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7.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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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기병이 달리며 생기는 진동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은 휘하 보병들로 가득한 대열 후방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부하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창병들이 먼저 정면과 측면을 모두 보호할 수 있는 진형을 잡고, 총병들이 그 빈 자리를 채우며 약점을 보강한다.
“온다! 전투준비!”
“죽어도 자리를 벗어나지 마라! 한 번만 버티면 돼!”
“신성 그룬발트 제국을 위하여!”
엘랑키아 기사대와의 일전.
이미 한 번은 각오했던 일이다. 상황이 꼬이고 꼬여서 지금으로 밀렸을 뿐.
지금 부대를 구성하는 장병들은 영주이자 지휘관인 백작 자신과 여러 차례나 사선을 함께 넘었던 이들이다.
그렇기에 알 수 있다. 부대 내부에 흐르는 짙은 긴장감.
그리고 두려움의 냄새를 말이다.
당연히 펠쿠트 백작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어깨가 이상하게 굳어가고 주먹에 유난히 힘이 들어가는 이유는 흥분 때문이라 주장하고 싶지만, 역시 두려움이 클 것이다.
허나 그런 척을 할 수는 없었다.
부하들에게 안전하게 보호받는 진형 한 가운데에서도 이럴 정도인데, 대열 맨 앞에서 믿을 것이라고는 동료들이 내뻗은 장창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병사들이 받는 압박감을 생각하면 말이다.
“백작님, 측면에 집중배치한 총병들을 원래 위치로 돌려 보낼까요?”
“아니, 이미 늦었다. 게다가 그쪽은 그쪽대로 할 일이 있을 테니까.”
참모 장교의 물음에는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약간은 후회되었다.
적 보병 부대와 측면을 맞댄 기묘한 상황에서, 우세를 점하기 위해 총병 다수와 2문 밖에 없는 야포를 전부 측방으로 보낸 것이 말이다.
사실 엘랑키아 기병과 이렇게 빨리 접전할 것을 알았다면, 최대한 교전을 늦추고 중앙을 강화했겠지만.
뭐 지나간 일이고, 대기병전의 핵심은 창병이니까 적을 ‘멈춰 세우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다른 변수는 그 후에 일으키는 되는 것이고.
타앙!
타다다다당!
“머저리들아! 쏘지 마!”
“명령 없이 누가 쏘나! 방아쇠에서 손 떼!”
긴장감 때문에 누군가 실수로 방아쇠를 당기자, 주변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착각했는지 여러 명이 일제히 총을 발사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통제되지 않은 신병들 사이에서나 벌어질 법한, 오늘 벌어진 다른 전투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다행히 장교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가며 제지한 덕에, 더 이상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부하들이 얼마나 압박감을 겪고 있는지, 엘랑키아 기사들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상대인지 다시 실감하게 되었다.
한 줄로 늘어선 엘랑키아 기병들은 그렇게 서두르지도 않으며, 상체를 곧게 세우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숙련된 사수라면 충분히 저격할 수 있는 거리인데도 말이다.
그 모습이 유난히 크고 높아 보이는 것은 아마도 압박감 때문이겠지.
“온다! 절대 밀리지 마라!”
“쏴라!”
“발사!”
타타타타타타탕!
타타탕, 타앙! 타타타탕!
창병 부대의 전방에서 굉음과 함께 하얀 연기가 일제히 피어 오른다.
총병 일부를 측면으로 보낸 상황이기 때문에, 총병만으로 두툼한 대열을 이루는 대신 창병 밀집 대형을 보조하는 식으로 배치했다.
일시에 뿜어내는 화끈한 화력이나 교대 사격을 통한 지속력은 부족하겠으나, 그만큼 약점을 줄일 수 있다는 강점은 있었다.
탕, 타타탕! 타당!
뿌연 화약 연기 너머로 말에서 떨어지는 엘랑키아 기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효과가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창병들이 창대를 두들기며 환성을 지른다.
하지만 다음 장전이 완료되기 전까지는 적의 차례라는 무거운 현실 또한 다가온다.
“신성 그룬발트 제국 만세!”
“그룬발트!”
창대를 앞으로 내린 창병들이 버티기에 들어가고, 창대에 보호받는 위치에서 총병들이 초조하게 재장전을 시작한다.
첫 사격이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빈 자리를 채운 엘랑키아 기병들은 서두르지도 않고 유유히 다가온다.
