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4.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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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술장님, 포탄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뭐 화약은 아직 모자랄 정도는 아니지만, 포탄이 부족하다네.”
“어휴··· 그 많던게 다 어디 갔대요?”
“아까 전투에서 우리 뚱뚱이들이 싹 다 먹어버렸지 뭐겠나! 위력이 화끈한 만큼 밥도 많이 먹는 녀석들이라니까?”
“아아··· 그랬지요.”
전투를 앞둬 긴장된 분위기가 흐르는, 보병과 포병들이 뒤섞인 최전선.
야로스 발렌켄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포술장들과 대화를 나눈다.
좀 전의 전투에서, 포병들이 뿌려댔던 ‘피의 카페트’는 대구경 공성포에 소구경 포탄을 가득 채워서 쏴댄 모험적인 포격의 결과였으니까.
쏠 수 있을 때 쏴버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급박한 전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라도 적을 격퇴하고, 결과적으로 살아남을 판단을 한 지휘관 첼레스티나와 끝까지 버텨낸 포병들의 활약을 칭찬해야 할 일이었다.
특히나 이들은 이런 전투에 익숙한 야전 포병들도 아니다.
그런데도 적 탄에 맞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며 자신의 역할을 다 했으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그 덕에 살아남긴 했지만 바닥난 곳간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남은 걸 조심해서 써야겠군요.”
“그래야겠지 뭐. 아까 난리통에 바닥에 엎어져 굴러다니는 것도 싹싹 긁어와서 다행이구만.”
“그러게요··· 아무튼 잘 부탁드립니다.”
첼레스티나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중앙에서 지휘관 역할을 계속하게 되면서, 야로스 역시 포병대와 이를 보호하는 하마 용기병대를 통솔하는 역할을 애매하게 계속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야로스 자네, 그렇게 옷을 챙겨 입으니 제법 맵시가 사는구만! 아주 타고나셨어?”
“...투구고 흉갑이고 다 주워 입은거라 엉망진창인데요?”
“허허허헛, 그래도 말이야 느낌이란게 있어.”
칭찬일지 아닐지 모호한 포술장의 웃음에 야로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전투가 격화되면서, 이대로는 죽겠다는 생각에 전장에서 굴러다니는 투구와, 포로에게서 벗겨낸 흉갑을 입고 있었다.
뭐, 무기 포함해서 지금 몸에 두르고 있는 무기와 방어구들 중 전장에서 노획하지 않은 게 없을 지경이지만 말이다.
익숙하지 않은 투구와 갑옷을 입은 것은 포병들 중 일부도 그랬다.
야로스도 권장하긴 했지만, 그들 스스로도 백병전에 휘말린 경험 탓인지 노획한 무기들을 알아서 챙기는 모습이었다.
펑! 뻐벙!
“어이쿠, 또 시작했구만.”
조금 떨어진 장거리 포대에서 포성이 울린다.
지금 전장에 남은 것은 총 13문으로, 이 중 3문은 장거리포, 나머지 10문은 단거리포로 포대를 구분하고 있었다.
야로스는 물론 보병 부대와 섞여 배치된 단거리포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현재 1천명을 조금 넘는 이 엘랑키아 좌측의 보병 부대는 절망적으로 창병의 수가 부족했다.
훈련받은 창병이라고는 지빌링엔 반연대 소속 밖에 없었기에, 전체의 삼 분의 일 정도에 불과했다.
통상 야전에 배치되는 보병 부대에서 창병 비율이 절반이거나, 약간 더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심각하게 걱정이 되는 비율이다.
그렇다고 다른 병과를 창만 들려준다고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엄격하게 진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특성 때문에, 총병에 비해 훨씬 훈련 기간이 필요한 병과이니까.
아무튼 얼마 안되는 지빌링엔 창병들은 대열의 중앙과 양 측면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었다.
비록 수는 적지만, 양군이 근접전에 휘말리게 되었을 때 총병들이 의지하고 함께할 수 있는 중요한 요새가 될 것이다.
물론 그 요새가 과하게 압박받지 않도록 지켜야 할 임무도 총병과 포병들에게 있지만 말이다.
“야로스, 야로스 여기 있나요?”
“예? 옙, 첼레스티나 중대장님! 여기 있습니다. 전투 준비 끝났습니다!”
“아, 수고했어요.”
말을 타고 달려온 첼레스티나가 말에서 내려 다가오자, 다른 총병들이 길을 비켜주고 포술장들은 고개를 숙이며 눈 인사를 한다.
한참동안 그녀의 지휘 아래에서 싸웠던 포병들은 어느 누구도 그녀의 권위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반긴다고나 할까.
그건 그 밑에서 싸워 보면 안다. 그냥 그···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 같은게 있다는 말이다.
특히나 화약 밥 좀 먹어봤다면 모를수가 없는 그런 거.
