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1.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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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그룬발트 제국군 사령부에서 실질적인 지휘를 맡고 있던, 만프레트 그로블 폰 자이트리츠는 우익 지휘관 펠쿠트 백작이 보낸 보고를 받았다.
아니, 정확히는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교관이기도 한 그가 우수한 제자이자 후배로 여기고 있는 타를라 니케 폰 자이트리츠의 보고이기도 했다.
“우익군은 증원된 적 별동대에 밀려 후퇴. 더 이상의 진격이나 우회 공격은 불가능한 상황. 슈뵈켄 마을에서 중앙군 측방으로 이어지는 라인을 지키도록 하겠음. 이상입니다.”
“...알겠다.”
어두운 내용에 보고하는 보좌 참모의 얼굴이 떨렸지만, 만프레트는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이는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좌익군의, 레트폴레 후작이나 참모 뮤에르니히에게서는 아무런 보고가 없나?”
“이전 보고 이후로 아직 없습니다. 전령을 보내 볼까요?”
“음, 그럴 필요는 없겠지. 그만두도록.”
“옛, 알겠습니다.”
만프레트와 마찬가지로 자이트리츠 전쟁관 소속인 보좌 참모는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다. 마치 좌익에 전령을 보내 확인하는 것은 껄그러운 일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좌익군에서 얼마 전, 마지막으로 온 내용은 살벌하기 그지 없었기 때문이다.
‘전열의 패주를 막기 위해 아군의 손으로 아군을 쏠 수 밖에 없었소. 이런 생지옥을 전술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 또한 본관의 의무로 받아들이고 있소. 허나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 모르니 신속히 결말을 내 주기 바라오’
깊은 분노와 기대가 뒤섞인, 남다르게 말수가 적은 숙장의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보고였다.
어쩐지 유서처럼도, 결투장 처럼도 느껴지는 찜찜함이 있었다.
확실히 레트폴레 후작은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다.
본래는 상대적으로 열세인 엘랑키아 우익군을 상대로 큰 어려움 없이 우세한 싸움을 하고 있었겠으나···.
갑자기 엘랑키아의 ‘원래 좌익군’인 중기병 대군이 몰려드는 바람에 애초의 계획은 어그러지고 전황은 엉망으로 흘러 갔겠지.
물론 중앙군과 총참모장 만프레트 역시 ‘무조건 사수’ 명령을 전달하고 그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만은 사실이다.
오히려 중앙군에 배정되어 있던 예비대 병력을 대부분 몰아 주었다.
엘랑키아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중기병 대군 본대를 물고 있는 상황이니 그러는 게 당연했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전황이 총사령부의, 만프레트의 손을 떠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예비대를 갖추지 못한 사령부의 역할은 극도로 제한된다.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특등석에서 전장을 관전하면서, 제발 나는 할 일을 다 했으니 부하들이 이겨주기를 기도하는 수 밖에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 기회를 놓아버린 것일까.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자신은 전장에 대한 통제력을 조금씩 잃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이다.
엘랑키아 기병대의 반대편 투입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있다 치더라도, 전황이 조금씩 진전되면서 명백하게 자신은 ‘몰리고’ 있었다.
적에 비해 우세한 전력.
이는 단순히 열 명과 스무 명이 싸우면 스무 명이 이긴다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아니, 열 명 단위 싸움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이 단계에서는 용맹한 개인이 다섯 명, 열 명의 역할을 커버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백 명, 천 명 단위 싸움에 이르면 완전히 달라진다.
일개 용사가 열 명 스무 명의 역할을 한들, 백 명이 백십 명이 될 뿐이고 천 명이 천십 명이 될 뿐이다.
대신 전술의 개념이 중요해진다.
적의 천 명을 이쪽의 천오백 명이 견제하는 사이, 남은 오백이 배후를 치는 순간 승패가 결정될 테니까.
···그런데 못해도 엘랑키아 군에 비해 1.5배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시작된 이 전선 북부의 결전에서, 그룬발트 군은 그런 우위를 거의 살리지 못했다.
