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23화 (523/556)

47-58.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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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려나간 손목이 허공을 가른다.

핏방울을 사방으로 날리면서.

어찌나 날카로운 솜씨로 잘렸는지, 하얀 뼈가 언듯 보이는 단면의 근육은 여전히 팽팽하게 긴장한 상태이다.

“끄아아아악! 내 팔이!”

방금 팔을 잃은 그룬발트 보병 장교가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는다. 반대편 손으로 잘린 손목을 더듬어 보지만 없어진 손이 자라날리 만무했다.

“마, 막아라!”

“죽어도 버텨!”

그 앞을 가로막듯 다른 병사들이 창 끝을 내밀며 저항해 본다.

하지만 방금 장교의 손목을 잘라낸 엘랑키아 기사는 무심하게 날카로운 장검을 휙휙 휘두르더니, 그룬발트 창병이 위축된 사이 성큼 하고 한 걸음 더 파고든다.

“흐이이익!”

잠시 용기를 냈던 그룬발트 창병은 기이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치켜든다.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던 엘랑키아 기사가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공포감 때문인지, 군마는 평소보다 거대하고 흉포해 보이며 하늘을 등지고 내려다 보는 기사의 무표정한 얼굴은 도저히 인간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황급히 장창을 들어 막아보려 하지만, 어디에 걸렸는지, 머리 위로 치켜드는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본래 장창은 기병을 상대하는 데 특효 무기이다. 투사 무기가 아닌, 기병이 가진 모든 무기보다 사거리가 길었으며 돌진하는 기병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충분히 거리를 두고 밀집 대형을 갖춘 상황··· 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 전제가 깨어졌을 때.

즉 밀집 대형을 갖추지도 못하고, 거리조차 유지하지 못했을 때는.

무겁고 긴 장창이란, 그저 불편한 장대에 불과하게 된다.

본래 장창이 중장기병을 죽이거나 낙마시키는 데 적절한 무기는 아니다. 창 촉을 아무리 날카롭게 한들, 단단한 투구나 흉갑을 뚫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미늘창처럼, 무게와 갈고리를 이용해 철저하게 낙마시키는 데 특화된 것도 아니다.

거리를 두고 노리고 있다가, 무리해서 접근하려던 기병의 약점을 찔러 떨구는 경우가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막는’ 무기에 가깝다.

그렇게 기병 최대의 무기인 기동성을 잃게 만들면 그 다음은 어떻게든 된다.

창병 대열이 촘촘한 창날의 벽을 앞세워 전진하면서 밀어 버려도 되고, 멈추면 커다란 표적이 될 뿐인 상대를 총병이 저격해도 된다.

하지만 대열은 진작에 혼란해져 촘촘한 창날의 벽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일 뿐더러···.

창병의 보호를 받으며 적을 저격했어야 할 총병들은 초전에서 밀리는 바람에 가장 먼저 칼에 맞거나 말발굽에 짓밟혔다.

카각!

“끄우우우우우···.”

창병이 머리에 쓴 가죽 투구는 뜨거운 물로 처리해 단단하게 굳힌 물건으로, 거리에 따라서는 총알도 막을 때가 있는 견고한 물건이다.

허나 거의 수직으로 벼락처럼 떨어져 내린 기사의 일격을 막아줄 만큼 견고하지는 않았다.

단번에 가죽 투구와 두개골이 동시에 쪼개진 병사가 눈이 뒤집히며 절명한다.

이제는 선듯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한 발 앞으로 나서는 병사가 없다.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눈치만을 볼 뿐.

그럼 또 기사가 성큼 한 발 밀고 들어온다.

만약 기사가 그 혼자 뿐이라면 사방에서 포위해서 어떻게든 했겠으나, 그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여기저기서 반들반들 거울처럼 아름답게 닦인 강철 갑주 위를 적에게서 튄 핏방울로 장식한 기사들에 거듭해서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위는 커녕, 정면에서 버티는 것도 힘든 지경이다.

무력하게 엘랑키아 기사들에게 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적어도 무력한 신병들은 아니다.

오히려 그룬발트 보병들 사이에서 상당히 베테랑, 정예에 속하는 이들이다.

대부분이 두 차례 이상 실전 경험이 있었으며, 그렇기에 선발되어 이 자리에 섰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나마 나름 정예’에 속했기에 무너지지 않고 어떻게든 버티고, 시간이라도 끌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들은 오늘 하루종일 엘랑키아 기병대와 싸우고 있었다.

