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0.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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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놀라서 표정 관리에 실패했음에도, 주변 살피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타입으로 보이는 세두시온은 거침이 없다.
“신성 그룬발트 제국 역사상 유례없는 대군이 결성되었소. 그 사령탑으로 가장 어울리는 이라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전장의 상사화 세델레네 공 말고는 생각도 할 수 없지.”
“그렇게··· 유명한 사람입니까?”
“흐음, 그러고보니 귀하는 단명종이었지. 짧고 덧없으나 그렇기에 아름다운 귀하의 삶에 경의를 표하오. 어찌되었건 이 세두시온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긴 인간이니.”
···내가 이래서 엘프를 별로 안 좋아한다. 악의 없이 사람 속을 이렇게 긁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겠다.
대화를 듣고있던 주변 참모들과 호위병들이 갑자기 격앙되는 것이 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이런 자리가 아니었다면 죽이지는 않더라도, 죽기 직전까지는 두들겨 맞았을 수준인데.
포로로 끌려오기 전에 든 얼굴에 시퍼런 멍도 헛소리 하다 얻어 맞은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무튼 적대적인 분위기 파악 안되는 세두시온은 말을 멈추지 않는다. 모르는 것일까 무시하는 것일까.
어쨌든 내용상으로는 훌륭한 정보 제공자였다. 나나 내가 속한 종족에 대한 어처구니 없는 모욕은 참아 줄 정도로 말이다.
급한 상황이지만,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졌던 나는 급하게 참모에게 간단한 지시를 내리고 다시 귀를 기울인다.
“인간종이라면 모를 수도 있다 생각하오. 그대들 기준으로는 몇 세대나 전의 일이 될 테니까. 당시의 비젤키르헨은 너무도 강해서 적수가 없을 정도였소.”
비젤키르헨은 엘프 선제후 가문 중 하나이고, 다행히 이번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아무튼, 세델레네 공의 이명 중 하나인 암월 검희는 그 당시에 생긴 이름이니까 말이오. 당시 비젤키르헨의 여주인이었던 데시메리엔 선제후가 모루라면, 세델레네 공은 망치라고 할 수 있소.”
“그런 이명이 있었군요···.”
“당시 나는 아직 소년이라 모르는 것이 많았지만, 암월 검희의 이름대로 야간 기습에 시달린 가문의 어른들이 전투를 포기하고 협상에 나서던 것이 기억에 나는군.”
···예상대로 나는 피상적으로만 알던 내용이다. 서적에서 글로는 읽은 적 있지만, 같은 시대를 살았던 엘프의 입으로 들으니 생생하다.
스승님은 좀처럼 자신의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나도 궁금해서 일부러 책을 구해다가 찾아본 내용이니까.
다만 이 시기 그룬발트 제국의 역사서라는 것은 종교나 유력 가문 위주로 서술되기에 군사 관련 내용은 아주 적은 정보를 통해서밖에 파악할 수 없었다.
“허나 데시메리엔 선제후가 병으로 유명을 달리한 후, 가문을 떠났다고 들었소. 본래라면 친언니의 것이었던 선제후의 지위를 물려받는 것이 법도에 옳았겠으나.”
“자, 잠깐만요, 세두시온 공. 스··· 세델레네··· 공이 선제후와 형제 관계였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전 선제후의 동생이고, 현 선제후의 이모라고 할 수 있지. 뭐, 타국의 인간이니까 모를 수도 있는 일이오.”
세두시온은 그 와중에도 끝까지 속을 긁어댔지만, 정말로 처음 안 사실이었다.
본래라면 감히 얼굴도 마주하기 힘든 신분일 것으로 추측은 했지만···. 선제후의 직계 가족이라니.
“그래서, 설마 귀경이 그 세델레네 공에게 사사받은 제자라는 것이오? 역사에 남을 대군의 사령탑을 마다하고 만나러 가게 한?”
“글··· 쎄요. 다른 제자도 있을 수도 있지 않을지···.”
“호오, 그렇다면 나의, 브라우나인의 군세가 속절 없이 패한 것도 이해가 가는군. 나는 그 전장의 상사화 공의 문하에게 패했던 것인가···.”
갑자기 득의만만한 표정을 짓는 모습에 갑자기 짜증이 벌컥 난다.
솔직히 ‘눈 감고 달려든 댁의 잘못’ 이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스승님이 해 주셨던 말이 생각난다.