요새화된 마을 때문에.
갑작스럽게 전장의 좌우를 바꾸어 버린 엘랑키아 기병대의 폭주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으로 다수의 그룬발트 군을 막아낸 엘랑키아 잔존병력 때문에.
이유야 잔뜩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렇다.
수적으로 불리했음이 분명한 엘랑키아 군은, 내선의 이점을 이용해 남부 전선에서 지원 병력을 조금씩 보내고 있었다.
이는 펠쿠트 백작의 우익군이 두 차례의 우회 기동 시도에 실패, 더 이상의 진격을 포기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
명백한 자신의 실태였다.
어디서부터 잘못이었을까.
수적 우세를 믿고 특별한 용병술 없이 힘으로 적을 누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준비가 덜 된 대군이 안정적으로 전선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고, 실제로도 공세에 실패했을 뿐, 전선 전체를 유지하는 안정감은 유지되고 있었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측근을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멀리 남부 전선에 파견했기 때문일까.
이 또한 아닐 것이다. 북부 전선에 남긴 전쟁관의 참모들도 충분하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들이다.
엘랑키아 군이 ‘이 정도로 극단적인 기책’을 들고 나올 것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일견 그렇다고 할 수 있으나, 적의 회심의 일격이라고 할 수 있는 기병대의 폭주는 어떻게든 막아냈다.
오히려 엘랑키아 입장에서는 실패한 시도가 되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면···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전쟁관에서 약관의 나이에 정식 참모 면허를 받은 후, 평생 전장에서 살아오며 커리어의 대부분을 승리로 채운’ 자신이.
이처럼 전장의 통제권을 잃어버린 것은 처음이라는 것이다.
아군 병력이 너무 많기 때문일까?
물론 이만한 대군을 통제하는 것이 처음이기는 하다. 하지만 훨씬 복잡다난한 상황에서 전장을 장악한 경험도 여러 차레 있었으니까.
어찌됐든, 사실상 전장을 관전할 뿐인 총사령관인 디오보르크 공작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총참모장으로서 그를 보좌하는 자신의 책임이 크다는 것은 통감하고 있었다.
자존심이 상한다. 승리는 확실하며 언제, 어떤 형태로 그것을 취할지가 문제라 생각하던 프라이드에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지금이라도 다소 변칙적이고 모험적인 전술을 사용해볼까?
전황은 여전히 호각이니, 인위적으로 혼란을 일으키면 보이지 않던 기회가, 방법이 나올 것이다.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애초에 전장에 혼란을 일으킨다는 생각 자체가, 강자가 할 생각 따위가 아니었다.
스스로 불리하다는 것을 알기에, 정석대로 하지 못하고 요행을 바라며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만프레트는 반대였다. 항상 요행을 바라는 절망적인 상대가 일으킨 혼란을 진압하고, 확고한 승리를 지키는 입장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냉정하게 생각하자. 이 전선에서의 불리함은 분명 큰 일이지만, 전쟁 자체를 패배로 몰아갈 만큼의 절대적 불리함은 아니다.
병력을 ‘잠시’ 물리면 여전히 병력 우위는 유지할 수 있다.
적이 신을 냈다고 하더라도 적지 한가운데 포위당한 상황이라는 불리함마저 극복한 것은 아니다.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폴름스의 성벽은 여전히 굳건히 서 있지 않던가 말이다.
만프레트가 결단내려야 할 사항은 정해졌다.
오늘의 ‘다소 불리한’ 전투를 어느 선에서 끝내고 병력을 물릴지.
그리고 스무스하게 ‘오늘’의 전투를 ‘내일’의 전투로 이어 나갈지에 대해서였다.
심지어 아직 디오보르크 공작이 소집한 대군은 폴름스 주변에 집결조차 끝나지 않은 상황이다.
