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17화 (484/556)

47-52.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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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이오, 만프레트 경.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오. 나를··· 이 전장의 영웅으로 만들어 주시오.”

“디오보르크 공작님···.”

“전장에서 엘랑키아 국왕을 사로잡는다. 그것이야 말로 모든 그룬발트의 신성 황제 후보자의 바람이 아니겠소?”

만프레트는 난감한 표정으로, 전투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강렬하게 자신의 욕망을 피력하는 디오보르크 공작을 낯설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우측방에서의 전투에서 휘하 부대를 잃고 엘랑키아 기사들에게 포로로 잡힌 그룬발트 귀족 기사가 있었다.

어느 명문 후작가의 방계인 그 기사는, 한참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주변 전투가 마무리 된 후 어디론가 끌려갔다.

놀랍게도 포박에서 풀려난 기사의 눈 앞에는, 다름아닌 엘랑키아의 국왕 다고베르 2세가 있었다고 한다.

이상할 정도로 친근하게 다친 곳은 없냐며 안부를 물어온 다고베르 2세는 ‘그대는 그룬발트의 다음 황제’와 아는 사이냐는 질문을 했다.

그렇다는 대답에 기뻐하며, 풀어주고 무기와 군마를 돌려줄 테니 자신의 전언을 전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한다.

전언의 내용은 이러했다.

‘직접 전장에 섰으나, 그대의 신하들은 아무도 전장에 나서지 않는구려. 엘랑키아의 국왕으로 묻겠소. 귀하는 600년 전, 적국 국왕의 목을 취했던 드라크문트 대제의 위업을 알고 계시오?’

그 전언을 가진 기사는 곧바로 사령부로 귀환하였고, 어느 얼빠진 장교의 안내를 받아 디오보르크 공작을 만나 이를 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된 디오보르크 공작이 갑자기 이런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600년 전. 그리고 드라크문트 대제.

길고 긴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역사 속에서도 ‘대제’의 이름을 가진 군주는 많지 않았다.

물론 대제라 자칭한 황제들이 없지 않았으나 역사가들이 진심으로 대제라 기록하고, 백성들 사이에 내려오는 설화에도 그 이름으로 남은 이는 별로 없다는 말이다.

그 중 드라크문트 대제는 아마도 제국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시기를 이끌었던, 기록자에 따라서는 ‘군신’이라는 칭호조차 가진 인물이다.

동쪽으로는 난립한 무수한 제후들을 정복하고, 현재의 그룬발트 제국 동부 국경을 확립했다.

남쪽으로는 산맥과 바다를 건너 주디칼리를 정복했으며, 반도 전체의 절반 이상이 대제의 권위에 복종했다.

마지막으로 서쪽으로는···.

대군을 이끌고 엘랑키아를 침공, 크고 작은 승리를 거두며 거침없이 진격 또 진격을 거듭했다.

마침내 엘랑키아 왕도 베르마유에 도달했으며, 사와르 강의 물로 자신과 신하들의 목을 축였다.

아마도 베르마유를 직접 눈으로 본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황제일 것이다.

비록 베르마유를 함락하지는 못했으나,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또 한 차례 엘랑키아 대군을 격파한다.

이 전투에서 엘랑키아 귀족들이 하도 많이 죽은 탓에 여러 대귀족가의 혈통이 방계로 교체되었다는 말이 전설처럼 내려온다.

또한 강변에서 벌어진 양국 군주 끼리의 일 대 일 대결에서도 승리, 직접 엘랑키아 국왕의 숨통을 끊어 놓기까지 했다.

그룬발트 측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맨 손으로 적국 국왕의 심장을 터뜨려 죽였다고 한다.

이것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그룬발트는 물론 그 어떤 나라의 군주도 해내지 못한 엄청난 위업이었다.

전쟁터에서 사망한 엘랑키아의 국왕은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고베르 2세는 바로 이것, 어떻게 보면 자국과 조상들의 치부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당연히 명백한 도발이었다.

자신의 목을 취할 생각이라면 언제든 와서 가져가 보라는 철저히 계산된 도발.

그리고 디오보르크 공작은 거기 넘어가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침착한, 혹은 무관심한 ‘지휘’에도 무색하게 말이다.

제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 회전의 승리자.

26년 만에 즉위하는 신성 황제.

이 정도의 타이틀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전장에서 엘랑키아 국왕을 제압한 황제’라는 위업을 세우고 싶은 모양이었다.

“공작님,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현재 전황은 안타깝게도 아군에게 유리하지만은 않습니다. 저에게 며칠만 시간을 주십시오. 반드시 폴름스의 승리자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엘랑키아의 국왕은 빠져 나갈 것이 아니오?”

“아마도··· 그렇습니다.”