‘기분 좋은 적은 계속 기분 좋게 놔두면 됩니다. 기분 좋은 멍청이는 반드시 제 무덤을 파게 마련이니까요’
그래, 그런 이야기도 들었었지. 지금 내 눈 앞의 ‘기분 좋은 멍청이’는 기대도 안한 귀중한 정보를 마구 뿌려주고 있었으니, 하나도 틀린 말이 없다.
“말이 길어졌군. 어쨌든 그 세델레네 공의 지휘를 받을 수 있을까 싶어 몸소 출병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여섯 선제후 가문의 위촉을 거절하였던 모양이오. 그 결과가 이 꼴이군··· 자이트리츠 전쟁관 따위.”
“자이트리츠의 참모들이 여럿 참전했습니까?”
“전선마다 몇 명씩 배치되었다고 하더군. 북쪽에서 접근하고 있는 증원군 또한 그들이 지휘할 예정이라는 것을 보니 말이지.”
이건 또 새로운 정보이다. 나름 ‘비싼 몸’인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참모들이 생각보다 여럿 있고, 증원군까지 있다는 것인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세두시온 공.”
마침 이동 준비가 마무리되었다는 참모의 보고를 받은 나는 한 마디만 하기로 했다.
말이 끊긴 세두시온의 눈썹이 놀라움과 불쾌함으로 곤두선다.
“폰 자이트리츠의 참모들은 상당히 훌륭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세두시온 공께서 잘못 생각하고 계십니다.”
“음? 무슨 말이오.”
“아마 세두시온 공의 병력 나머지 절반도, 어떻게든 전력을 온존하여 전장을 떠난 전쟁관 참모가 아니었다면, 모두 저희 측 포로가 되고 말았을 겁니다. 그 공세는 그만큼 어리석었으니까요.”
“마, 말을 가려서 하시오···.”
엄청 화가 난 모양인지, 하얀 피부에 남겨진 멍자국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런데 이제와서 화 내면 뭐 어쩔 것인가. 그래봤자 병력 다 말아먹고 포로로 잡힌 현실이 바뀔 것도 아니고.
“그럼 전투 와중이라 면담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투가 마무리 되면 다시 뵙겠습니다, 세두시온 공. 그때까지 건강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자, 잠깐 기다리시오!”
“세두시온 공을 정중히 모시도록 하게.”
“옛, 콘도티에레!”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했으나, 솔직히 역겨운 대화였다.
뭐 세두시온이라는 인물이 성격이 더럽고 눈치가 없는 데다가, 엘프 특유의 오만함까지 있어서 그런 점도 있겠지만 내가 역겨움을 느낀 점은 다른 부분이다.
바로 자기 실수로 패배, 무모한 작전으로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고서는 자기 알 바 아니라는 태도 때문이었다.
그나마 면담 초입에 부하들의 안전을 챙기는 척이라도 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얼굴에 두번째 멍을 만드는 건 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나는 쫄보라서 그렇게까지 하진 못했겠지만.
아무튼 ‘한 전선을 담당한 야전군 지휘관’의 입에서 나온 정보는 소중한 정보이다. 머리속에서 다음 전술 상황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이름을 들어보는 스승님은 어디서 뭘 하고 계신 것일까.
오랫동안 연락을 안 드리기는 했다. 딱히 정이 없어서는 아니고··· 나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스승님이 나를 찾아오려고 했다? 그러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만약 연락을 하고 싶었다면 주디칼리에 등록된 슈토르히 연대 법인 앞으로 편지를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흠, 생각해보니 스승님은 그런 사회 시스템에 대해 무지하신 편이었지··· 라기보다 일부러 무시하고 사는 것 같은 자유로운 영혼이었으니까.
나로서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긴 한데··· 이번 그룬발트 대군의 지휘를 스승님이 맡았을 수도 있었겠구나.
···여기까지 생각하니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내가 어떤 끔찍한 꼴을 당했을지 상상이 가서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동 준비가 끝났습니다, 콘도티에레!”
“수고했네.”
“그런데 정말··· 이 정도 병력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보병 1개 연대 정도는 곧바로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음음, 그건 아닐세, 리타르몽 참모. 아룬하비크도 지금 당장은 적이 물러났지만 언제 다음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니까.”
“아··· 그렇군요.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콘도티에레!”
부디, 내가 지원부대를 보내지 않아도 아군이 승리할 수 있기를 속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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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수고했어요오!”
포대에 기대 앉아서 땀을 닦고 있으려니, 첼레스티나의 밝은 목소리가 들린다.