아침부터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중앙군의 배후로 우회하는 것을 막으려 드는 디타레 드 카울의 기병대와 싸웠으니까.

그 때 이들은 생각했었다.

상당히 날카롭고 성가신, 아무리 전력을 깎아내도 악착같이 재집결해 덤벼오는 ‘엘랑키아 기사’가 강적이라고.

허나 그건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그때 싸웠던 이들은 ‘엘랑키아 왕국의 기병’이기는 하지만, 소문으로 듣고 두려워했던 ‘엘랑키아 기사’는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 절망에 가까운 생각이 들 정도로, 엘랑키아 국왕 직할의 호위대와 평범한 그룬발트 숙련병 사이에는 심각한 전투력 격차가 있었다.

“으아··· 으아악!”

또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이어진다. 아마 높은 확률로, 그 비명은 그룬발트 병사의 것이리라.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은 상상도 못한 적 기병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어떻게든 노력하고 있었다.

“총병! 총병의 지원이 필요하다!”

“그게··· 측면에 집중되어 있어서 후방으로 우회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입니다.”

“서둘러주게!”

혹시라도 대열이 돌파되면 끝장이었다. 그랬다가는 정말로 부대가 붕괴하고 말 테니까.

그래서 마치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격으로 부대를 돌려 추가적인 방어선 보강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도 쉽지 않은 것이, 적 기병 공격 선두에서 순차 사격으로 길을 열었던 경기병들이, 중기병 측후방에 마치 날개처럼 대열을 펴고 있었다.

혹시라도 약한 지점이 생기면 언제라도 공격해 올 것처럼 보여 함부로 병력을 뺄 수도 없는 것이다.

만약, 오늘 아침 원래 대치하고 있었던 7천 기의 기병 대군과 싸웠다면 이런 꼴을 당했었을까.

그러고보면 그 기사들은 전장 반대편, 즉 좌익군 방향으로 돌격했다 들었다.

···레트폴레 자작은 괜찮을까. 불과 수백기 상대로도 쩔쩔 매는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밀리면 안 된다! 모두 나를 따르라!”

“위, 위험합니다 백작님!”

“대열 붕괴하면 위험하고 말고가 어딨나!”

어차피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기병의 지원이 올 때 까지 어떻게든 버티는 수 밖에.

펠쿠트 백작은 본부 예비대를 이끌고 전선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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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오른쪽이군요!”

“제 생각도 그렇소이다.”

만프레트 그로블 폰 자이트리츠의 앞에서, 혈기왕성한 젊은 기사들이 각자 자기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분명합니다, 만프레트 경! 만약 이 전장에 엘랑키아 국왕이 있다면 오른쪽 기병 부대에 호위받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의견은 바로, 좌우로 나뉜 엘랑키아 군의 두 기병대 중, 어느 쪽에 ‘최종 목표’가 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아군처럼 후방에 따로 국왕을 위한 호위대가 있는 것은 아니고, 중앙의 보병과 양익의 기병으로 세 부대로 나뉘어 있으니 그 중 하나에 국왕이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두 기병 부대 중, 하나는 저돌적으로 아군 보병에게 돌격해왔고, 다른 하나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견제하고 있는 상황.

그러니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부대에 엘랑키아 국왕이 숨어있지 않겠다는 추론은 언듯 논리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만프레트로서는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 역시 가장 위험하다 할 수 있는 중앙 보병 부대에 국왕이 숨어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말에도 타지 못하고 병사들 사이에 숨어 있어야 하는데, 자칫 포위 당하기라도 하면 어쩐다는 것인가.

하지만 원래 전쟁에 익숙하고 저돌적인 성격이란 소문이 있는 엘랑키아의 국왕이라면···.

오히려 부대를 지휘하며 돌파를 시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제로 디오보르크 공작에게 소식을 전했던,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기사의 경우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또 하나의 가능성은···.

이 전장에 아예 엘랑키아 국왕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허나 이들은 마치 반드시 답이 존재할 것이며, 존재해야 하고, 자신들이 그 답을 반드시 알고 있다는 식으로 행동한다.

“만프레트 경! 만프레트 총참모장! 결단이 필요할 때입니다!”