엘랑키아 군도 정신머리가 있다면, 반드시 보존해야 하는 핵심 전력과 국왕을 먼저 후퇴시키려 하겠지.

만프레트의 생각대로 한다면 전략적으로 승리야 하겠지만, 국왕 자신을 포위망에 가두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었다.

그룬발트 군이 아무리 많다지만 폴름스 주변의 넓은 전장을 완전히 감쌀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적 국왕이 직접 전장 한 가운데에 모습을 드러낸 지금이야말로 좋은 기회요! 이 내가 제국 전체 역사상 둘 밖에 없는 영웅으로서 제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 말이오.”

“....”

“설마, 내가 그저 공훈에 미쳐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시오? 그게 아니오! 나는 그저 완전무결한 정치적 상황으로 통치자가 되어, 안정적으로 제국을 이끌어 가기만을 원할 뿐이오.”

디오보르크 공작의 표정을 보면, 그가 얼마나 간절하게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선제후 대다수의 확고한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아무리 황제라 해도 정치적 입지는 불안할 것이다. 이는 그간의 역사가 말해준다.

엘랑키아 대군의 침공을 격퇴하고, 그 군주마저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면··· 이는 정말로 완전무결한 영웅적 행동으로 모두에게 인정 받으리라.

암만 정치적 견해에 반발하는 선제후 가문이라 할지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을 도리는 없으리라.

최소한 몇십 년 정도는.

즉, 디오보르크 공작의 말은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게 의미하는 엄청난 리스크가 문제였지만 말이다.

우선 만프레트가 생각하기에 이번 전투는 몰라도, 폴름스를 둘러싼 전쟁 자체는 결코 질 수 없는 상황이다.

막대한 병력을 투입하고서도, 폴름스 동북부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깔끔하게 승리하지 못한 것은 전술가로서 오점이 될 일이리라.

허나 전략가로서는 어떤가?

비상식적인 강함을 가진 엘랑키아 기사대를 앞세운 적을 상대로, 충분한 준비 없이 지휘를 맡아 호각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연전과 소모전이라는 아름답지 못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엘랑키아 군이 가진 전술적 이점은 시간이 흐를수록 빛이 흐려질 것이다.

최종적으로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확고한 승리, 게다가 새로운 황제의 탄생을 알리는 황금빛 승리임이 확실하다.

만프레트는 이 확실한 전략적 우위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또 하나의 리스크가 있었으니···.

바로 전장에서 그룬발트 군에게 죽거나 사로잡힌 엘랑키아 군주는 역사상 딱 한 명이다.

그러나 반대로, 엘랑키아 군에게 죽거나 사로잡힌 그룬발트 황제는 무려 네 명이나 된다.

이는 비교적 통치자 개인을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된 군사 귀족 국가인 엘랑키아 국왕과, 상징적 권력에 비해 실질적 권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은 그룬발트 황제의 입지 차이일 수도 있겠다.

허나 오랜 세월, 보다 넓은 영토와 인구를 가지고도 숙적 엘랑키아에게 눌려 살아온 그룬발트 제국 오욕의 역사를 상징하기도 한다 하겠다.

역사상 두 번째인 영웅 황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

역사상 다섯 번째인 치욕스러운 포로 황제가 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얻는 것에 비해서 위험이 너무 컸다. 만프레트로서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고용된 참모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의 주군은 모든 지휘를 그에게 맡겨 신뢰를 보여주었고, 오늘 단 하나의 욕망을 보였을 뿐이다.

그게 다소 과도한 욕망이란 생각은 들지만 말이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공작님.”

“오오, 고맙소이다!”

“하지만 엘랑키아 국왕은 젊은 시절부터 여러 차례 토너먼트에서 승리한 기사라고 합니다. 혹여라도 직접 무기를···.”

“으음, 물론이지!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소. 엘랑키아 국왕을 쓰러뜨리거나 포박하는 것은 ‘나의 친구들’이 할 것이오. 나는 그저 전장에서 승리자들에게 축복을 내릴 뿐.”

“알겠습니다, 공작님.”

방금 디오보르크 공작이 말한 ‘나의 친구들’이란, 그가 직속으로 이끌고 있는 비공식 친위대였다.

대다수가 제국 전역의 여러 가문들에서 보낸 젊은 후계자들,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는 가문의 정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명문가의 자제들이라고 반드시 뛰어난 기사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당연했으나, 적어도 그들을 포위하는 정예 호위병들은 진짜 중의 진짜라고 할 수 있었다.

만프레트를 비롯한 전쟁관의 참모들은 병력 재편성 과정에서도 이들은 빼 놓았으며, 실질적인 전력으로 계산하지도 않았다.