“모두 16문의 화포를 기동 가능하게 견인마에 결속했고, 여분의 탄약과 포탄도 수레에 실어 두었습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역시 야로스를 믿기를 잘 했네요. 슈토르히에 계속 있었으면 야로스도 중대장이 되었을 텐데!”
“하하핫, 제가 어떻게 슈토르히 중대장을 합니까?”
야로스는 이상하게 웃음이 터지며 손사래를 쳤다.
나우데사에서 밑도 끝도 없이 허울 뿐인 연대장까지 했던 경험이 있지만, 이상하게도 ‘슈토르히의 중대장’은 손에 닿지 않는 무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했던 시절 선임 중대장들이 하나같이 괴물같은 인간들이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눈 앞의 첼레스티나에 루트비히, 모리츠, 크레시미르··· 최근 적으로 만났던 모르네드까지.
물론 슈토르히 연대에는 선임 중대장 외에 일반 중대장들도 있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덜하다 뿐이지 다들 한가락씩 하는 용병들이었다.
“아닌데··· 정말인데···. 그리고 쉬는데 죄송하지만, 지금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아직 슈뵈켄 마을이 포위당한 상태인데, 저기는 내버려둡니까?”
“슈뵈켄 수비대는 알아서 잘 지켜낼 것이라 믿어요! 적 우익군이 엘랑키아의 측면을 때리기 전에, 우리가 막아야··· 시간을 끌어야 해요.”
첼레스티나의 불필요하게 정직한 ‘시간을 끌어야’ 라는 말을 듣고, 야로스는 또 죽도록 고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여쭤보고 싶습니다만··· ‘우리 부대’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첼레스티나 중대장?”
“전장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적의 시선을 끌고 유인하는 거예요오.”
“...근처 전장에 깔린 적이 2만은 되어 보이는데, 우리는 박박 긁어 모아도 2천도 안 되어 보입니다만.”
“하지만 티테니아 경의 기병이나, 원래 엘랑키아 좌익을 지키던 병력도 있으니까 외롭지는 않을 거예요오!”
하마터면 ‘저승길이 말입니까’라고 빈정대듯 물을 뻔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첼레스티나 선임 중대장과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야로스는 자신이 성장을 하긴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은 그냥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왔거나 말이다.
“수레로 대열을 보강하고··· 대신 화포가 16문이나 있으니 화력 하나는 끝내주는 이동 요새가 되겠군요.”
“네에, 글라트하우젠 기억나요? 그 때도 이렇게 했었죠!”
“아, 기억납니다, 중대장. 그때도 적이 참 많았었는데, 전투가 끝나고 보니 멀쩡한 수레가 하나도 없어서 전리품을 몽땅 짊어지고 이동해야 했었던가.”
“잘 기억 하시네요!”
옛 슈토르히 연대 출신의 두 사람은, 마치 옛날의 좋았던 추억을 회상하기라도 하듯 수레를 방어선으로 써서 싸웠던 전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야로스는 곤두섰던 신경이 차츰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때도 했었으니, 이번에도 어떻게든 되겠다 생각하는 것일까?
“그··· 중대장님, 이번 일도 콘도티에레께서 지시하신 일인가요?”
“네에, 당연하죠오? 그게 아니면 제가 여기에 왜 있겠어요?”
“하하, 그렇네요. 뭐, 그냥 궁금했습니다. 그럼 포대원 친구들에게 지시 전달하겠습니다. 다들 너무 고생해서, 연사 속도가 늦어질까봐 걱정되네요.”
“야로스만 믿을게요. 측면은 우리가 어떻게든 지킬테니 믿고 싸워 주세요.”
“예, 그래야죠 뭐.”
콘도티에레가 근거도 없이 사지로 부하를, 그것도 가장 신임하는 부관이자 선임 중대장인 첼레스티나를 보낼 리는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그 옆에 있으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꽤 높은 게 아닐까?
전장에서 자기 목숨을 남에게 맡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 모르지만, 그 상대가 콘도티에레라면 안 맡기는 것이 병신이다.
슈토르히를 떠난지 꽤 됐지만, 그 이상할 정도의 신뢰는 이상하게도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머리가 아니라 가슴 속일지도 모르고.
“여러분! 미안하지만 휴식 끝입니다!”
“아, 야로스 대장 신임이라고 사람 함부로 부리네!”
“위에 잘 보이려는 거 아니겠습니까?”
공성포병 동료들이 낄낄대면서 악담을 퍼붓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몸은 이미 포대 부근, 정확히 자기 위치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