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14화 (481/556)

47-49.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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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전은 원래 대체로 그렇듯, 양측이 결심한 순간 순식간에 시작되었다.

그룬발트 기사들의 일부가, 프리스마라 경기병대를 선두로 한 티테니아 부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준비를 하기는 했다.

하지만 기세와 포지션이라는 기병전의 중요한 두가지를 모두 잃어버린 어정쩡한 상황이다.

그 이유아 물론··· 새롭게 등장한 엘랑키아 기사들에게 본대가 마구 썰리고 있는 상황에서 정신이 전장 반대편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겠지.

“아라라랏!”

빠각!

“끄어억!”

상대보다 훨씬 크기가 작은 말에, 갑옷도 변변치 않은 프리스마라 기병이 창을 내질렀고 그게 그룬발트 기사의 흉갑에 명중했다.

원래 그다지 견고하지 않은 낭창낭창한 재질의 ‘투창으로 쓸 수도 있는’ 단창은 흉갑을 완전히 뚫는 데 실패했고 산산히 조각났다.

하지만 말과 기수가 돌진해온 충격력은 고스란히 흉갑에 전달되었으며 뒤로 크게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는 중장갑을 갖춘 기사를 낙마시키기에는 부족했다. 잠시 중심을 잃었던 그룬발트 기사는 몸을 원래대로 되돌리는데 성공했다.

아니 거의 성공했을 때···.

반대편에서 뒤이어 오던 프리스마라 기병이 중심 잡느라 정신 없던 기사의 얼굴을 때렸다.

하필 그가 들고 있었던 것은 육각형으로 예리하게 각이 진 철퇴였다.

그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소리는 선두에서 용맹하게 돌격해온 그룬발트 기사를 영원히 침묵시켰다.

“죽여! 죽여버려!”

“으아아아아!”

“멈추지 마라! 그룬발트에 영광을!”

“아라라라라라라라!”

양측이 마구 뒤섞이며 백병전이 벌어진다.

전체적으로 잘 무장되고 시점이 높은 그룬발트 기사들이 유리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프리스마라 기병들도 결코 밀리지 않는다.

두서넛이 짝을 지어 앞뒤에서 공격하는가 하면, 아얘 안장 위에 올라서서는 뛰어들어 목을 감싸 낙마시키기도 했다.

단순히 복장이 가볍다는 것을 떠나 ‘말을 탄다’ 라는 개념부터가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호기롭게 돌격해온 프리스마라 기병들이 기세를 서서히 잃고, 무장과 체격 차이로 막 밀리려하는 상황에 후속해온 드 몽파르지에와 드 레뮤즈 기병대가 약점을 보완하듯 달라 붙는다.

이번에는 티테니아는 선봉에 서지는 않았기에, 후열에서 그 장면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호위들이 걱정하다 숨 넘어갈 것 같았다는 점도 있지만,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든 적 반대편으로 돌파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작고 혼란스럽지만, 강한 혼성 부대의 지휘관이다.

물론 난데없이 불려가서 뒤집어 쓴 감투였지만, 임무를 준 콘도티에레를, 그리고 항상 믿어준 오라버니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때문에 전장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서 전황을 살피며 전진과 후퇴를 결정해야만 했다.

다소 건방진 생각일 수도 있겠으나, 이번 기병전의 승리는 분명해 보였다.

그룬발트 기병대는 잘 무장된 훌륭한 기사들로, 다소 불리한 초전, 양방향에서 공격당한다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대열을 갖추어 잘 싸우고는 있었다.

하지만 더 강한 전력의 적을 상대한다는 ‘압박감’이 티테니아에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적을 쓰러뜨리고, 대열을 붕괴시켜 돌파한다··· 라는 생각보다는···.

당장은 지지 않기 위한 정도의 힘만 써서 싸우고, 상황이 나빠지면 언제라도 물러설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것으로만 보였다.

이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더 과감한 전술을 노려보자.

“우리 드 몽파르지에 기병대는 이대로 적의 측방을 공격한다!”

“알겠습니다!”

지금은 종심을 단단히 굳히기보다, 횡으로 길게 전개해 적을 포위할 듯 위협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판단한 티테니아는 한창 벌어지고 있는 기병전을 우회해 작지만 강한 기병대를 이끌고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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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승리했다.

결국에는 살아남았다.

“하아아아··· 살았네요오···.”

“그, 그렇습니다!”

첼레스티나가 길게 한숨을 내쉬자,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전령이 화들짝 놀라 대꾸한다.

아직 소년으로 보이는 어린 전령이 안절부절 못하자 첼레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어찌됐든 그녀는 이 잡탕 부대를 지휘하며 여기까지 이끌어 온 장본인이었다. 주장 티테니아 역시 작전 지휘를 그녀에게 맡기고 있었고 말이다.