그리고 말머리를 빙글 돌리며 오른손을 앞으로 내민다.
권총이었다.
타탕! 타타타탕! 타탕!
또 한 번, 굉음과 함께 화약 연기가 빽빽하게 피어 오른다.
“아으윽!”
“윽, 맞았어!”
“다음이 온다!”
차라리 무모하게 정면으로 돌입해 들어오면 상대하기라도 편했으련만, 그러기는 커녕 얄밉게도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권총만 쏘더니 그대로 돌아간다.
당연히 말 위에서 한 손으로 쏘는 권총은 보병이 지상에서 쏘는 소총에 비해서 사거리나 명중률이 크게 떨어진다.
사용하는 화약이나 총열 길이가 짧은 점 때문에 위력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도 있고.
하지만 10미터 정도라는 아슬아슬한 거리까지 다가와 말머리를 돌리며 진동이 가장 적은 순간에 발사하는 사격이다.
게다가 그 상대는, 어깨와 어깨가 닿을 정도로 빽빽하게 밀집한 보병 부대.
단순히 수치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이상의 위력을 발휘함은 분명했다.
전방에서 창대를 세우고 버티던 창병, 쪼그린 자세로 열심히 재장전을 하던 총병들이 무수히 쓰러진다.
주인 이른 창대가 지탱하던 힘을 잃고 땅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으으윽··· 버텨! 죽어도 버틴다!”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으면서도 떨리는 손으로 창대를 놓지 않은 전방 장교가 절규에 가까운 고함을 지른다.
그의 금속 투구와 얼굴에는 붉은 피가 점점이 튀어 있었다. 옆에 서 있던 동료가 얼굴에 총을 맞아 즉사하면서 튄 피였다.
어차피 이 정도로 빽빽한 밀집대형,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다. 산 자와 죽은 자, 죽어가는 자가 엉킨 상태로 악착같이 버티는 수밖에.
그렇게 첫 일제사격이 지나갔다 해도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 발, 혹은 두 발의 권총 사격을 마친 기병들이 말머리를 돌려 돌아가자, 당연하다는 듯 다음 대열이 접근한다. 장전된 새 권총을 빼들고서 말이다.
방금 납탄의 폭풍에서 살아남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보병들은 그걸 올려다 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군 총병들은 아직 재장전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타타타탕! 타타탕! 탕탕탕!
“끄아아악!”
“윽, 흐으으···.”
“커헉!”
이어진 두 번째 일제사격은 버티던 보병들의 육체와 마음을 동시에 파괴할 기세였다.
사격을 견뎌내지 못한 병사들이 줄줄이 바닥에 쓰러졌고, 장교들은 빈 자리를 채우고 버티기 위해 악을 썼다.
물론 그 자신이 사격의 희생자가 되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그나마 첫 대열은 총병들의 반격으로 밀도라도 조금 낮았지, 온전하고도 안전하게 접근해온 기병들의 사격이 더 위협적인 것은 당연했다.
“으아아아아아!”
“어이! 뭐 하는 거야!”
“멈춰!”
병사 한명이 괴성을 지르며 대열을 벗어나 달려나간다.
무력하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상황에 분노가 폭발했는지, 공포에 질려 이성을 잃어 유일하게 뚫려있는 방향으로 달려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 돌발적인 행동은 별다른 보답을 받지 못했다.
막 방향을 돌리던 군마에 부딪쳐 비틀거리더니, 기병이 휘두른 쇠 씌운 권총 손잡이에 뒤통수를 맞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던 그룬발트 보병들에게 무력감을 심화 시켰을 뿐이었다.
엘랑키아 기병들은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 무심하게 눈길도 주지 않고는 마치 승마 시범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완벽한 기마술로 말을 돌리고는 빠져 나갔으니까.
이를 지켜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세 번째’ 대열이 오고 있었으니까.
그 광경을 보면서 지휘관인 펠쿠트 백작은 모욕감, 그리고 전율을 느꼈다.
엘랑키아 기병들은 명백하게도 이쪽을 ‘떠보고’ 있었다.
총으로 무장한 엘랑키아 중기병들의 사격과 반전, 교대는 창병 대열로부터 대략 10여미터 정면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통상적인 거리에 비해서 더 가까웠다. 보통은 이보다 좀 더 먼 거리, 대략 20여 미터 거리에서 이루어진다.
