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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화약의 용병대장-506화 (473/556)

47-41.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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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니다, 와요!”

“기다려! 아직 한참 멀리 있잖아!”

어린 포수의 초조한 말에 노련한 포술장이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의 팔에는 끝을 뜨겁게 달군 철사를 감은 점화봉이 들려있다.

정면에서는 산개 대형으로 흩어진 그룬발트 보병들이 접근하고 있었다. 언제라도 양측이 발사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적을 코앞에 두고 포를 돌리거나 조준을 변경할 수는 없었다. 조준을 맞춰두고, 적이 그리로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으으으으으으···.”

공포에 질린 어린 포수가 창백해진 얼굴로 이상한 소리를 낸다.

방어선 대신 쌓아 놓은 수레와 포탄 따위가 담긴 나무 상자가 포수들을 보호해주고는 있었지만, 조금만 벗어나도 적의 사선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게다가 평소의 든든한 방벽이 아닌, 얇은 나무 판자 뿐이다. 언제라도 총탄에 뚫릴 지 모르는 것이다.

두려운 것은 포반의 다른 구성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경험이 적은 이들은 대부분 이렇게 가까이에서 적을 마주하는 것이 처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의 소속은 본래 공성공병대로, 땅을 파 참호를 만들고 무거운 병기를 옮기며, 땅을 다지고 포를 설치하는 것이 주 업무이다.

때문에 ‘이렇게 가까이’가 아니라 실제로 적을 보는 것 조차 처음인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야로스 발렌켄드는 포수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들으며 묵묵히 수레에 기대서서 건너편을 바라본다.

젊은 친구들이 안쓰러웠다. 자신이야 산전수전을 다 겪었지만, 그래도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적 총부리 앞에 서는 것은 처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 젊은 포수가 저렇게 초조해하는 것도 그냥 겁쟁이라고 비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어쨌거나 자기 발로 여기까지 왔고, 어쩌면 현재 전장에서 가장 위험할지도 모르는 포대에서 목숨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괴상한 ‘급조 부대’의 유일한 절대적 장점은 화포의 수가 많다는 것이다. 장점을 활용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잘 쳐 봐야 확장 연대급 부대가 화포는 16, 아니 17문이나 가지고 있으니까.

본래 16문이었으나, 마지막까지 짝이 맞는 바퀴를 찾아 포가를 수리한 어느 공병의 수훈 덕에 하나가 늘었다. 절대적 차이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좋은 일이다.

야로스는 공식적으로 어떤 책임을 지고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정식으로 엘랑키아 원정군 소속조차도 아니다!

랄렌 강 부근에서 간첩으로 몰렸다가 조사 후 일손 부족한 공병대에 현지 채용된 노무자에 불과했다. 갑자기 습격당하기 전에는 무기조차 없는 비무장 상태였으니까.

그럼에도 그는 첼레스티나의 지시를 전방 포병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아무도 그의 권위나 역할에 반발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델레망드 출신의 용기병들과 함께 포반에 섞여 그들을 지키고 있었고 말이다.

참으로 복잡기괴한 운명이라며, 야로스는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지금 입고있는 복장이 매우 언밸런스한 그의 현 상황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전투 중에 아무 데나 걸터 앉아 흙투성이가 된 누더기 바지 위에는, 부상한 포로에게서 벗겨낸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오래 써서 표면이 반들반들해진 갑옷은 안쪽에 징을 박아 철판을 고정시킨 상당한 고급품이다.

게다가 크게 수선한 자국이나, 구멍 뚫린 자국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 주인, 혹은 그 전의 주인들도 적어도 그거 입고 총 맞은 적은 없는 물건은 분명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머리에는 참호선 아무데나 굴러 다니던 기사의 투구를 썼다. 화려한 깃털 장식을 대충 잡아 뜯어냈기 때문에 꼴불견이었다.

사선을 넘나들며 급격히 친해진 그의 포대 동료들은 ‘털 뽑힌 칠면조 꼬리’ 같다며 놀렸지만, 눈 위에 챙이 달리고 뺨까지 보호되는 훌륭한 투구를 포기하기는 싫었다.

분명 상당히 비싼 물건임에 분명했다. 뭐, 갑옷과 다르게 원래 주인을 지켜내는 데엔 실패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허리에는 검대가 달린 튼튼한 허리띠, 그리고 거기 아무렇게나 찔러 넣은 쌍권총이 기괴함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 직후의 복잡한 참호선에서는 필요한 물건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아무거나 주워 입다보니 이상한 꼴이 되기야 했지만.

“이보시오 야로스 씨.”

