다!”
“네에, 맡길게요오!”
다행히도 첼레스티나는 야로스의 투덜거림을 듣지 못한 모양이다.
그녀가 이제 와서는 야로스의 정식 상관도 아니고, 아마도 그녀 성격상 전투 전에 욕지거리 정도 한다고 뭐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방금 야로스의 얼버무림은 남들 앞에서 겁 먹지 않은 척, 강한 척을 하는 유치한 감성의 발로에 가까웠다.
어쨌거나, 슈뵈켄 마을 후방의 포병 진지에서 한 번, 첼레스티나의 구원군에 합류한 이후 또 한 번, 그리고 이번까지 총 세 번이나 혈투를 벌일 지경이 되었으니 말이다.
욕지거리 정도 하는 건 정당한 권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시발거, 또 징그럽게도 몰려 오는구만!”
“한 번 또 해보자고!”
안그래도 함께 싸워온 포병 동료들도 욕설은 하면서도 이리 된 것, 이제와서 포기할 수도 없다는 건 동의하는 것 같았다.
현재, 수적으로 얼마 안되는 혼성 보병 부대는 좁고 긴 직사각형 모양의 대형을 짜고 있었다.
가장 위험한 중앙 선두에 배치되었고, 마치 예정된 운명이었던 것처럼 그룬발트 군의 기병과 보병 양측의 협공을 받게 되었으니까.
당연히 기병들이 우회 공격을 할 테고, 급하게 정면을 좁히고 병력을 나눠 두 개의 대열을 짜고, 포병과 예비대를 그 사이에 끼워 넣었다는 느낌이다.
“우리가 집중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부대가 행동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아, 그거 언젠가 콘도티에레가 했던 말이죠?”
“바로 그렇습니다.”
“잘 기억하고 있네요, 야로스.”
첼레스티나는 옛 부하가 기특하다는 듯 말해준다.
사실 예전 기억을 더듬어보면, 슈토르히 연대는 그렇게 취급이 좋은 용병 부대는 아니었다.
외형적으로 귀족 나으리들이 좋아해서 근위대로 두고 싶어할 화려한 부대도 아니었으며, 소위 말하는 ‘족보’가 있는 명문 연대도 아니었다.
최근 무서울 정도로 전공을 거듭 쌓았고, 연대장인 콘도티에레나 선임 중대장들의 명성도 점점 올라가고는 있었다.
슈토르히 출신의 고참병이라고 하면 다른 연대로 이적할 때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 그 증거겠다.
하지만 이는 동업자라고 할 수 있는 용병 사이의 일이고, 고용주가 되기 쉬운 영주와 귀족님들 사회에서는 ‘경력 짧은 능력자’란 오히려 박하게 평가받기 쉽다는 것을 알게 됐었다.
뭐 말단 하급 장교였던 야로스는 확실히는 모르지만, 슈토르히 연대의 주 활약처가 주디칼리가 된 것은, 세속 영주들 보다는 상인 출신들이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주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도 한다.
아무튼 당시 슈토르히 연대는 ‘비싼 돈 달래서 줬으니 어디 너희 가치를 증명해 보아라’는 가혹한 임무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훌륭하게 그 가치를 증명하고는 했었고 말이다.
그럴 때마다, 콘도티에레는 더 강한 전력을 가진 상대와의 전투를 앞두고 긴장한 병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우리가 모루로서 버티는 사이, 어느 부대가 망치가 되어 결국 전투에서 이기게 될 것이라는 추측을 하면 그건 마치 예언처럼 그대로 실현 되었었지.
가끔은 모루고 망치고 필요 없이 슈토르히가 어설픈 상대를 다 때려 부수고 자력으로 이겨버릴 때도 많았고 말이다.
“이번엔 창병 중대장으로서 잘 부탁해요, 야로스.”
“뭐, 저야 원래 창병 출신 아니겠습니까···.”
이번에 야로스가 맡은 역할은 평소와 조금 다르다. 자신감을 피력하면서도 말꼬리를 조금 흘린 것은 자신도 모르게 불안함이 흘러 나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현재 엘랑키아 보병대는 창병이 압도적으로 부족하다.