따라서 전투의 중심이었던 그녀 곁에 어린 전령 한 명만 남아있다는 것은 그만큼 쉴 틈 없이 전령들이 오갔다는 것이다.

참 열심히도 싸웠구나··· 하는 생각에 묘한 자부심과 함께 안도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이제 적은 물러섰다. 적 우익군 자체가 물러난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전투나 진격을 포기하고 병력을 완전히 후방으로 물렸다.

다시 전열을 재정비해 공격해올 수도 있으니 무작정 마음을 놓을 수야 없겠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삼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적병이 안 보이는 것만 해도 속이 다 트이는 것 같았다.

위기가 몇 번이나 있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기병대를 출격시켰을 때는, 남은 보병들은 이대로 끝장 날수도 있겠다는 각오조차 했었다.

총병들과 지빌링엔 반연대도 공격에 가담시키고, 마지막으로 체력을 회복한 디타레 드 카울 경의 왕실군 경기병들을 충격 병력으로 돌격시킨 다음에는···.

소수의 용기병과 포병들과 함께 본진을 지켰다.

포수들은 마지막 남은 화약을 공들여 다지면서도, 최악의 경우 점화구에 박을 말뚝을 하나씩 휴대하고 있었다.

화포를 포기하더라도 적의 손에 넘어가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다행히도 그런 상황은 오지 않았다.

적장은 아직 여유가 있을 때 병력을 후퇴시키는 것을 선택했다. 공멸을 각오하고 있던 첼레스티나 입장에서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첼레스티나 경! 첼레스티나 경! 전령입니다!”

“전령이요오? 무슨 내용이죠?”

“티테니아 대장께서 가능한 빨리 와 달라고 하십니다.”

“네에, 지금 갈게요!”

첼레스티나는 본진에 남아있던 짐말 하나를 잡아탄다. ‘가능한 빨리’ 라는 단서가 붙은 것을 보면, 첼레스티나와 협의해서 결정해야 할 상황이 있는 모양이지.

오늘 대포와 각종 물자를 옮기며 중노동에 시달린 짐말은 한쪽 다리를 약간 절고 있었지만 첼레스티나의 체중 정도는 문제없이 버텨 주어서 다행이었다.

짐말 중에서도 쓸만한 것들은 죄다 기병대에 배정되었기 때문에, 남은 말 중에 상태가 그나마 괜찮은 게 이 정도였다.

말 못하는 짐승들이 사람 만큼이나 고생한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빠른 속도로 전장을 가로지르는 첼레스티나는 지금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전투의 흔적을 바라본다.

아군도 적군도, 마구 뒤섞여 흙바닥에 죽어 있었다. 부상을 입은 건지, 탈진을 한 건지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병사들도 있었다.

“첼레스티나 경!”

“참모님!”

“첼레스티나 경.”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장병들이 황급히 길을 비키며 인사한다.

분명하게도 그녀는 승장이었고, 그것도 언제 패배하고 몰살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한 전투를 이끌어 낸 승장이었다.

용감히 싸우기는 했으나 승리의 확신까진 가지지 못했던 이들이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마도 자신이 콘도티에레를 볼 때마다 생각하는 마음과 비슷할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갑자기 가슴에 사무치도록 콘도티에레가 보고 싶었다.

평소처럼 ‘콘도티에레!’ 하고 부르며 달려가서는, 자신이 ‘이렇게나 명령을 잘 수행했다’고 자세하게 보고하며 칭찬을 듣고 싶었다.

아마 이런 날이라면, 옆에 서서 소매를 잡더라도 용서해주시지 않으려나.

“콘도티에레···.”

차마 크게 부를 수는 없으니, 혼자말 하듯 작게 불러본다. 지금쯤은 전장 반대편에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으시겠지···.

“첼레스티나 경, 오셨군요!”

잠시 망상을 하며, 볼품없는 짐말을 타고 달려오는 그녀를 본 티테니아가 반가운 목소리로 부른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여러분. 덕분에 살았네요오.”

“저희는 그저 계획대로 했을 뿐이에요. 첼레스티나 경의 지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모두 위험했을 거예요.”

“저도 뭐··· 다 콘도티에레가 시키신 일만 열심히 했을 뿐이죠.”

그건 진실이었다. 명령의 공백 부분은, 철저하게 ‘콘도티에레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시행하는데 집착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 결과가 잘 나와서, 병력을 잃지 않고 콘도티에레를 실망시키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 않아서 다행이고.

“그런데··· 중앙군 쪽에서 도와주러 오셨던 분들은 누구신가요? 감사 인사를 해야하지 않을까요?”

“아··· 그것 때문에 급히 첼레스티나 경을 부르게 되었어요.”

“네에, 그래서 서둘러 았어요.”

