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3.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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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 합쳐 십만을 넘는 대군이 격돌하는 전장의 한구석에서, 수천 명 정도의 병력들이 새로운 전선을 연다.
그냥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양측의 군주들이 직접 친위대를 이끌고 격돌한다··· 라는 비상식적인 상황 만큼은 아닐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벌어지기 힘든 일이 여기서는 실제로 벌어진 것은, 전장이 유난히 넓고 중앙과 측익이 멀리 떨어진 특이한 상황 때문도 있으리라.
허나 이럴 것이라면, 처음부터 양측의 군주들이 나서 자웅을 가리는 것이 맞지 않았나?
서로 십수만의 대군을 동원하는 대신에 말이다.
만약 이 친위대 끼리의 작은 전장에서 승패가 갈리기 전에, 중앙군을 포함한 본대끼리의 싸움에서 승패가 갈리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승패가 갈리면, 정말로 전장 전체의 승패가 정해지나? 오히려 분노와 복수심에 가득차 악에 받힌 병력이 끝까지 투항을 거부할 확률은?
비상식에 비합리. 서로 일부러 위험을 자처하는 듯한 기묘한 상황.
서로 규칙을 정의한 적도 없고, 직접 논의를 해서 협의를 본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닌 기괴한 작은 전장.
하지만 거기 걸린 판돈은 막대하다.
막대한 판돈은 욕망을 부르며, 욕망은 맹목을 부른다.
한 번 눈이 먼 자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욕망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전재산을 도박판에 밀어 넣으며,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도 최선의 행동이라 착각하는 노름꾼처럼 말이다.
따라서 어떤 이들에게는, 이 비상식적인 행동이 ‘가장 합리적인’ 행동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기는 자는 누구보다 빠르게 승리를 쟁취하고, 제위와 영광을 모두 얻을 것이며, 역사에 길이 남을 정복자가 되리라.
혹은 그저 양측의 과도한 욕심이 마침 균형이 맞아, 서로 미친 짓을 시작하고 말았다 해도 될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양측의 욕심이 이 기묘한 작은 전장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라고 하지만, 이 전장을 여는데 큰 역할을 한 장본인 중 한 명, 그룬발트 군의 총참모장 만프레트 그로블 폰 자이트리츠는 맹목에 빠져있지는 않았다.
대체로 자신의 의견을 따르던 주군, 디오보르크 공작이 강하게 자신의 생각을 요구했다.
어쩌면 엘랑키아 국왕을 죽이거나, 사로잡거나, 못해도 전장에서 쫓아보낼 수 있는 기회이다.
이런 기대를 품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는 어디까지나 냉정하고도 현실적인 판단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디오보르크 공작을 위한 영웅의 무대를 준비하면서도 그 눈은 중앙부를 향하고 있었다.
만프레트가 생각하기에, 이 작은 전투가 정말로 승패를 결정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실제로 양측의 군주들이 직접 전장에 나올지도 알 수 없을 뿐더러, 아마도 실제로 한쪽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해 군주를 잃는 경우는 없으리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서로 진짜 주군을 전장으로 불렀다면, 필연적으로 각자의 주군을 지키기 위해 소극적으로 싸울 수 밖에 없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흉내만 내는 거짓이겠지.
머리속으로 여러가지 계산을 하며, 만프레트는 전장을 평가한다.
중앙군에서 보낸 병력은 2000기 정도의 기병과 1000 명이 조금 안되는 보병.
이를 우익군의 펠쿠트 백작에게 요청한 병력과 합치면 기병은 총 2400, 보병은 3000 정도가 된다.
엘랑키아 군에 비해서 약간 많은 정도. 이 정도가 딱 적당하다.
병력을 많이 동원해봤자 적이 응하지 않겠지.
그리고 만약··· 디오보르크 공작의 말대로 그가 ‘영웅’이 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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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설마··· 거짓말이죠? 그런 바보가 있을 리 없어요.”
“정말입니다, 첼레스티나 경.”
“어··· 그러니까, 정말로 그룬발트 제국의 황제가 전장에 직접 나섰다고요?”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유력한 황제 후보자이지만 말입니다.”
“...설마, 그런 것처럼 꾸미고 있는 거겠지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첼레스티나는 깊게 한숨을 내쉰다. 상황이 예상과 너무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정말로 이쪽의 도발에 응해 한 무리의 병력이 새로이 전장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처음부터 이 계획, 다고베르 2세 명의로 적장을 도발하는 전령을 보내는 계획을 반대했었다.
그래서 얻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적어도 다고베르 2세가 여기 머물면서 하는 건 너무도 위험했다. 아마 콘도티에레가 알게 되면 분명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다소 전공이 있고 신임받는다고 한들, 일개 용병대장의 부관인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국왕의 면전에서 조심스럽게나마 우려하는 의견을 내는 것조차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으니까.