총사령관 디오보르크 공작의 개인 호위대로 후방이 존재하는 것으로 그들의 역할은 다 한다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상당한 규모인 이 ‘디오보르크 공작의 친구들’은 강력한 예비대 전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어차피 양측의 예비대는 거의 고갈되었다. 그룬발트 측은 물론이고, 엘랑키아 측도 죽을 맛이겠지.

국왕이 직접 근위대를 이끌고 나선 상황이 그것을 대변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제 그룬발트 측에서 그에 해당하는 공작의 친위대가 출격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리 될 기묘한 운명의 일부였는지도 모르겠다.

“제가 직접 보좌하겠습니다, 공작님. 엘랑키아의 기사, 그것도 근위대입니다. 얼마나 강할지 솔직히 걱정됩니다.”

“만프레트 경의 보좌라면 내가 무엇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소!”

“다만 위험한 상황이 온다면 전군을 전장에서 물리도록 하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공작님, 아군은 이러한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알겠소, 알겠소! 이번 한 번만 내 고집대로 할 뿐, 예정대로 잘 되지 않는다면 귀하의 의견을 따르리다!”

이미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 만프레트는 차분하게 상황을 복기해본다.

확실히 엘랑키아 국왕이 자신을 노출시킨 상징적인 상황은 오늘 확실하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중요한 타이밍이다.

자신의 위치를 밝히고 도발까지 한 상황에서 쉽게 진을 물리지 못할 것이다.

만약 여기서 불리하다고 도망친다면 사령관이 전장을 벗어나는 꼴이 된다.

그럼 남은 병력은? 당연히 사기가 곤두박질하고 잘 싸우던 중앙군이나 우측방 또한 전투를 포기하고 싶어지겠지.

그럼 지연전이고 소모전이고 다 상관없이, 오늘이 역사에 길이 남을 폴름스 승전일이 될 것이다.

엘랑키아 국왕을 잡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만프레트는 사냥꾼의 마음이 되어 새로운 전장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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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정신이 나갈 것 같군! 이제 와서 디오보르크 공작님과 엘랑키아 국왕과의 일전이라고? 이럴 거면 처음부터 일 대 일로 싸워서 결판을 내지 그랬나!”

그렇게 말하는 그룬발트 군 우익군 지휘관,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은 욕설이라도 퍼부을 기세이면서도, 그 마음 속에는 묘한 기대감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오늘 그가 지휘하는 우익군은 적에게 거듭 기만당하고 짓밟혔다. 훨씬 우세한 병력을 가지고도 농락당하듯 연달아 패배했다는 것이다.

결국 더 이상의 전투를 포기하고 수비만 하겠다고 사령부에 ‘통보’한 꼴사나운 상황에서 말이다.

총사령관 디오보르크 공작의 명의로 내려온 명령은 ‘적국 국왕과의 결전을 위해 1개 연대 규모의 정예군을 준비할 것’ 이었다.

···솔직히 이런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익군에는 멀쩡한 연대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외치고 더 이상의 병력 차출은 힘들다며 거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양측 사령관의 직속 병력이 격돌하는 보기 드문 상황이다.

여기서 엘랑키아 국왕을 쓰러뜨리는 데 전공을 세운다면 지금까지의 추태와 오욕이 보상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4개 연대에서 상태가 좋은 중대들을 선발해 하나로 모았다.

약 2200명의 보병과 400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혼성 연대, 그 절반 가량은 펠쿠트 백작의 고향 출신인 혈육이나 다름 없는 부하들이다.

거기에 간신히 살려내 퇴각한 4문의 야포를 전부 배정했다.

그리고 그 지휘는 백작 자신이 하기로 했다. 이유야 당연히, 함께 고생했던 그들만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고.

아직 충분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1개 연대 정도의 병력만 투입하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적군도 병력 규모는 그저 그렇다. 여기 만약 남은 병력 전체가 달려든다면 적도 바보가 아닌 이상 물러서려 하겠지.

아군도 적군도 모두 빠져나간 전장 한 가운데, 엘랑키아 왕실의 깃발을 휘날리는 작은 엘랑키아 군대가 도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가장 혼란스러웠던 그룬발트 군의 우측방이, 지금은 가장 조용하고도 긴장감이 넘치는 장소가 되고 있었다.

“펠쿠트 백작님 무운을 빕니다!”

선발된 보병들과 함께 다시 한번 최전선으로 돌아가려는 그에게, 뒤에서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종일 함께한 전쟁관의 여참모, 타를라 니케 폰 자이트리츠의 목소리였다.

펠쿠트 백작이 눈을 크게 뜬 이유는 지금까지 타를라가 이렇게 큰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맡겨두게! 엘랑키아 국왕의 목을 가져오겠다!”

그 말에, 전장으로 떠나는 이들과 떠나 보내는 이들 모두가 함성을 지른다.

아직 그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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