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15화 (482/556)

47-50. 폴름스 전투, 셋째 날

“네에··· 폐하께서 어떻게 여기에···.”

“으음? 그대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던 것인가. 그대의 상관, 트랑카벨의 에트 경이 보낸 작전안에 동의했기에 서둘러 달려온 것인대.”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가 특유의 다소 짓궂지만 사람 좋은 표정으로 말하자 첼레스티나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가 아는 콘도티에레는 작전을 세울 때 안정감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

‘전쟁이란 것 자체가 불확정의 연속이고, 도박의 연속이잖아. 내가 확실히 통제할 수 있는 부분조차 포기하고 무얼 얻을 수 있겠어’

물론 첼레스티나 역시 절대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콘도티에레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니까.

그런 사람이 이 전투의 총사령관이자, 국가의 최고 권력자이자, 모든 기사들이 흠모하는 상징까지도 지닌 다고베르 2세가 전방에 나서는 작전안을 세웠다니··· 말도 안된다.

아무리 호위들이 공들여 대신 방패가 될 각오로 호위한다고 해도, 장거리에서 날아온 눈 먼 총탄에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건 결코 콘도티에레가 원치 않았을 상황이라 생각하니,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첼레스티나였다.

“혹시··· 콘도티에레가 폐하께 올린 작전안이 무엇인지 저도 들을 수 있을까요오?”

“물론이지. 에트 경은 측익에서 고전중인 병력을 지원해 위기에서 구하고, 곧바로 그 구해낸 병력과 연합하여 전력을 상승시켜 또 다시 고전중인 병력을 지원하는 것이었네. 이를 반복해 조금씩 측익에서부터 우위를 점하게 된다는 것이지.”

“네에, 폐하.”

“그대가 들은 작전 지시와는 다른 것인가?”

“앗, 아뇨, 폐하. 저도 비슷한 지시를 들었고 수행 중입니다.”

“그거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군. 하하하핫!”

국왕이 시원스럽게 웃자 주변에 긴장하고 있었던 근위기사나 다른 측근들 역시 얼굴이 펴지며 분위기가 좋아진다.

확실히 국왕 특유의 감화력이라 해야할지, 모두가 그를 좋아하고 그를 위해 능력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첼레스티나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큰 전력이라 한들, 국왕을 선두에 세워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것은 콘도티에레가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심지어 적국에 원정온 상황인 만큼, 정신적 지주인 국왕이 부상이라도 당했다가는···.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왔으니.”

마치 첼레스티나의 마음 속을 읽기라도 한듯, 다고베르 2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라고 무모하게 앞장서서 위험한 다리를 건너고 싶었겠나. 안전하게 이길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네.”

“하오나 폐하···.”

“에트 경의 작전은 충분히 합리적이라 생각했고, 중앙군에서는 지원해줄 수 있는 예비 병력이 근위기사대 밖에는 없었다··· 일 뿐일세.”

“네에··· 알겠습니다아···.”

전장 한가운데에서도 가능한 유쾌해 보이고자 노력하는 다고베르 2세에게서는 깊은 고뇌 또한 느껴진다.

첼레스티나도 그걸 차마 모른척 하지는 못했다.

이제 엘랑키아 군은 예비대가 고갈되었다.

어딘가에 병력을 투입하려면, 어딘가에서 그 만큼의 병력을 뺄 수 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이 이르렀다.

사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다른 전선에서 짜내듯 해서 간신히 긁어 모은 병력들이다.

티테니아와 첼레스티나가 이끄는 남부 전선에서 온 파견대.

슈뵈켄 방어 진지에서 온 벼락치기 야전 포병대와 베테랑 총병들.

주력 중기병 대군이 빠진 자리를 억지로 지탱하다 궤멸 직전까지 몰렸던 디타레 드 카울의 경기병대.

국왕 폐하가 직접 이끄는, 중앙군 최후의 예비 전력인 근위기사대까지.

평범하게 예비대로 준비하다가 본래 목적대로 사용된 병력은 아마도 지빌링엔 반연대가 전부인 모양이다.

