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5.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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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갈수록 격화되고 있었다.
수레와 잡동사니를 담아 두었던 나무 상자 따위로 만든 어설픈 방어선이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이었다.
타탕! 타타타타탕!
“으윽, 큭!”
“몰아내! 몰아내라고!”
타앙! 따다당!
“커헉!”
“밀어붙여! 엘랑키아 놈들을 쫓아내라!”
“뒈져버려!”
파앙!
“끄아아아아악!”
수적으로 절대적으로 부족한 엘랑키아 군이 그나마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던 것은 병력이 질적으로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상당히 넓은 정면에서 말도 안되는 그룬발트 군의 공격을 계속해서 받아야 했던 중앙부가 그랬다.
슈뵈켄을 지키기 위해 차출되었던 총병들은 모두가 남달리 숙련된 사수들이었으며, 1개 야전군 수준의 포병 화력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포병 호위대로 지원온 트랑카벨 가문의 용기병들 역시, 경험이 많지는 않으나 빠르게 전장에 적응하며 자기 역할을 다 하고 있었다.
용기병들이 가진, 비교적 총신이 짧은 기병용 수석총들은 이런 난전에서 상당히 유용함을 증명하고 있기도 했고.
허나 그런 분전에 한계가 찾아오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지금이 그 ‘한계의 순간’임은 명확해 보였다.
숫자로 밀어 붙인 그룬발트 군이 쉴 새 없이 교대 사격을 하는 데 비해서, 엘랑키아 군은 아무리 숙련 사수라 할지라도 물리적인 연사 속도의 한계에 직면했다.
직접적인 적의 사격에 노출되면서 포수들의 재장전 속도도 늦어졌다.
설령 장전을 마쳤더라도, 집중 사격에 밀려 포격 기회를 좀처럼 찾지 못하는 점도 컸다.
쏟아진 총탄에 견디지 못한 판자가 물리적으로 부러지기도 하며, 수레 반대편에 다닥다닥 달라 붙은 그룬발트 창병들이 창으로 반대편을 위협하기도 했다.
병사 개개인의 의지와 자발적 희생에 의지하는 것은 더 이상은 어렵다.
···라고 첼레스티나는 판단했다.
“후퇴! 전 부대에 후퇴를 전달!”
“옛, 알겠습니다!”
‘공격이든 후퇴이든 할 수 있을 때 안하면 결국 못하는 상황이 온다’
라고 콘도티에레는 자주 말했었다.
공격을 하면 안되는 상황에서 공격하는 것 만큼이나, 후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후퇴를 안하는 것도 군을 파멸에 몰아 넣는 행위라면서 말이다.
첼레스티나는 콘도티에레가 한 말이라면 토씨하나 빼먹지 않고 온전히 기억하고 있었으니 틀림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판단하기에, 지금이 바로 전술적으로 후퇴할 수 있는 마지막 타이밍이었다.
몇 분만 지나면, 방어선 여기저기가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전술적 후퇴가 아닌, 무질서한 패주가 시작될 것이다.
겨우 몇 분 더 버티기 위해 전체를 희생하기에는, 콘도티에레가 자신에게 맡긴 부대가 너무도 소중했다.
“포병은 아직 손실이 없나요오?”
“사상자가 일부 발생했지만, 아직 포반 전체가 무너진 상황은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후우···.”
사실 후퇴 준비는 진작부터 하고 있었고, 전방의 중대급 지휘관들에게는 이미 상황을 전달해 둔 상황이었다.
카르카냑에서부터 공들여 조직해서 데리고 온 참모 조직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암만 천재적인 대전략가가 지휘봉을 잡더라도, 그 지시가 ‘필요할 때’ 전방에 가서 닿지 않는다면 그건 우두머리 없는 양떼나 다름 없으리라.
지휘관이 고함을 질러 부대를 일시에 움직이기에, 전장은 너무 넓고 또 시끄러웠다.
규모가 중대 단위만 넘어가도 명령을 전달할 전령의 존재는 필수적이었고, 이 전령들을 관리하고 오가는 정보를 취합하는 참모 조직이 없다면 알게 모르게 많은 손실을 감수하게 된다.
현재 첼레스티나, 그리고 주장인 티테니아를 보조하는 20여 명의 참모와 전령들은 트랑카벨 영지군에서부터 오랫동안 손발을 맞춘 이들이었다.
적에 비해 훨씬 수가 적은데다가, 병종의 비율은 치우쳐 있고 운용도 복잡한 부대가 첼레스티나의 생각대로 잘 움직인 것은 전부 이들 덕분이었다.