그렇게 모두의 신뢰를 받고 있는 여지휘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그런데 정말 미안하지만, 이동 준비를 해야 해요. 서둘러주세요.”
“예? 아,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그런데 어디로 이동합니까?”
“전진할 예정이에요.”
“전진? 앞으로 말입니까?”
“네에. 이번에는 우리가 공격측이 되겠네요.”
잘못 들은 줄 알았으나, 야로스가 들은 바는 틀림 없었다.
“저, 중대장님, 이대로 보병과 함께 전진하면서 전열을 유지하고 교전하는 겁니까?”
“네에, 맞아요. 슈토르히 시절에 많이 해 봤지요?”
“그건 슈토르히라서···. 외람되지만 저희 포병분들은 경험이 그렇게··· 많지가 않아서 걱정입니다.”
“네에, 뭐. 슈토르히는 처음부터 잘 했겠어요? 여러분은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야로스는 진심으로 슈토르히 연대는 처음부터 잘 했을 것 같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러고보니 첼레스티나 중대장은, 예전부터 생글생글 예쁘게 웃는 얼굴로 무리한 일을 시키기로 유명했었지.
그럴 때마다 죽을 고생을 하긴 했었지만··· 어찌어찌 하게 되긴 했었다. ···그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 몸 속에 박힌 느낌이긴 하지만.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신속하게 이동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네에, 고마워요. 이번에도 힘 써 주세요.”
“저희는 기병의 공격을 지원하는 겁니까?”
“으음, 아니에요. 우리가 공격의 선두가 될 거고, 기병 분들이 우리를 지원하실 거예요.”
“예에! 아, 아니 그런?”
갑자기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가뜩이나 창병 비율도 엉망이고 숫자도 적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데, 보병이 선두로 나간다고?
주변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포술장들 역시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첼레스티나는 설명이 필요하다 느꼈는지,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휘체계가 확실하게 잡히지 않고 함께 보낸 시간이 적은 혼성부대인 만큼, 각자기 자기 역할을 자세히 알고 납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우리는 보병은 열세이지만 기병은 우세잖아요?”
“맞습니다···.”
“그걸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예요. 비록 아군이 수적으로 열세이긴 하지만, 옆에서 엘랑키아 기사들이 노리고 있는데 함부로 접근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첼레스티나의 손이 적진을 가리킨다. 생각보다 가까운 코 앞의 적진을.
“적의 배치는 기병을 중앙에 둔, 우리와 반대 상황이죠. 그리고 우리 보병과 포병 부대는 아마 보병 보다기병 상대하는 게 편할 거예요.”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그래도 전쟁에서 짬밥 좀 먹은 덕분인가, 벼락치기지만 연대장도 한 번 해 봐서 그런가, 첼레스티나의 의도는 알 수 있었다.
아군은 중앙에 보병, 양 측면에 기병.
반대로 적군은 중앙에 기병, 양 측면에 보병이다.
그렇게 서로 약간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확실히 중앙의 아군 보병 부대가 전진하면 껄끄러운 상황이 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대륙 최강의 엘랑키아 기사들이 양 측면을 지켜주고 있는 한, 정면에만 신경쓰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적은 기병으로도, 보병으로도 상대하기 어려운 골머리를 앓게 될 것이고.
콘도티에레가 자주 했던 이야기이다. ‘전술이란 적이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던가, 아무튼 뭐 그런 비슷한 이야기였지.
딱히 바라지는 않았지만 이런 저런 전장을 전전하며 경험을 쌓은 지금 생각해보면 완전 맞는 말이다.
“말씀하신대로 이동 준비를 하겠습니다, 첼레스티나 중대장님.”
그게 생각만큼 잘 굴러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미 결정된 일, 최대한 수행하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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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포탄이 스치고 지나가며 운 나쁜 군마의 정강이 뼈를 완전히 박살냈다. 구슬픈 비명소리가 양군이 대치한 평원에 울려퍼졌다.
적당한 거리로 다가가 상황을 살피던 소수의 그룬발트 기병대가 서둘러 말머리를 돌려 물러선다.
그 빈자리에는 고통스럽게 신음을 흘리며 몸부림치는 군마와 낙마의 충격으로 죽은 건지 기절한 건지 꼼짝도 하지 않는 기병만이 남았다.
“적 보병은 계속 접근하고 있습니다. 1분에 150미터 정도로 아주 느리지만 꾸준히 전진해오고 있습니다.”
보고하는 전령의 목소리에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도무지 적군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묵묵히 보고를 듣는 만프레트 그로블 폰 자이트리츠는 그렇지 않았다.
적의 행동은 아군의 허를 찌르기는 했지만,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불과 1천 명 남짓한 보병부대를 전위로 내세와 공세를 취해오고 있다.
그 정면에는 크게 3개 대열로 깊은 종심을 편성한 그룬발트 기병대가 있었다.
전위가 1000, 중앙이 1000, 후위가 400.
