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13화 (480/556)

47-48.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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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끝없이 몰려드는구나! 전장 밖에는 이제 적 밖에 남지 않은 건가?”

그룬발트 군 우익 지휘관,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의 허탈한 중얼거림은 차라리 비명에 가까웠다.

마지막 안간힘을 내고 있는 젊은 우익군 지휘관의 표정은 일그러졌으며,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가 애지중지하던 병력이 눈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으며, 손을 쓰면 쓸 수록,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상황이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전에 협의된 작전을 충실하게 따른다’

펠쿠트 백작은 적어도 오늘은 철저하게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작전대로 돌아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생각했던 ‘오늘’은 ‘재수없게’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엘랑키아 중기병의 대군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엘랑키아 기사들은 전장 반대편으로 단체로 이동해 버렸다.

안심했느냐··· 라고 하면 마음이 편해졌던 것은 사실이다.

엘랑키아 기사에 대한 공포증이 병사들 사이에서 도는 미신이라 하기에는, 이번 전투에서도 너무 많은 일들을 해버린 존재들이었으니까.

어쨌거나 그게 행운인지 불행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그에게 내려진 명령은 빠르게 전진하여 엘랑키아 중앙군의 측후방을 타격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분명, 그가 상대해야 할 엘랑키아 측방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슈뵈켄 마을에 얼마 안되는 잔존 병력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뚫고 지나가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펠쿠트 백작의 병력은팔팔한 2만의 대군, 얼마든지 어설픈 저항을 돌파하고 중앙군의 측방을 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라고 생각하였으나.

슈뵈켄 마을의 얼마 안되는 수비군은 생각보다 완강하였으며, 수백 명 단위의 중대급 병력으로 흩어져 지연전을 벌이는 엘랑키아 기병은 노련했다.

왜 ‘엘랑키아 기병’이 공포의 대명사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급히 행군하느라 흐트러져 있었던 대열의 약점을 미리 알고 오기라도 한듯, 적 기병들은 사방팔방을 쑤시고 다녔다.

큰 피해가 난 것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시간이 낭비되고 있었다.

펠쿠트 백작은 당황했고···.

결국 지휘권을 총참모장인 만프레트에게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이게 무례한 일이라는 것도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했다.

만프레트의 대책은 다소 거칠었지만, 빠르게 적 기병의 수를 줄이고 아군은 질서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문제가 해결되었나 싶더니··· 도 외부에서 적군이 추가로 투입되었다.

아마도 원래 이 전선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폴름스 포위망이나 멀리 남부 전선에서 도착한 병력으로 생각되었다.

병력은 얼마일까, 2천? 3천? 어쨌든 얼마 안되던 병력은 갑자기 전장에 개입하더니, 붕괴 직전이었던 엘랑키아 기병과 슈뵈켄의 잔당을 규합해 새로운 야전군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그들은 다시 한 번 펠쿠트의 앞길을 막아섰다.

결국 행군을 포기하고 다시 한 번 이들을 섬멸하기 위해 거의 전 병력을 투입해야 했다.

계속되는 행군과 전투 대형 전환.

객관적으로 약하지만 만만치 않은 적의 지루한 지연전.

승리라면 승리지만, 개운하지 않은 결말.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병사들이 지쳐가고 있었다.

병사들이 발걸음이 무겁고 명령도 빠릿하게 전달되지 못한다.

이런 전투는, 이런 전장은 생전 처음이었다. 나이에 비해 전장 경험이 적은 편은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런 전장은 너무도 낯설었다.

적어도 그가 지금까지 경험한 전장은, ‘이렇게 하면 이길 수 있다’ 라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허나 지금은 미친 듯이 공격해오는 적을 계속해서 뿌리치기만 할 뿐··· 어떻게 하면 상황이 더 나아지고 어떻게 하면 우위에 설 수 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머리가 복잡해 터져버릴 것 같은 상황에서, 엘랑키아 군의 마지막 부대를 세 방향에서 포위 공격해서 간신히 무너뜨렸다.

하지만 마차로 둘러친 방어선을 간신히 돌파했나 싶었더니, 적은 후퇴하는 대신 오히려 반격을 가해왔다.

전장을 뒤집어 놓는 굉음과 함께, 포격인지 자폭인지도 확실치 않은 화염이 치솟은 뒤 엘랑키아 기병들이 뛰쳐나왔다.

그 놈의 엘랑키아 기병! 죽일 만큼 죽이고 약화시킬 만큼 약화시켰다 생각했는데, 마치 머리와 다리가 잘려도 꿈틀거리는 곤충처럼 끈질겼다.