부대 구석구석까지 명령을 전달하고, 구석구석이 경험하고 있는 전황을 다시 지휘부로 전달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판단에 따라서 명령 전달을 늦추거나, 반대로 서두르기도 한다.
하급 지휘관이 전방에서 사망한 최악의 상황에는 제한적인 지휘자 역할을 하며 부대 운용이 불협화음이 없도록 최선을 다 한다.
뛰어난 명 전략가도,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전방의 용사들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 둘만 가지고는 ‘군’ 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준비가 지금 빛을 발한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임에도 ‘사전에 준비된’ 전방 부대들이 질서 정연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먼저 둔중한 포병들이 두 파트로 나뉘어 후방으로 빠진다.
다음으로 총병들이 횡대를 유지한 사태로 교대로 물러선다. 뒷걸음을 하면서도 장전에 능숙한 명사수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화망을 늦추지 않는다.
한참동안 끈질기게 저항해오던 엘랑키아 군이 갑자기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그룬발트 군은 잠시 혼란에 빠진다.
전술이고 작전이고 떠나서, ‘아직 힘이 남아있는’ 적이 빠져나간다 느낀 것이다.
오히려 최전방에서 적과 직접 무기를 부딪치고, 얼굴이 보이는 거리에서 죽고 죽이고 있었던 만큼 본능적으로도 위화감이 느껴지고 있으리라.
때문에 혹자는 주인이 떠나버린 흉물스러운 바리케이드를 부수려 했다.
혹자는 역으로 거기 의지해 사격전을 계속하려 했으며···.
혹자는 바리케이드를 뛰어 넘어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 감히 그룬발트를 적으로 돌린 마지막 대가를 치르게 하려고 했다.
허나 그게 생각처럼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타타탕! 탕! 타당! 탕!
머리에 피가 몰려 근접 무기를 들고 추격을 시도한 이들은 대부분 열 걸음을 가기도 전에 총에 맞아 쓰러졌다.
엘랑키아 군이 빠르게 물러서며 압박이 해제된 덕택에 일시적으로 공백이 생겼고, 무대책으로 이 공백을 따라잡으려 한 이들은 소수였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일시적으로 생긴 ‘수적 유불리의 역전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물며 장교의 사격 통제 없이도 알아서 표적을 찾아 사격하는 엘랑키아 총병들의 기량은 보통 수준이 아니기도 했고 말이다.
“멈춰! 추격하지 마라!”
장교들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앞장서서 방어선을 넘은 동료들이 무익하게 쓰러지는 것을 보았기에 병사들은 주춤거리고 있었다.
“모두 벽을 부순다! 길을 내!”
“후속 부대를 위한 길을 만든다! 서둘러!”
고민은 길지 않았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가장 믿을만한 것은 엄격하게 통제되는 밀집 대형이다.
엘랑키아 군 총병들의 기량이 더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굳이 사방에 흩어진 동료들의 시체를 근거로 제시하지 않더라도, 아마 비슷한 숫자로 평범하게 싸운다면 불리할 것이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다들 느꼈을 테니까.
하지만 이는 개인의 연사 숙련도나 명중률보다, 한 발이라도 적진으로 투사체를 날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전열 전투가 지속될 수록 차이가 희석된다.
아무리 정예화 된 경보병이더라도, 평균적으로 훈련된 총병 밀집 대열이 뿜어내는 일제사격 화력을 이겨낼 방도는 없으니까.
현재 눈 앞의 바리케이드는 단순히 적을 엄폐하게 해주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수가 더 많은 그룬발트 군이 밀집 대형이라는 유리한 전술을 사용할 수 없게 막고 있었다.
그러나 몽땅 부숴 버리고 다시 연대급 밀집 대형으로 돌아가 진격한다면 승리는 기정사실이리라.
모두가 달라붙어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옆으로 밀어 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 알게 된다.
기본적으로 무거운 짐을 싣고, 포장되지 않은 야지를 달리는 것을 기본으로 만든 군용 보급품 수레는 단단한 나무를 견고하게 조립해 만든다.
당연히 총알은 물론, 힘 빠진 포탄도 막아낼 정도의 견고함을 보일 정도니까.
이를 일부러 바퀴를 고장내 고정시키거나, 옆으로 뒤집어 서로 엮어 놓았으니 보통 일이 아니다.
완전히 판자 단위로 부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원래 위치에서 치우기는 해야 할 터인데 워낙 튼튼하고 무거워서 잘 되지 않는 것이다.
제대로 된 도끼나 망치라도 충분하면 모르겠지만, 발로 차고 손으로 당기며, 개머리판으로 후려쳐 부수는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콰앙! 콰자자작!
“흐아아아악!”