창병이 절반 정도는 되어야 밸런스가 맞는데, 삼 분의 일도 안 되다보니 전열 유지가 쉽지 않았다.
결국 나온 것이 급조 창병 중대였다.
본래 전투 전문이 아니거나, 본대에서 낙오된 병사들. 구체적으로는 공병 출신 지원병이나 말을 잃은 기병 등, 포지션이 애매한 자들을 모아 장창을 지급했다.
뭐, 종일 공방전을 거듭하며 그 난리를 쳐 댔는데 전장에서 노획한 장창이야 얼마든지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창병이란 본래 총병보다 양성에 ‘비용’이 많이 드는 병종이다.
이는 장창이 화승총보다 비싸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라고 할 수 있지만 훈련도나 전문성에서 더 많은 요구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약간 과장해서 무지렁이 농부를 한 달 훈련하면 총병이 될 수 있지만, 반 년 훈련해도 창병은 못 시킨다고들 할까.
이런 벼락치기 창병이 뭘 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대충 구색 맞춰서 대열 비슷한 것을 이루고는 있지만, 아마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진로를 막고, 익숙하지 않은 장창끼리 부딪쳐서 꼬일 테니까.
하지만 창대를 고정하고 죽을 각오로 지키기만 이라면··· 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급조 편성이다.
“야로스 대장! 오셨군요. 모두 길을 비켜!”
“여기 창 있습니다, 대장.”
“함께 싸우게 돼서 영광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에게 길을 열어주고 맡겨 두었던 장창을 넘겨주며, 함께 싸울 결의를 다지는 ‘급조 창병’ 중의 절반 정도는 최근에 얼굴을 익힌 친구들이다.
공성공병대 소속이었던 이들도 많았고, 지원해서 온 포수도 있었으며, 적에게 휩쓸릴 뻔한 걸 멱살 잡고 끌어냈던 젊은 왕실군 소속 경기병도 있었다.
통상 이렇게나 복장도 장비도 제각각이라면 오합지졸이라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아니, 정확히 문자 그대로 오합지졸이 맞지.
소속된 병사 대부분은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알지도 못하던 이들이고, 더 문제는 장창이란 무기를 처음 드는 게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이리 된 거 한번 해봅시다!”
“예엡!”
급조 창병대의 지휘관으로서, 야로스는 맨 앞줄 중앙 자신의 자리에 자리잡았다.
무겁고 탄력있는 창대가 낯설게 느껴진다. 10대 후반부터 너무도 자연스럽게 다루었었고 자연스러웠던 무기인데도 말이다.
100명이 조금 넘는 작은 창병 부대는, 총병과 총병 대열이 비스듬하게 만나는 지점을 지키는 작은 요새였다.
아마도 적 기병이라면, 여기를 공격하고 싶을 것이다. 총병의 십자포화를 피하면서 대열 안쪽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지점이니까.
그리고 수가 적고 숙련도가 낮은 창병대를 지원하기 위해, 30명 정도의 총병이 산개 대형으로 정면을 지키고 있었다.
여기서 견제 사격을 하다가 적이 접근하면, 창병 대열 앞으로 기어 들어와 보호 받고 필요에 따라 백병전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니까.
“적이 온다!”
“모두 창 고정한다!”
“창 고정!”
수직으로 서 있던 장창들이 일제히 정면을 향한다.
특히 맨 앞줄은 창대 끝을 바닥에 비스듬히 대고 발로 끝을 밟아 단단히 고정한다.
이러면 한 손으로 창대를 말뚝처럼 고정할 수 있다.
창 끝이 저돌적인 기사의 갑옷에 튕겨 나오거나, 무지막지한 군마의 몸에 꽂히면 무게 때문에 놓치는 경우가 많으니 유용한 방식이다.
특히나 이런 초보 창병들로 가득한 경우에 말이다.
예상대로, 적 기병들은 이쪽을 표적으로 하는 모양이다. 그래, 돌출된 소규모 창병대열이 만만해 보였겠지.