아니··· 어쩌면 모두 자신의 착각일 뿐 머리도 다리도 잘라내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지.

깊은 절망과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펠쿠트 백작은 무너지는 아군을 지켜만 보고 있는 무책임한 인간은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일은 한다.

한때 무너졌던 휘하 기병대를 수습해 재편성하고 있던 기병 예비대를 투입하고, 2개 보병 연대를 추가로 투입해 포위망을 단단하게 했다.

이번에야 말로, 적의 마지막 발악을 제압하고 더 이상의 활약을 막는다.

전장의 주도권을 되찾아오지 않으면 안된다. 다 합쳐봐야 수적으로 절반도 되지 않는 적에게 종일 휘둘린 머저리로 전장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가진 마지막 수단을 써버렸지만 문제를 해결했다 생각한 순간···.

이번에는 놀랍게도 정 반대 방향에서, 또 한 무리의 엘랑키아 기병이 나타나고 말았다.

그건 분명 적의 중앙군 방향에서 오고 있었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자신이적의 기책에 놀아나고 있을 뿐, 전장 전체적으로는 압도적인 수적 우세인 상황이 아니었나?

중앙군 사이의 전황은 호각이라 해도 근소한 아군의 우위, 자신이 측방 공격만 성공하면 반드시 승리하는 상황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째서, 아군이 아니라 적군의 지원이 중앙군 방향에서 도착하느냐는 말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햇빛에 갑주를 반짝반짝 빛내는 엘랑키아 기사들이었다.

엘랑키아 기사! 듣기만 해도 놀랄 정도로 저주받을 이름이었다. 빌어먹을, 수백 명만 뭉쳐도 1개 연대급 이상의 시너지를 내는 정신나간 인간 백정들!

그룬발트 기사는 결코 약하지 않다! 그런데 왜 엘랑키아 기사들 앞에만 서면 이리도 맥을 못 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발 이번만은··· 이라고 생각은 해 보지만··· 새로 등장한 적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대열을 짜는 그룬발트 기사들의 뒷모습이 위태로워 보인다.

“타를라··· 타를라 참모를 불러오게!”

“지금 바로 말씀이십니까? 지금은 슈뵈켄 공격 부대를 이끌고 계심이···.”

“알고 있네. 이제와서 슈뵈켄을 빼앗아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옛, 알겠습니다!”

그제서야 펠쿠트 백작은 깨달았다. 어느새 자신은 폰 자이트리츠 참모들의 조언에 상당히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적어도 그들의 말을 따르면 전황이 조금은 나아진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된 결과로 학습하고야 말았다. 그만큼 불리한 상황이 거듭되었다는 것이고.

이제 더 이상 적을 물리치고 중앙군의 측방을 위협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병사들은 지쳤고, 지휘관은 펠쿠트 백작은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저 간절히, 남은 병력을 무사히 수습해 전장에서 빠져 나가는 것을 원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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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룬발트 군 보병 포위망을 측면을 위협해 쫓아버린 직후, 새로 나타난 아군 기병과 협공하여 적 기병을 상대하려던 참이었다.

티테니아 드 몽파르지에는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오감을 집중해 전장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불과 휘하 기병들이 재집결하는 몇 초 동안의 시간이었지만, 평생 몇 번이나 볼 수 있을지 모를 장엄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엘랑키아!”

“엘랑키아를 위하여! 돌겨억!”

“왕국에 영광있으라아아아!”

새롭게 나타난 기병대는 결단코 엘랑키아의 기사들이었다.

티테니아의 경험 많은 측근들은 그 기병대가 나타난 방향으로 보았을 때, 혹시라도 아군이 아닐 가능성을 감안해 긴장했던 것 같지만, 그녀는 조금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저 찬란한 광채에 휩싸인, 마치 방금이라도 주께서 보내 그 적을 치라 명령한 것 같은 아름다운 기사단이 적군일리가 없다 믿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잘 닦인 갑주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은빛의 기사대는 지금까지 전장에 발도 들여놓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멀리서 전장을 확인했는지, 빠르게 공격 대형을 갖춘다.

선봉 중앙 후위, 크게 3개의 대열로 나뉘어진 정석적 돌파 대형을 갖춘 그들은 속도도 거의 늦추지 않고 그대로 허둥대는 그룬발트 기병대로 돌진했다.

그리고···.

쾅! 콰드득!

타탕! 탕! 퍼억!

“하아아!”

“우와아아아아!”

“돌격하라!”

말 그대로 적을 압도했다.