“끄으으··· 끄억! 누, 눈이 안 보여!”
“커걱··· 으으으으···.”
도망친 줄 알았던 엘랑키아 군의 포탄이 버려진 수레에 명중한다. 다닥다닥 붙어 수레를 밀치고 있던 병사들이 한꺼번에 떨어져 나간다.
나무 판자가 산산조각 나면서 파편을 주변에 뿌린다.
나무 조각 하나하나는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으나, 얼굴 등 치명적인 부위에 고슴도치처럼 조각이 꽂히는데 멀쩡할 리가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냥 근처에 포탄이 떨어지는 것 보다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수비하던 엘랑키아 입장에서도 판자가 부서지면서 비산한 파편 때문에 많은 부상자가 나왔었고 말이다.
“멈추지 마! 시간이 가면 갈수록 위험해진다!”
“개자식들, 밀어 붙여! 서둘러!”
“아으으으··· 아으···.”
부상병들이 후방으로 끌려가고 해체 작업은 계속된다.
그래도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 붙이니 기껏해야 나무로 짠 바리케이드가 오래 버틸 리는 없었다.
판자를 부숴 버리거나, 옆으로 밀쳐서 공간을 확보한 덕분에 공간이 생기고, 지금까지 동료들의 분전을 지켜보기만 했던 후속 전열이 앞으로 나선다.
엘랑키아 군의 화력을 몸으로 받아내며, 마지막에는 진격로까지 개척하느라 죽을 고생을 했던 동료들을 초조하게 지켜보며 체력을 보존하고 있었던 그들이다.
이제 선두를 교대한다는 기쁨에, 그리고 조만간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쾌감에 함성을 지르는 동료들을 뒤로 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열을 갖춘다.
결원이 거의 없는 중대급 부대들이 창병의 보호를 받으며 무기를 적 방향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를 방해라도 하듯, 잠시 뜸해졌던 엘랑키아 군의 화력이 쏟아진다.
‘거의 없던’ 결원이 속출하며 운 없는 병사들이 줄줄이 쓰러져 나갔다.
탕! 타타탕! 탕!
콰앙! 뻐엉!
“으아아아악!”
“침착해! 적의 마지막 발악이다!”
“으으으··· 내 다리··· 내 다리이!”
“대열을 벗어나지 마라!”
적을 코 앞에 둔 데다가, 공간까지 매우 좁았기 때문에 다소 대열이 엉망이었지만, 어차피 바로 앞의 적만 몰아내면 끝이다.
엘랑키아 군은 강하다. 생각보다 정말 강하고 애를 먹이는 상대였다.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먼저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고, 어설프나마 수레로 쌓아 올린 방벽 뒤에서 버텼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 방벽을 버리고 물러선 지금, 양군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힘 대 힘, 강 대 강 싸움이 된다면 체력이 온존되고 후속 병력이 충분한 그룬발트 군이 질 리가 없다.
“전진, 앞으로!”
“앞으로오!”
“대열 맞춰! 적이 눈 앞에 있다!”
완전무결한 전투 대열을 갖추는 것 보다, 빨리 거리를 좁히고 화력을 퍼부어 엘랑키아 군 포병을 무력화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판단한 부대들이 전진을 시작한다.
이제 전장의 무게 추는 이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룬발트 보병들이 적을 압박하는 발걸음을 이어간다.
“사격준비!”
“명령 없이 사격하지 마라!”
그룬발트 군이 화력을 뿜어내려 했던 그 때.
타타타탕! 뻐엉! 타타탕!
타탕! 탕! 탕탕! 펑!
한 발 앞서 총탄과 포탄이 쏟아진다.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으며, 병력의 밀집도는 한계에 도달한 상황.
그림으로 그린 듯한 절묘한 타이밍의 선제 공격이었다.
무수히 많은 강철과 납으로 된 발사체가 허공을 가르고 날아와서는 막 공격에 나선 그룬발트 보병들의 몸을 잡아 찢는다.
여기저기서 피가 터져 나오고, 운 없는 동료들의 손가락과 뼛조각이 투구에 부딪쳐 소름끼치는 소리를 낸다.
하지만 이 정도 화력으로 그룬발트 군을 전부 죽일 수 있느냐, 라고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건 그야말로 마지막 발악, 그룬발트 장교도 병사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걸 몸으로 받아야 하는 운 없는 부대가 자신들임이 이가 갈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쏴라!”
타타타탕! 타타타타탕!
일시적인 화력 집중으로 발생한 빈 자리는 빠르게 후속 병력으로 채워진다.
그룬발트 군의 분노 서린 반격이 엘랑키아 군의 대열을 향해 뿜어져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