야로스는 상체를 깊이 숙이고 남은 손으로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필요한 경우 한 발 쏘고 시작해야지.
가장 두려운 것은, 적이 곧장 백병전을 시작하지 않고 가까운 거리에서 권총 사격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 숙련도가 부족해 전진 압박 따위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이 벼락치기 부대는 일방적으로 얻어 맞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물론 후방에서 전체 방어선을 조율하는 첼레스티나가 지켜보기만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두려운 일이다.
타타탕! 타탕!
제법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그룬발트 기병들에게 사격을 가한 총병들이 구르듯 창날의 그늘로 숨어 들어온다.
그들은 흙먼지를 털어 낼 시간도 없이 탄약포부터 꺼내 총구에 부어 넣는다. 그 신속함이 묘하게 신뢰감을 준다.
기병대는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잔뜩 준비하고 있는 총병의 십자포화 대신, 허술해 보이는 돌출된 창병을 뚫을 생각인 것 같다.
“진짜 온다!”
“모두 자세 낮추고 버틴다!”
여기에 대포가 한대라도 있었으면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겠지만, 대열을 구성할 병력부터가 부족한 현재 포병을 끼워 넣고 진형을 짤 자신이 없었다.
“후우···.”
오십 미터.
대략 화승총 사거리 정도 되었을까. 기병대는 서두르지도 않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투구 아래 땀으로 번들거리는 적병의 얼굴이 확연하게 보인다.
예상대로 권총을 꺼내 든 모습이 보인다. 자칫하면 붙어보기도 전에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오싹 돋는다.
주변 동료들도 숨이 거칠어지는 게 느껴진다. 원래 창병 출신이 아닌 병사들이니, 이 충돌 직전의 압박감이 더욱 깊게 느껴지겠지.
삼십 미터.
“으으으으···.”
“후욱, 후우우···.”
긴장을 이기지 못한 신음소리나, 가빠진 숨소리가 주변에 가득하다.
앞에서 반쯤 누워 가랑이 사이에 화승총을 끼우고 총구를 쑤시는 총병도 초조하다보니 잘 안 되는지, 덜컥덜컥 뭐가 걸린 소리가 들린다.
침착해라, 그리고 힘 내라. 야로스는 마음 속으로 응원한다.
이십 미터.
찰칵. 빌어먹게도, 적 기병이 치륜식 권총의 격철을 눌러 사격 준비 상태로 만드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가까운 거리에서 총구로 이쪽을 겨누는 모습. 지금으로서는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으아아아아아!”
누구였을까. 긴장을 이기지 못한 누군가가 고함을 지른다.
“으아아아아!”
“이야아아아아아아!”
하나 둘, 함성소리가 늘어난다. 마치 고함을 지르면, 적병의 총탄이 빗겨나가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탕! 타탕! 탕! 타당!
산발적으로 적 기병이 총을 쏘기 시작한다.
“윽!”
“우아아아아!”
“허억!”
“쏴봐라 시팔것들아아아!”
여기저기서 적을 향하고 있던 창대가 하나 둘 힘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적이 쏜 탄환에 맞은 창병들이 쓰러지고 있는 것이다. 긴장과 공포로 창 끝이 떨리는 것이 확연히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버텨야 한다. 지휘관으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현실이 저주스럽지만 말이다.
하지만 기병의 사격은 그렇게 밀도가 높지도 않았고, 명중률도 부대를 전멸시키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하다.
“신성 그룬발트 제국 만세!”
“디오보르크 공작을 위하여!”
“가자!”
그룬발트 기병들은 총격전을 지속하는 대신, 빠르게 거리를 좁혀온다. 화력도 부족하고, 시간을 끌면 측면에서 사격이 올 수도 있다 판단했겠지.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야로스는 권총을 쓸까 하다가, 더 중요한 순간을 위해 남겨두기로 한다.
댓니 창 끝을 세심하게 조절해 적이 함부로 다가오지 못하게 한다. 말을 모는 모습을 보니 기마술이 상당히 숙련되어 있어 보인다.