상대가 급히 방향을 전환하며 겨우 싸울 준비를 갖춘 그룬발트 기사라 감안하더라도 이는 놀라운 일이었다.

만약 티테니아의 기병대가 자력으로 상대했다면, 지지는 않겠지만 저렇게 일방적으로 이기지는 못했으리라.

짧은 총격전 직후에 빠르게 거리를 좁혀온 새로 나타난 기사단은 마치 은빛 창처럼 순식간에 그룬발트 기사들을 둘로 나누어 버렸다.

당연하지만 그룬발트 기사들도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비록 전투 과정에서 무기를 소모하고 지치고 사기가 떨어져 있다고는 해도 그들 또한 그룬발트 귀족 기사의 정예들이니 당연하다!

그럼에도 좀처럼 막을 수 없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라고 해야 할까?

“하아앗!”

“크억!”

“윽!”

양 측면에서 포위하듯 달라붙는 그룬발트 기사들 사이를 스치듯 빠져나가며, 상대 둘을 동시에 낙마시키는 장면을 보았을 때는 말 그대로 숨쉬는 것을 잊은 느낌이었다.

‘네가 놀이로서 기사의 흉내를 원한다면 그래도 좋다. 허나 진정 드 몽파르지에의 전열에 서고 싶은 것이라면, 아버님께서 남기신 최고의 기사들을 교관으로 소개 해 주마. 무엇이든 네가 바라는 것을 하거라. 이 몸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니.’

여기사가 되고 싶다 했을 때, 가문의 당주이자 배다른 오빠인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는 웃지도 않고 그렇게 대답했었다.

문자 그대로 드 몽파르지에 최고 기사들에게 훈육을 받았던 그녀는 고마운 스승님들의 기량과 움직임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데 저기 보이는 기병대는 마치 한 명 한 명이 그 수준의 기사로 보인다.

평범한 기사 따위는 다소 숫자가 많다 해도 결코 그 앞을 가로 막을 수 없었다.

그래 보아야 ‘저렇게 될 테니까.

“기사대장, 이대로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티테니아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보니, 거기에는 프리스마라 기병대의 장교가 있었다.

비록 작은 말에 가벼운 무장을 하고 비스듬하게 안장에 걸터앉은 모습에서 기사와 같은 위엄이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그만큼 능수능란해 보인다.

그 주변에는 함께 집결해온 드 레뮤즈 가문 출신의 기사들도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모두가 새로 나타난 소속 모를 엘랑키아 기사들의 대활약이 그들의 가슴 속에 새로이 불을 붙인 모양이었다.

사내들이란, 아니 무용을 익히고 따르는 자들이란 모두가 같은 모양이었다.

이는 티테니아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물론 그래야지요. 프리스마라의 활약은 잘 봤습니다. 이번 돌격에 선봉을 맡겨도 되겠습니까?”

“기꺼이 맡도록 하지요. ‘패잔병 사냥’에는 아무래도 기사 양반들 보다는 저희같은 용병 나부랭이들이 제격이니까요.”

언듯 들으면 자기비하적인 용어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프리스마라 장교도, 티테니아도 전혀 그런 뜻 없이 마주보고 활짝 웃는다.

비록 강한 돌격을 한 방 얻어 맞기는 했어도, 여전히 1천 이상의 병력이 남아있는 그룬발트 기사들이다.

그런데 그걸 앞에 두고 ‘패잔병 사냥’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데서 강한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서두릅시다. 적 보병들도 궤멸시킨 것은 아니니까요. 정신 차리기 전에 기병까지 끝장 내서 겁을 주도록 하지요.”

“예, 돌격 타이밍은 프리스마라에 맡기겠습니다.”

“허헛, 그럼 뭐 기다릴 필요 있겠습니까? 아라라라라라라라라!”

지금까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던 장교의 입에서, 마치 악기라도 된 듯 우렁차고 날카로운 기성이 터져 나온다.

“아라라라라라!”

“카라라라라라라라!”

“아라라랏! 아라라라라!”

공격 임무의 전달, 목표의 지정 따위는 상관 없었다.

장교의 외침에 공명하듯, 뒤에서 숨을 고르고 있던 프리스마라 경기병들이 무기를 치켜들며 그들 특유의 전투 함성을 내지른다.

“아라라라랏!”

“카라라라라라라라!”

돌격 나팔도 필요 없었다.

그들이 마치 한 몸이 된 것 처럼 앞장서서 달려나갔기 때문이다.

절대로 본대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방패막이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명백하게도, 이 작지만 용맹한 부대의 창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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