그리고 양 측면을 각각 1500씩 나눈 보병대가 견고한 밀집 대형으로 지킨다.
가장 두려운 것은 오늘 이골이 나도록 경험한 엘랑키아 기사의 돌격력이다.
특히 비슷한 규모 기병끼리의 전투에서는 좀처럼 이기기가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만프레트는 기병으로 종심이 깊은 여러 겹의 대형을 구상했다.
전체적으로 3개 대열이지만, 각 대열은 더 많은 횡대로 나뉘어 있기에 단일한 거대 대열에 비해 기동성을 갖추고 충격에 내성을 가진다.
물론 대열 하나하나의 전투력은 떨어지지만 어차피 모든 게 완벽한 채로 싸움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엘랑키아 기사들이 단숨에 전투를 끝내기 위해 돌격해온다면, 그룬발트 기사들의 깊은 종심이 이를 막아내거나, 최소한 시간은 끌 수 있을 것이며···.
양 측면의 보병들이 적절한 타이밍에 지원하거나, 측면 사격을 통해서 막대한 사상자를 강요할 수 있을 것이다.
적이 이를 예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들이 가진 강한 카드인 기병을 뒤에 꽁꽁 숨겨놓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어, 어떻게 해야겠소, 만프레트 경?”
“아군 보병도 전진시킬 겁니다.”
“그런다면 아군 기병의 정면이 막히지 않소?”
“적 보병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정면으로 전진합니다. 설령 적 보병과 나란히 서게 되어도 상관 없습니다.
적은 중앙이 보병, 아군은 양 측면이 보병이다.
그러니 서로 정면을 향해 전진한다면 직접적인 충돌 없이 서로 지나치게 될 것이다.
기묘한 장면이 되겠지만, 전투에서 이런 식으로 대열이 섞이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대개의 경우, 의도한 바가 아니라면 한쪽이 속도를 조절해 전선을 정리하게 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만프레트는 대열을 정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했을 때, 적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전선이 뒤섞이는 것을 우려해 전진을 멈출까?
양측의 보병부대 중 하나에 전력을 집중하려 할까?
어느 쪽이든, 적장 역시 고민하게 될 것이었다.
“호오, 적이 아군에게 풀어야 할 문제를 강요했는데, 만프레트 경은 오히려 다른 문제를 만들어 적에게 돌려주고 계시는구려!”
“그렇습니다, 공작님.”
만프레트의 설명을 들은 디오보르크 공작은 금방 이해했다. 역시 그가 모시는 주군은 전혀 아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보병들이 충분히 전진하도록 적이 방치한다면, 그 때는 적을 반포위해서 섬멸하면 됩니다.”
“그래, 그렇게 되겠군···. 엘랑키아 국왕을 반드시 사로잡아야 할 텐데···.”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가진 공작이 일견 이해가 되면서도, 만프레트는 적진을 주의깊게 살폈다.
확실히, 적 국왕이 어디 있는지는 중요한 문제였다.
아니, 근본적으로 지금 정면의 적진에 엘랑키아 국왕이 확실히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솔직히 적의 배치를 보면 후방에 주군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중앙이 너무 약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양측방 기병대 중 하나에 있다는 것일까.
어차피 이 작은 전장의 전투는 짧으면 10분, 길어야 30분 이내에 판정이 날 것이다. 적 국왕이 여기 있든 없든, 서로 기병이 중심인 이상 오래 끌 상황은 아니니까.
일단은 엘랑키아 국왕을 어떻게든 찾아내려고 한다기 보다는, 전투 자체를 이기는 쪽으로 생각을 잡는다.
뻐어엉! 펑! 쾅!
적의 포성이 또다시 울린다. 이번에는 방금 명령을 받아 전진하기 시작한 그룬발트 보병대가 표적이었다.
보병대를 지휘하고 있는 펠쿠트 백작은 아직은 포병으로 반격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만프레트 경! 최대한 근거리에서 적진을 정찰했지만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다. 창병의 수가 적기 때문에 지금 공격하면 바로 돌파가 가능합니다!”
그 와중에도 ‘디오보르크 공작의 친구’인 젊은 기사들은 전투를 시작하지 못해 몸이 달아오른 모양이었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안그래도 전장의 주인공은 여러분이 되어야 하니까요.”
혈기왕성하고 통제가 잘 되지 않는 점이 다소 성가시기는 했지만, 그들이 아군에 있어서도 최강의 카드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다만 그 투입은 ‘만프레트의 출제에 대한 적의 대답’을 본 뒤에 결정될 것이다.
“아군 보병이 교전을 시작한 직후, 선봉을 맡기겠습니다.”
“오오, 좋습니다! 약속하신 겁니다?”
“예. 전방으로 가서 부대를 이끌고 대기하시면 신호를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만프레트 경!”
그 역시 무척 궁금했다. 상대의 대답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