병력 규모나 병종으로만 보면 그럭저럭 구색은 갖췄다고 하겠으나, 옷으로 따지면 누덕누덕 기운 것이나 다름 없었다.

지금까지 용케도 큰 위기를 피하며 잘 싸워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폐하. 지난 전투의 피해가 적지 않아서, 저희는 재편성에 시간이 필요해요. 휴식이 필요한 장병들도 있고요.”

“물론, 그건 그대의 판단을 따르겠네. 다만 서둘러주게. 우리 엘랑키아의 소중한 주력부대가 언제까지 버텨줄 수 있을지 모르니 말이야.”

“네에, 당연히 서두를 거예요!”

다고베르 2세는 사뭇 진중한 척 말했지만, 실제 말투는 오히려 익살스러운 농담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위험을 앞둔 상황에서 군인들이 흔히 보이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기에 부릴 수 있는 허세일 것이라 생각했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기병의 숫자는 제법 구색을 갖췄지만 그 중 충분한 충격력을 발휘할 수 있는 중기병의 숫자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런 첼레스티나의 혼성 부대에게 근위기사대 전력은 엄청난 응원군임은 분명했다.

난데없이 나타난 다고베르 2세를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하는 한도 내에서, 어떻게든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우선 주변 상황을 살핀다.

그녀의 혼성 부대의 분전과, 근위기사대의 지원을 통해서 북부 전선 좌측의 주도권은 확보한 상황이다.

물론 여전히 적의 병력은 한참 많았지만, 지금 당장은 공격해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군 부대도 많이 지쳐있었지만, 적은 훨씬 더 지친 것 같았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말이다.

‘이번만 버텨내면 이긴다’ 라는 생각을 했는데 새로운 적이 나타났을 때, 심지어 그게 반복되었을 때의 극심한 피로감에 대해서는 첼레스티나 또한 잘 안다.

심지어 전방의 그룬발트 군은, 거기에 더해 격전 끝에 판정패까지 당한 격이니 그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허나 이는 잠시 몸을 추스르는 다친 곰을 다루듯 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다소 부상을 입었다고는 쳐도, 체력과 전의가 회복되면 다시 위협을 해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도 함부로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른다.

잠시 고민하던 첼레스티나는 머리속으로 데리고 갈 병력과 슈뵈켄으로 돌려 보낼 병력을 추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단순 전투력도 중요하지만, 기동력이 더 중요했다. 그러니 공성포 따위를 끌고 다닐 수는 없었다.

탈진하거나 부상한 병력들도 어디까지 따라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고 말이다.

최후의 결전 부대는 말 그대로 결전에 걸맞는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아마도 이 선택이··· 길고 길었던 오늘 전투에서 마지막 군사 행동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승리하든 패배하든, 다음 선택지는 없을 것이다.

고를 기회가 없거나, 고를 필요가 없거나 둘 중 하나이겠지만.

“아!”

그러고보니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

“현 상황에 대해 콘도티에레··· 에트 경에게 보고하도록 할게요.”

“물론 에트 경도 알아야겠지. 이 판을 계획한 인물이 아니던가.”

“네에···.”

다행히 부분적으로나마 승전보를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 어정쩡한 상황, 심지어 국왕 폐하를 진중에 모시게 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첼레스티나는 처음으로 콘도티에레가 살짝, 아주 아주 살짝이지만 원망스럽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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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첼레스티나가 보낸 보고를 받아 든 것은 아룬하비크와 브레세른을 연결하는 도로를 지키는 아군 진지에서였다.

내가 원래 위치에서 떠나는 바람에, 전령이 아룬하비크를 찍고 오느라 다소 시간차가 있었다.

오늘 아침부터 종일 공격당했던 방어 진지는 내가 보낸 지원군이 도착하자 일시적으로 적이 후퇴해 소강상태가 되었다.

진지를 지키던 아군 용병 연대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으며, 여전히 충분한 전력을 보유한 상황이라 듬직했다.