“뭡니까?”

“당신 용병 시절에 주디칼리에서 혼자 요새 하나를 점령한 적이 있다면서요?”

“...누가 그러던가요?”

“저기 미녀 포병대장이 그럽디다.”

“과장된 일입니다. 부하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운이 좋았죠.”

“거, 요새 하나 해먹을 정도면 저 놈들 한 방에 쓸어버리고 그런 거 못하오?”

“아니 시팔 그게 되겠냐고요!”

야로스가 버럭 화를 내자 주변에서 낄낄거리며 소리 죽여 웃는 소리가 들린다. 심지어 섞여있던 용기병들까지도 같이 웃는다.

하지만 슈뵈켄 남쪽에서 함께 싸웠던 공성포병들은 포대를 지키고자 결사적으로 싸우는 야로스의 모습을 보았다.

적을 앞에 둔 상황에서 오는 이런 짓궂음은 힘든 전투를 함께 보내며 생긴 신뢰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지 간에, 이제 싸우는 수밖에 없고 차라리 절망적인 분위기보다는 나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더 이상 삽을 들 필요가 없어진 공병들까지 보조 장전수로 붙인 덕에 인원은 제법 많았다.

장전하기에도, 포와 화약을 옮기기에도, 습격해온 적과 맞서 싸우기에도 도움이 될 수준의 인원이었다.

“포격 준비!”

“준비이!”

갑자기 날카로운 외침이 방어선을 따라 이어진다.

이번 전투에서 첼레스티나는 포격 타이밍을 각 포대를 지휘하는 포술장들에게 위임햇다.

워낙 포들마다 제원이 다르고, 여러 방향을 커버해야 했으므로 내린 방침이었다. 각 포 역할에 따라 지침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점화를 명령하는 건 자율인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누구라도 명령을 내리면 포가 발사되게 된다.

수레 너머로 접근해오는 적이 속속 다가오고 있었다.

몇 개 중대 정도가 산개대형으로, 하기 싫어 죽겠는지 망설이는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대놓고 ‘다가오면 죽이겠다’며 포구를 내밀고 있는 조잡한 수레 진지를 향한 선봉 공격이기 때문이다.

공격중인 그룬발트 연대 지휘부 입장에서야 밀집 대형을 밀어 넣기 전에 이쪽의 화력을 낭비시키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그 대포 밥으로 선발된 보병들에게는 장난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이지만 속은 정말로 죽을 맛이겠지.

팍! 파팟! 팍!

슬슬 총탄이 날아오기 시작하며 나무 판자가 울리기 시작한다. 포격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던 포수들이 어깨를 움찔하며 몇 명은 머리를 감싸 쥐기도 한다.

“좀 더 기다린다.”

믿음직한 포술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적군은 정확히 조준이 어려운 거리에서 무리해서 사격하고 있다.

이유야 뻔하다. 본인들도 어차피 맞을 포격이라면, 조금이라도 먼 거리에서 맞고 싶은 것이겠지.

“쏴라!”

꽈광!

바로 다음 순간, 온 몸이 떨릴 정도의 육중한 포성이 울린다.

뻐엉! 꽝!

문자 그대로 온 몸과 수레가 부르르 떨리고, 화약의 폭발이 만들어낸 뜨거운 바람이 주변에 느껴질 정도의 폭발이었다.

바로 3문의 대구경 공성포가 불을 뿜은 것이다.

현재 급조 부대가 보유한 가장 무거운 화포이며, 인간의 힘으로 옮기고 재장전을 할 수 있는 한계 크기의 대구경 포이다.

물론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다’ 뿐이지, 결코 권장하지는 않는다. 덕택에 야로스를 포함한 모두가 방열하는데 투입되어 죽을 고생을 해야 했다.

당연히 재장전에도 시간이 많이 들어가고 화약 소모도 막대해, 야전에서 보병 상대로 쓰는 데엔 낭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 화력은 실로 화끈했다.

옆에서 지켜 보는데도 기가 다 질릴 정도인데, 이걸 얻어 맞아야 하는 적의 입장은 오죽할까.

그리고, 급조 부대 포병대 17문 중, 첼레스티나가 직접 운용을 맡고 있었다.

이 평소 행동이 묘하게 얼빠진 데가 있는 미녀 상관이 화약 무기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야로스로서는 믿음직스럽기가 그지 없었다.

“으읏!”

“흐아앗!”

정면에서 다가오던 산개 대형의 그룬발트 군이 일제히 쫄아서 몸을 움츠리는게 느껴졌으나,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이 3문의 거포가 노리는 것은 산개 대형의 포탄 받이 따위를 노리는 게 아니었다.