거듭된 재촉. 만프레트로서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

이런 경우에는 선택을 하지 않거나 늦추는 것도 답이 될 수 있었다.

이대로 상식에 맞게 대응한다면 엘랑키아 측의 반응을 살피며 좀 더 명확하게 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전투 중에 아군이 정말로 적 국왕을 발견해서 보고를 해 오거나 말이다.

애초에 지금 여기서 극단적인 위험을 감수해야 할 가치가 있느냐에 대한 회의도 들었다. 적당한 선에서 싸우다 병력을 물려도 큰 문제는 없을 텐데.

만약 정말로 적 중에 국왕이 있다면 극단적인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일 테니까.

“...지금 좌측 보병 부대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들은 지원 병력을 기대하고 있을 겁니다.”

상식적인 대답을 한다. 현재 그룬발트 기병은 크게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전위는 최전방에서 적 보병과 대치하고 있으며, 후위는 디오보르크 공작을 호위하고 있다. 그러니 1천 기의 중앙 병력을 어디로 보내느냐가 중요한 결정이 될 텐데···.

“펠쿠트 백작님은 젊지만 훌륭한 기사이십니다! 충분히 버티실 수 있습니다. 그 사이, 저희가 적 국왕의 머리를 가져오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디오보르크 공작께 숙적의 머리를 바치겠습니다.”

···말만 들으면 실로 기특한 생각이기는 했다.

문제는 만프레트에게 이들은 그나마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예비전력이라는 것이다.

제대로 지휘 체계가 잡히지 않은 귀족 기사대라는 것이 이럴 때는 성가셨다. 분명 전투에 임하면 용감히 싸우고 자기 역할을 하겠지만, 그 때 까지가 곤란한 것이다.

하물며 이들은 디오보르크 공작의 친구이자, 다음 황제를 모시는 기사라는 자부심에 가득차 있었다.

“만약 만프레트 경께서 불안하게 여기신다면, 부대를 둘로 나누어서···.”

“그건 안 됩니다.”

그건 절대 안 된다. 폴름스 전투가 시작되고 첫 날부터 지겹도록 경험한 일이다.

엘랑키아 군을 상대할 때는 최소한 호각의 전력으로. 그것이 원칙이었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전력일지라도 남겨 두는 게 중요하다. 여기서 반으로 나누었다가는, 아얘 전투력이 제로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결정한 이상, 행동은 빨라야겠지요. 좋습니다. 작전대로 전장을 우회해, 우측의 적 기병대를 공격해 격멸하는 것을 허가합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만프레트 경. 반드시 국왕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실제로 국왕의 목을 가져올 수 있느냐··· 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방침이 결정되자, 만프레트는 연이어 명령을 전달한다.

“전위 기병대는 그대로 전진해 적 보병을 돌파한다. 바로 옆에서 아군이 흔들리면, 펠쿠트 백작의 부대를 공격하는 적 기병 역시 지금처럼 무모하게 굴지는 못하겠지.”

“옛,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우측 보병대는 아군 기병들이 교전에 들어가는 때를 기다려, 적 보병을 측면에서 공격한다.”

“알겠습니다. 혹시.. 적 기병이 물러서 전투가 벌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요?”

“전장에서 몰아낸다면 그것도 마찬가지겠지. 적 보병을 협공해서 전장 중앙을 장악한다는 방침은 변함 없다.”

“예, 만프레트 경! 즉시 전달하겠습니다!”

이제 전장은 크게 세 개의 작은 국면으로 정리된다.

하나는 유리, 하나는 호각, 하나는 불리.

유리한 국면은 물론, 전위 기병과 우측 보병으로 적 중앙의 보병을 협공하는 것.

호각인 국면은 ‘적 국왕의 머리를 가지러 가는’ 중앙 기병과 적 좌측 기병의 전투.

불리한 국면은 생각보다 강한 적 기병의 돌격을 허덕이며 막고 있는 좌측 보병의 전투이다.

자, 적은 어떻게 대응할까. 만프레트가 제시한 국면대로 싸울지, 회피하고 다른 전선을 열지는 적장에게 달려있었다.

최악의 경우라 할지라도, 한 국면 정도를 포기하고 나머지를 살릴 수 있으리라.

“가자! 디오보르크 공작께 다음 제위를 바치는 거다!”

“와아아아아!”

누구보다도 높은 기세로, 기병대가 출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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