하지만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적은 딱 불편할 정도로 위협적인 거리에 상당히 공격적인 진을 치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싸우고 적 지원군이 도착했으면 포기하고 브레세른으로 돌아갈 법도 한데 말이다.

적장은 상당히 끈질긴 인물이었고, 전술적인 감각도 있는 사람이었다.

굳이 직접적으로 싸우지 않으면서도 이쪽을 괴롭히며 자신이 가진 병력의 역할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문득, 아룬하비크 남쪽의 숲에서 무모한 공격으로 병력을 사지로 몰아 넣고 자기 자신마저 포로로 잡힌, 그룬발트 군의 엘프 장군 세두시온이 생각났다.

다른 나라도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겠지만, 더 큰 권한과 병력을 가진 인물이 반드시 더 뛰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 엘랑키아에게는 정말 다행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몸도 마음도 불편한 상황에서 받은 보고는 나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적을 격퇴하고··· 오히려 반격에 나서려고 해? 국왕··· 아니 폐하께서 여긴 왜···.”

생각도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내가 잠시 아룬하비크의 사령부를 비운 사이, 생각보다 잘 싸운 첼레스티나는 기대했던 것 이상의 역할을 해 주었다.

한편, 조금이라도 예비대 지원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싶어 중앙군에 보냈던 연락은 국왕의 근위대 동반 직접 출격이라는 깜짝 놀랄 상황을 만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이제와서 국왕에게 총사령부로 돌아가라고 한들 씨알도 먹히지 않겠지.

그럼 무의미한 고민은 하지 말고, 이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도록 하자.

나는 멀리 남부 전선을 맡고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총사령부의 국왕 폐하는 주기적으로 전령을 보내 주었기에 정보는 부족하지 않았다.

계획대로 잘 된 점도 있었고, 잘 되지 않은 점도 있었다. 그래도 우리가 밤 늦게까지 머리를 맞대고 세웠던 큰 그림은 그럭저럭 그려지고 있었다.

전황을 난전으로 유도한다. 그리고 적의 예비대를 고갈시킨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아군 예비대 역시 고갈될 가능성이 높다. 아니 확실히 그렇게 될 것이다.

애초부터 병력이 이쪽이 부족한데, 대등하게 싸우는 것만도 다행이지.

일단 서로 빠듯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이쪽은 내선의 이점을 살려 ‘어떻게든 상황을 극복한다’는 것이 작전의 요체였다.

용두사미가 된 것 같았지만, 적은 병력으로 대군을 이기려면 일단 상대의 예측대로 전황이 굴러가게 해서는 아예 승산도 없는 법이니까.

지금 내가 첼레스티나를 도우러 가지 않고 굳이 남쪽을 돌고 있었던 이유도 그러한 변수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미 병력은 첼레스티나에게 딸려 최대한 보낸 상황에서, 겨우 한 두개 중대 정도 추가된다고 결정적인 변수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남부 전선을 안정시키고, 병력을 최대한 확보해서 북부 전선을 도우려 했던 것인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한 것이다.

첼레스티나가 분전해서 지연시키는 게 고작이라 생각했던 적의 측위군을 물러서게 만들었다.

막강한 국왕 폐하의 근위기병군이 거기 합류해 버렸다.

이 정도라면··· 전황에 충분히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폭탄 병력’이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이미 심대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호위대에게 명령을 전해주게. 우리는 북부 전선으로 간다.”

“옛, 콘도티에레! 여기 주둔군도 차출해서 함께 갑니까?”

“아니, 아직 이 방어 진지를 잃을 수는 없으니까. 무엇보다 기병만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게 중요한 상황이야.”

“옛,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진지 후방으로 이동하며, 한가지를 잊었음을 깨달았다.

“전령! 전령을 불러주게.”

“옛, 콘도티에레. 어디로 향하는 전령입니까?”

“브레세른. 루제 드 제브레도뉴 공작께 급히 보낼 전령이 있네.”

불을 지르려면, 한 군데만 질러서는 부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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