아마도 단순히 감사 인사를 시키기 위해서는 아닐 테고··· 나름 적진 한 가운데에서 잘 싸운 부대에게 다음 임무를 주려고 지휘관을 찾은 것이겠지.

저쪽을 보니, 호위기사들 뒤편에서 디타레 경이 중앙군에서 새로 온 기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랜 전투로 더럽혀진 이쪽의 다른 기병들과 다르게, 새로 지원 온 기사들은 여전히 번쩍번쩍한 갑주를 입은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은빛 갑주에 점점이 튄 핏자국을 보면, 이들 또한 이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몇 번이나 사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귀경께서 지휘관이십니까?”

“맞아요오.”

그녀를 맞으러 온 건장한 기사는, 방금 전투의 지휘관이 호리호리한 체구의 여성 용병이라는 사실을 알고 조금 놀란 모양이다.

하지만 곧 그녀를 이끌고, 유난히 기강이 잡혀있는 기사들을 지나 중앙으로 이동한다.

지나가면서 흘긋 보니, 하나같이 덩치가 좋고 얼굴도 잘 생긴 것 같았다. 이런 부대가 아직도 전투에 나서지 않고 후방에 머물고 있었다니··· 왕실군에 이런 여유가 있었나 싶었다.

어쨌거나, 그들이 처음으로 활약한 전장이 첼레스티나의 혼성 부대를 돕기 위함이었다는 점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고.

멀리서나마 이 기사단이 활약하던 장면을 복기해본다.

제법 오랫동안 용병으로 전장을 떠돌면서 꽤 많은 지역의 다양한 기사단을 본 경험이 있는 그녀였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이 정도로 멋지게 활약하는 기사들은 아군으로도 적군으로도 거의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행군 중에 거의 속도도 줄이지 않고 신속하게 대열을 바꾼 것, 그리고 거의 대열의 흐트러짐 없이 이어서 돌격한 것은 깜짝 놀랄 정도였다고나 할까.

아마도 부대 단위로 보면, 그녀가 지금까지 전장에서 보았던 기병대 중에 최고의 기량을 가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으음··· 만약에 슈토르히와 싸운다고 한다면···.

충분히 거리를 두고, 일제사격으로 화력을 뿜어낼 기회가 있다면야 당연히 슈토르히의 낙승이겠지.

하지만··· 그렇지 못하게 교묘한 각도로 접근해 온다면··· 으음, 어떻게 될까.

비슷한 일이 실제로 과거에 있었다.

바로 블랑독에서 종교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샹다메리 전투에서 엘랑키아 국왕군과 싸웠던 때의 일이다.

엘랑키아 전열을 돌파해 후방에 자리잡은 슈토르히는, 전투 마지막 단계에서 엘랑키아 기사들의 공격에 애를 먹었었다.

물론 약점을 드러내는 척, 초조해 하는 엘랑키아 기사들을 유인해 마지막 승리를 거머 쥐기는 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마도, 지금 이 기사들의 기량은 당시의 엘랑키아 기사들보다도 더 뛰어날 것으로 보인다.

음음··· 역시 매우 어려운 싸움이 되겠지. 이 정도 되는 부대가 바보같이 사격에 스스로를 노출시키지는 않을 테니까.

“아아, 첼레스티나 경. 자네였나, 방금의 혼성군을 지휘했던 것은.”

디타레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남자가 첼레스티나가 다가오자, 몸을 돌리며 말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설마 에트 경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온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다네.”

“네에, 저도 콘도티에레께서 직접 오셨으면 좋았겠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오···.”

“하하핫, 그래, 그거 아쉽겠군.”

첼레스티나는 투구 아래로 딱 듣기 좋게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익숙한데 대체 누군가··· 라는 생각을 했다.

콘도티에레를 보좌하며 엘랑키아의 높으신 장군님들을 여럿 만났지만, 사실 누가 누군지 익혀두려고 노력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명령을 받았다면 곧바로 기억했겠지만··· 시키지 않은 일에는 약한 여자였다.

“체, 첼레스티나 경···.”

“네에?”

이제 보니, 디타레의 얼굴이 이상하게 창백하다. 무언가 전하고 싶은 것 같기는 한데···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콘도티에레가 작전을 전한 상대는 우리 뿐은 아니었다는 것이겠지.”

“어··· 아? 앗!”

기사가 투구를 벗으며, 면갑으로 깊게 그림자 졌던 얼굴이 드러난다.

“다고베르 폐··· 하?”

“그래, 지금은 그냥 기병대장이지만 말일세. 급하니 용건만 말하겠네. 근위대와 협력해서 중앙군을 구하도록 하지.”

엘랑키아의 국왕, 다고베르 2세는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놀라서 반쯤 정신이 나간 첼레스티나가 대답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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