저런 놈은 분명히 창대 사이로 밀고 들어오려 할 것이다. 말이 딱 두 걸음만 들어오면 창병 두 열이 할 일이 없어져 버린다. 그걸 막아야 한다.
슬쩍 창대를 왼쪽으로 치운다. 이제 정면에는 말 한 마리가 지나가기 딱 좋은 공간이 생긴 것으로 보일 것이다.
기마술이 좋은 그룬발트 기사는 잠시 망설이나 싶더니 그 공간으로 성큼 들어선다. 야로스는 재빨리 창 끝을 원래대로 돌린다.
퍽, 우드드득!
강한 충격이 발목을 때리고, 정말 기묘한 감각이 창대를 타고 팔에 느껴진다.
크고 재빠른 짐승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고막을 때린다.
야로스의 창 끝은 군마의 목 옆을 뚫고 들어갔고, 가죽이 길게 찢어지며 붉은 근육이 드러났다.
잘 훈련받은 군마는 작은 상처는 무릅쓰고 주인의 명령을 따를 정도로 용맹하지만, 이건 ‘작은 상처’ 수준은 아니다.
하필 근육이 많은 부분이라, 상처가 말려 들어가고 마치 펌프질 하는 것처럼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 나온다. 치료하기 힘든 상처이다.
말이 투레질을 하며 왼쪽으로 빙빙 돈다. 기사는 말의 상처를 아는지 모르는지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마침내 말은 앞발을 들고 포효하다가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버린다.
“끄아아악!”
처음으로 기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마 넘어지면서 다리가 깔렸겠지. 전투에서 흔한 일이다.
그리고 마치 그게 신호기라도 하듯, 주변에서 철과 철, 나무와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귀가 아플 정도로 들리기 시작한다.
교전이 시작된 것이다. 기사들은 뚫고 들어오려 노력하고, 창병들은 막으려 노력한다.
“으읏, 으아아앗!”
“막아라! 오게 두지 마!”
“허어억!”
창병에게 배짱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지만, 다른 병종과 명백하게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만약 적이 창 끝을 피해 내 창대의 유효 거리 안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창을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마 본능적으로 창대를 버리고 보조 무기를 꺼내 적을 상대하려 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런 선택을 한다면, 그 창병 대열은 거기서부터 무너지고 만다. 그 틈으로 적은 계속 밀려 들어올 테고 말이다.
설령 적이 ‘내가 막을 수 없는 구역’까지 들어와 내 목숨을 위협한다 한들, 창병이 할 일은 후열의 동료가 내민 창이 적을 막아주길 바라는 것 뿐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적이 밀고 들어와 바로 옆의 동료를 죽인다 할지라도 원칙적으로는 정면을 향한 창 끝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게 대열을 유지하는 방법이고, 선두에서 사상자가 생기더라도 창병 부대로서 역할을 지속하는 방법이니까.
근데 벼락치기 초보 창병들에게 그런 일관성을 기대하긴 어렵다. 이 확신은 배짱 뿐 아니라, 신뢰와 경험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예상한 바였다. 창벽의 역할은 기병대의 돌격에 의한 충격을 완화한 시점에서 끝났다고 봐도 좋겠다.
“죽여! 죽여버려!”
“끄아아악!”
“끌어내려!”
대열이 얽히고 창끝을 피하거나 밀어젖히며 기병들이 하나 둘 들어오자, 선두 전열은 곧바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진다.
보병이 기병을 상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특히나 말을 잃고 창병의 일부가 된 기병 출신들은 이걸 아주 잘했다.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몸 안쪽과 겨드랑이를 집요하게 찔러댄다.
게다가 후열의 동료 창병들이 지원 공격까지 해주니, 여기저기서 주인을 떨구고 슬픈 비명을 지르는 군마들이 하나 둘 늘어난다.
“커헉, 끄으윽!”
“이야아아!”
물론 기병도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높은 위치와 훌륭한 갑주라는 이점을 십분 활용하여 역으로 창병들의 머리를 깨부수려는 것이다.
그렇게 양측이 악착같이 달라붙으며 전투의 일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