어차피 그녀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다.
다고베르 2세가 미리 안전한 본진으로 이동한다면 이는 괜찮은 유인책이 될 수 있다 생각한 것이다.
만약 적장이 도발에 응한다면? 어쨌거나 진짜로 그룬발트의 황제 후보자라는 가치있는 포로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리고 응하지 않는다면? 그럼 이를 열심히 홍보하면 된다.
전쟁터에서는 의외로 소문이, 특히나 자극적인 소문은 빠르게 전해진다. 정확히 말하면 내용보다는 분위기라고 해야 할지.
병사들을 시켜서 외치게 하고, 포로 중 몇 명을 풀어 소문을 퍼뜨리게 하면 정확한 내용은 몰라도 ‘엘랑키아 국왕의 도전을 피했다’ 정도의 소문은 순식간에 전장 전체에 퍼질 것이다.
조금 살이 붙어지면 ‘우리 사령관이 적을 피해 도망쳤다’ 따위로 확장이 될 수도 있었다.
이기고 있는 동안에는 이런 소문은 큰 의미가 없지만, 전황이 불리하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면 나름의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특히나 전투가 한참 진행된 지금, 체력적으로 한계를 느끼고 있을 병사들의 마음을 좀먹고 들어가리라.
또한, 엘랑키아 군 사이에서도 소문은 돌 것이다.
병사들 사이에서 상당히 인기가 많은 편인 국왕이자 사령관, 다고베르 2세가 어떤 형태로든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문이니까.
적어도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
그렇다면야 이쪽은 큰 리스크 없이 유형 무형의 이득을 볼 수 있다··· 라고 첼레스티나는 명석한 머리로 생각했다.
다만 이 생각에는 크나큰 하자가 있었는데···.
바로 국왕 다고베르 2세가 전장에서 빠져야 해당된다는 점이었고.
“모두 이번 한 번 잘 부탁하네! 조금만 시간을 벌어주면 근위대 친구들이 어떻게든 해 주지 않겠나?”
···다고베르 2세는 후방으로 빠질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빠질 거면 시선이 집중되기 전에 슬그머니 빠졌어야 했다. 이제 와서는 분장이라도 하지 않는 한 바로 들킬 테니까.
“자네들은 어디에서 왔나? 어, 지빌링엔? 아! 자네들이 그 블랑독에서 보낸 용병들이군. 피흘리는 흑곰에게 내 옆자리를 맡길 수 있다니 든든하군.”
다고베르 2세는 안전한 곳으로 피하는 대신, 말에서 내려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대화와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한 세대 이전만 해도, 엘랑키아 귀족 기사들은 보병들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그게 오랫동안 엘랑키아 왕국이 제대로 된 보병 부대를 키워내지 못했던 직접적인 원인이다.
누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분야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고 싶어하겠는가?
허나 이번 국왕, 다고베르 2세는 전혀 다르다. 전장에서 필요한 정예 보병 군단의 필요성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오래 전부터 보병 양성에 신경을 써 왔다.
그 성과는 분명히 나타나고 있었다. 당장 이번 전투에서도 엘랑키아 보병들은 그룬발트 보병에게 밀리기는 커녕 호각이나 그 이상의 역량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그런 점을 감안해도, 신하의 신하인 변방 제후가 보낸 용병들과 저렇게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것을 보면 통치자로서나 지휘관으로서나 타고난 인물이라는 것은 느껴졌다.
아니··· 조금 다른가.
첼레스티나도 콘도티에레를 따라 사령부를 들락거리면서 몇 번 대화를 하며 느꼈다.
다고베르 2세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바로 ‘자신을 이기게 만들어 주는’ 부하들 모두를 말이다. 그렇기에 콘도티에레에게도, 자신에게도 이리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이겠지.
“첼레스티나 경!”
“네에, 넷! 폐하?”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첼레스티나는 반사적으로 국왕이 내미는 손을 덥썩 잡았다. 따뜻하고 큼직한, 남자다운 손이었다.
“이번 전투에는 귀관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오! 보병 전력이 상대의 절반도 되지 않는구려···.”
“콘도티에레의 휘하에서는 흔한 일이었어요. 전술가는 주어진 전력을 활용하는 사람이지 없는 걸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었고요.”
“하하하핫! 그래, 그게 정확하군.”
“게다가 포병은 아군이 우위에 있어요. 이길 수 있도록··· 폐하의 장병들을 허투루 잃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부탁하네. 에트 경에게도 그랬지만, 귀관에게도 많이 의지하게 되는군.”
이어서 다고베르 2세는 티테니아나 뤼브르, 울리히와 같은 지휘관들과 악수를 나눈다. 첼레스티나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중이라는 것은 아마도 모르겠지.
“첼레스티나 경은 내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아니에요··· 폐하. 겁이 많을 뿐이에요오.”