퍽, 투콰곽! 콱!

맹렬한 기세로 대포 밥들의 머리 위를 살짝 넘어간 포탄은 뒤이어 다가오는 보병의 밀집 대형을 노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고, 그래서공성포들의 조준은 애초에 딱 저 정도 위치에 맞춰져 있었다.

적 선두 부대가 하는 일과 무관하게, 표적이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는 말이다.

성인 남자 머리통만한 쇳덩이가 밀집대형으로 접근하던 보병 부대를 침범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불규칙적으로 튀고 구르며 모든 것을 파괴한다. 인간의 살과 뼈도, 그들이 입은 직물도, 무기와 갑주를 이루는 강철도 그 막대한 파괴력 앞에서는 똑같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던 부사관의 다리가 포탄의 회전에 휘말리자 나뭇가지 꺾이듯 정강이 가운데가 꺾여 버린다.

여전히 남아도는 포탄의 회전 에너지는 그대로 부사관의 나머지 육체를 감아 올려 ‘허공으로 던져’ 버렸다.

강철 갑주로 무장한 ‘사람’이 허공으로 2미터 넘게 날아 올랐다가 구겨지듯 떨어지는 광경은 야로스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너무 비현실적인 광경이라 아무것도 반응할 수 없었다.

멀리서 지켜보는 상대편이 그럴 정도인데, 희생자 주변에 있던 동료들은 끔찍한 경험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포탄이 대열 안에 머물렀던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지만, 포탄이 지나간 이후에도 그 여파는 계속 남아있었다.

막대한 파괴력이 만들어낸 ‘인간의 조각’이 허공에서 비처럼 쏟아지는가 하면, 그 위력에 휘말린 동료가 내동댕이쳐지듯 날아드는 바람에 대열이 무너진다.

운 좋게 골절 정도로 끝난 경우도 있었으나, 이 또한 지금까지 고고하게 유지되던 밀집 대형의 질서를 부숴 버릴 수준은 되었다.

“대열 복구해! 정신 차려라!”

“속보! 속보! 빨리 가라 이 자식들아!”

장교들이 기계적으로 부하들을 닥달한다. 그들 역시도 혼이 빠져 나갈 지경이었겠지만 의무를 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들의 역할이 효과가 없음을 깨달은 선두 보병들이 속도를 높여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럴 줄 알았지. 야로스는 권총을 하나 꺼내 천천히 전방을 향해 조준한다.

권총은 두 개 주웠지만 탄약은 모두 해서 일곱 발 밖에 확보하지 못했다. 두 발은 장전하는 데 썼으니 다섯 발 뿐이다. 조심스럽게 써야 했다.

문득 첼레스티나가 있는 쪽을 바라보니, 포격을 마치고 지옥의 가마솥처럼 연기를 뿜어내는 공성포의 재장전을 지시하고 있었다.

펑! 퍼엉!

타타타타탕! 타타탕!

재장전이 간편하고 연사가 빠른 소구경 포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고, 뒤 이어 포대를 지키는 말에서 내린 용기병들도 사격을 시작한다.

그 외의 중간 사이즈 포들은 좀 더 기다린다. 어차피 산개 대형의 총을 받이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진짜’는 본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으억!”

“계속 쏴! 접근하게 두지 마!”

“허어억!”

근거리에서 총탄이 오고가자, 산개 대형으로 접근하던 적 보병 숫자가 확 줄어든다. 나머지도 어정쩡하게 이쪽을 노릴 뿐 함부로 달려들지는 못한다.

말 그대로 본대가 도착할 때 까지 시간만 끌 뿐, 임무를 다 했다는 확신이 돌면 뒤로 빠지겠지.

쿵! 쿠쿵!

타타타타탕!

측면에서도 포성과 총성이 들린다. 일부러 적진 한 가운데로 진격해와 방어선을 꾸린 ‘보람’이 있었다.

어느정도 효용 가치를 잃어버린 기병들의 기습 공격과 달리, 제대로 된 보병과 포병을 갖춘 급조 부대가 위협적이라 판단한 적이 일제히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정면은 포병 대부분과 용기병, 그리고 슈뵈켄에서 차출된 창병들이 지킨다.

양 측면은 지빌링엔 반연대와 선발 사수들이 위치한다.

마지막으로 후면에는 나름 충실한 전력을 갖춘 기병대가 대기한다. 배후로 우회하려는 적을 차단하거나 위험한 전선을 보강하는 역할이다.

그렇게 평소라면 도저히 선택하지 않았을 위험천만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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