시간이 흐르면 그룬발트 군의 우위는 더욱 커질 것이다. 적진 한 가운데 고립된 엘랑키아 군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물론 빠른 승리를 기대하고 있을 디오보르크 공작은 분노하고 길길이 날뛸지도 모른다.
그러나 승패를 며칠 미룬다고 해서 디오보르크 공작의 정치적인 부담이 감당 못할 정도로 커지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전장에서 많은 수하들을 잃은 중견 귀족 지휘관들 역시 승리를 보여주지 못한 사령부에 분노를 터뜨릴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우위에 있고 승리는 확고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면, 그걸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할까?
이미 입은 손해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끝까지 남아 승자의 대열에 서고자 하겠지.
진부한 표현이지만, 강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자라는 것일까.
과정이야 어떻든, 최종적으로 그룬발트가 승리하고 디오보르크 공작은 엘랑키아 국왕이 직접 이끈 대군을 격파한 승자로서 황제가 되면 될 뿐이다.
오늘의 목표는 결정적인 승리 대신, 안정적인 무승부를 노리도록 하자.
물론 자연스럽게 병력을 물리기 위해서 한 지점 정도는 반격을 성공시켜 적의 기세를 끊을 필요는 있었다.
그러려면 적합한 전장은 어디일까···.
머리속을 정리하고 병력 또한 정리에 나서려던 찰나, 참모의 외침이 들려왔다.
“총참모장! 총참모장 각하! 바, 방금 새로운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소식? 전령이 도착했는가?”
“저, 전령은 아닙니다. 우익군에 참전했던 기사분이 적의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오셨는데··· 적장의 전언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적장의 전언이라니? 대체 누구 말인가?”
“그··· 그게···.”
보고하는 참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만프레트는 조금 짜증이 났다. 당황한 것은 알겠으나, 정확한 보고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또한 전쟁관의 보좌 참모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정식 참모 면허를 받는 건 한참 후의 일이 될 것 같았다.
“엘랑키아의 국왕, 다고베르 2세의 전언이라고 합니다.”
“국왕? 그게 무슨··· 그럴 리가 없다!”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엘랑키아 국왕이 적국인 그룬발트의 기사에게 전언을 맡겨 보낸다는 것도 비상식적인 일이다.
그런데 애초에 국왕이 왜 전장의 우측, 적 좌익군에 있다는 것인가!
펠쿠트 백작이 죽을 고생을 하며 결국 진격을 포기한 우측 전장은 오늘 가장 혼란스럽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거기 국왕이 있었다고? 정말 위험에서 희열을 느낀다는 미치광이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보다, 그 전언을 가지고 왔다는 기사는 어디 있나? 무슨 사정인지 직접 전언을 들어 보고 싶군.”
“저, 저에게 용건을 말한 직후 디오보르크 공작님을 뵈러 직접 가셨습니다!”
“뭐?”
“막무가내라 막을 수가 없어서··· 바로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간신히 참아낸다.
빌어먹을, 참모로서 본업에 바빠 전쟁관의 교관 업무에서 손을 놓은지 한참 되긴 했지만, 이런 덜 떨어진 인간이 보좌 참모로 있었다니.
이런 것 또한 예상하지 못한 변수라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성질을 부려봤자 의미는 없다.
물론 디오보르크 공작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용주나 주군을 속이고 알음알음 행동하며, 주군의 이득보다 자신의 이득을 우선시하는 이는 봉신이든 용병이든 극도로 혐오하는 성격이었다.
때문에 만프레트는 언제나 고용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으며, 자신만 알 수 있는 정보를 제한해 고용주의 이익을 해치는 일도 절대 없었다고 자부한다.
문제는 자신은 그 전언을 모른 상태라는 것과···.
그게 지금 한참 초조한 상태일 디오보르크 공작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게 만약, 도발이라면···.
“만프레트 경! 만프레트 경! 어디 계시오!”
아니나 다를까 총사령부의 후방, 공작의 개인 천막이 있는 방향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전언의 내용은 주군에게 직접 듣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