“허어, 내가 아는 가장 용감한 여인이 그런 말을 하는가. 무엇이 두렵단 말이오?”
“콘도티에레가 도착하기 전에 일을 그르칠까봐···.”
“그럴 일이 없도록 협력해야겠지. 슬슬 적도 결진을 하고 있는데, 저기 그룬발트의 다음 황제가 있을 것으로 보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했는가?”
첼레스티나의 거침없는 대답에 국왕은 다소 놀란 것 같았다.
“공격을 할 생각이 있기는 한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극단적으로 수비적인 진형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건 그렇지만··· 그저 시늉일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는 건가?”
“네에, 그건 지금부터 물어 봐야죠.”
“물어보다니? 어떤 식으로?”
“콘도티에레는, 항상 전투를 주고 받는 건 지휘관 끼리의 대화나 다름 없다고 했었거든요.”
“그거 정말 멋진 말이군. 맞아, 적과 무기를 부딪치고 있으면 상대의 목소리가 들릴 때가 있지. 으음, 그렇고 말고.”
아무리 전장이라고 한들, 첼레스티나의 태도는 다소 무례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다고베르 2세는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그녀의 대화 방식이 썩 마음에 든 모양이다.
“자, 그럼 에트 경, 귀관의 콘도티에레에게 여기 상황을 알리는 보고를 올려주게. 나 또한 ‘내 역할’을 하러 가야겠군.”
“네에, 분부대로 할게요!”
콘도티에레가 알게 되면 어떤 말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보고를 게을리 할 수는 없었다.
다고베르 2세는 당연하지만 이 전장에서 최상급자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부대 지휘계통을 그대로 두며, 자신은 원래 휘하인 근위기사들만 지휘하겠다 못박았다.
이는 그동안 잘 싸운 중견 지휘관들을 존중하는 행동이기도 했지만, 말 그대로 잡탕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부대에 다른 지휘계통을 만드는 것은 큰 모험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필연적으로 첼레스티나는 또 한번, 보병과 포병을 지휘해 전투 부대의 중추 역할을 해야 했다.
종이에 간단하게 상황을 또박또박 적으며, 첼레스티나는 전장의 여러가지를 확인한다.
아군과 적군의 전력, 거리와 배치, 예상되는 교전 시간까지도.
슈토르히 시절부터 항상 도맡아서 했던 일이고, 나름 자신있는 일이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다소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나 오래, 이렇게나 여러번 콘도티에레의 곁을 떠나 별도 부대를 지휘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뒤에 콘도티에레가 함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정말 든든할 텐데. 방향 모를 아쉬움이 한숨이 되어 입에서 나온다.
대략 보고서가 마무리 되려는 찰나, 멋지게 철갑으로 온 몸을 두른 중기병들이 줄을 맞춰 보병대 후방으로 다가왔다.
“어엇, 폐하? 폐, 폐하! 여기는 위험해요! 자칫 포병에 의해 저격당할 수도 있어요!”
“하하핫, 첼레스티나 경, 귀관이 말하지 않았나? 적이 꽁꽁 숨기려 하니까, 오히려 그룬발트 황제 후보의 위치를 알 수 있다고. 생각의 전환일세.”
“아··· 아··· 그래도요···.”
“걱정 말게, 만약에라도 포탄이 낙하하면 피할 정도의 눈치는 가지고 있으니까.”
“그게 이미 늦··· 하아··· 네에, 폐하. 아군 포병을 믿어야겠네요오.”
이미 반쯤은 광기의 파도에 올라 탄 상황이나 다름없다. 비상식에 비상식이 거듭되는 상황, 첼레스티나는 그냥 주어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펑! 뻐엉! 펑!
가까운 거리에서 포대가 굉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적정한 거리에 들어오자, 포격을 위임한 아군 장거리 포가 불을 뿜은 것이다.
예정된 포격 거리는 300여 미터, 전투를 결심하면 한달음에 달려올 수도 있는 거리였다.
다소 들떠 있던 주변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이 느껴진다.
그나마 포병이라도 우위에 있어 다행이다. 보병 숫자가 적에게 절반 밖에 되지 않으니 정말 조심해야 했다.
심지어 그 대다수는 방금 전까지 전투를 거듭해 체력이 많이 빠진 상황이었다. 장기전은 위험하다.
하지만 아마 장기전을 하고 싶어도 이런 상황에서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총격을 다섯 번 정도 교환하기 전에 승패는 사실상 갈리지 않을까?
신중하게 싸울 생각이지만, 신중하게 행동할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전령! 이 편지를 콘도티에레께 전해줘요.”
“옙, 알겠습니다!”
현재 콘도티에레의 위치는 불분명하다. 이동 중이란 것을 알고는 있지만. 전언이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하기를 희망해본다.
“지금부터 포병대의 지휘를 맡을게요. 어느 포대도 제 명령 없이는 발사도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