당연하지만, ‘말머리를 돌리며 후열과 교대하는 순간’은 기동성을 생명으로 하는 기병대 입장에서 명명백백한 약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총의 명중률이나 위력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안전거리를 두는 것이다.
만약 잘 통제된 창병대가 창날을 앞세우고 일제히 전진해 오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기동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압박 받아 지리멸렬한 상태가 되어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엘랑키아 기병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치 너희는 그렇게 할 수 없잖아?’ 라는 오만함과 무모함이 뒤섞인 듯한 태도가, 지휘관인 펠쿠트 백작에게 모욕으로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지금 펠쿠트의 그룬발트 보병들이 취한 밀집 대형은 전진을 상정하지 않은, 철저한 방어 밀집 대형이었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밀집도를 더 올리고, 빈 공간을 총병으로 채워 넣은 극도의 방어대형.
만약 엘랑키아 기병이 무모한 것이 아니라면, 멀리서 이쪽 상황을 ‘분명히 확인’하고 자신들이 취할 수 있는 최대의 이익을 취한 것은 아닐까.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산된 공격이었다면··· 만약 그렇다면 더 큰 문제라는 생각에 펠쿠트 백작은 소름이 돋았다.
적장은 그만큼 냉철하고, 그 명령을 수행하는 엘랑키아 기병들은 그만큼 숙련되었다는 이야기일 테니까.
어쨌거나, 펠쿠트 백작과 그 휘하 보병들이 겪어야 할 세 번째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쩐지 두 번째 대열까지의 기병들 보다, 훨씬 크고 위압적인 군마에 강철 갑주로 잘 보호받는 기사의 형태로 말이다.
무언가 다르다.
무언가 잘못됐다.
이런 생각이 들며 뒷목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 이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뭔가 해보기도 전에, 세 번째 시련이 닥쳤다.
탕! 타다다당! 타당!
타타탕! 따당! 탕!
예상했던 세 번째 납탄 폭풍이 선두 대열을 덮쳤다.
“커헉!”
“마, 맞았어!”
“으으윽!”
“버텨라아아!”
거기까지는 지금까지와 같았다. 하얀 연기 속을 뚫고 날아온 탄환이 처음 만나는 모든 것을 부쉈다.
부러진 창대에서 튄 나무 파편, 총탄의 에너지를 견디지 못하고 깨져나간 투구와 흉갑의 쇳조각, 핏방울과 정말 운 없는 희생자의 손가락까지.
소름끼치는 작은 소용돌이가 그룬발트 보병 대열 앞에 늘어진 희생자들의 수를 더욱 늘렸다.
하지만 버텨냈다. 이를 악물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여전히 창병 대열은 건재하며, 대포라도 끌고 오지 않으면 이런 사격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불편한 자세와 반복된 위협에서도, 총병들은 재장전을 거의 끝냈다. 이제는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는다, 우리도 한 방 먹여줄 수 있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펠쿠트 백작은 방금 전 생각했던 ‘무언가 다르다’의 정체를 깨달았다.
엘랑키아 기병들이 멈추지 않는다. 반전하지도 않는다.
대신 성큼성큼 말을 몰아, 자신들이 만들어낸 화약 연기 속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다고베르 2세 폐하 만세!”
익숙하지 않은 억양이 익숙하지 않은 군주의 이름을 외친다.
권총 대신 장검과 기병창을 쥔 중장기병들이 그대로 밀도가 떨어진 창날의 숲을 뚫고 들어온다.
“으아, 으아아아!”
“온다! 창날 앞으로! 빨리 빈 자리 채워!”
“막으라고 멍청이들아아!”
빽빽하지 못한 창날은 반들반들하게 닦인 흉갑에 닿아 그대로 미끄러지고, 반격의 때를 노리며 화승을 조절하던 총병이 말발굽에 짓밟힌다.
“버텨··· 끄어억!”
‘창병의 영역’ 안쪽으로 성큼 들어온 엘랑키아 기사의 창 끝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장교의 턱을 찌르자 목소리 대신 피거품이 나온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이 조금씩 물러서는 바람에 가지런하던 창끝이 더더욱 흔들린다.
낙마의 위험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처럼, 그 틈으로 거침없이 다가온 기병들이 그대로 무기를 휘두른다.
그 모습을 보며, 그룬발트 보병들은 불현듯 깨달았다.
그들이 바로, 자신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엘랑키아 기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