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8.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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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로스 대장! 출세하셨구려!”
“명령만 내려 주십쇼, 야로스 대장!”
예전 공성포병 동료들이 야로스 발렌켄드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건다.
“놀리지 마십쇼!”
기분이 상한 야로스가 한 마디 하자 놀리는 소리는 잦아들었으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는 여전하다.
다만 그 이유는 ‘놀리기가 힘들 정도로 중노동’을 시작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애초에 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사방을 막아 놓은 방어 진지이다. 거기다가 포대가 배치 된 후에 주변을 파냈기 때문에 지형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중무장한 전투 병력인 그룬발트 중기병대의 돌격을 정면으로 받아낸 전적이 그 위력을 증명한다.
물론 포대 단독으로 싸운 것은 아니고 외부 지원이 있기야 했지만.
아무튼 부수거나 옮길 수 있는 방벽은 그렇게 처리하고, 폭이 넓지 않은 참호벽은 무너뜨리거나 흙으로 메워 가능한 평탄하게 만든다.
격전 와중에 진지 안팎에 쓰러진 아군과 적군 시체를 치우고 길을 낸다. 인도적인 문제도 있지만 무거운 물건을 옮길 때 발 디딤은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옮길 포를 선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포신을 얹는 목재 구조물인 포가의 상태가 좋지 않거나 너무 크고 무거운 공성포는 제외했다.
그렇게 비교적 ‘작고 옮길만 한’ 녀석들만 추렸다 해도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크고 무거운 쇳덩이들이다.
작은 포는 밧줄을 감아 당기거나 짊어지고 옮길 때도 있었고, 큰 포는 다 같이 당기고 밀며 고비를 넘는다.
그렇게 다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이동 작업을 진행했다.
그나마 여기저기서 지원 온 인원들 덕에 사람 손은 많아서 다행이었다. 차근차근 작업은 이어지고 있었다.
“밀어! 밀어어엇!”
“끄아악! 시바아알!”
땀으로 젖은 상체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어깨에 밧줄로 긁힌 상처가 한 뼘 정도 넓이로 커진 지 오래였다.
파낸지 얼마 안돼 지반이 물렁한 참호길 바닥은 움푹 파이며 힘을 낭비하게 만들고, 입에서는 의도하지 않은 욕설이 자동으로 튀어 나온다.
그래도 그런 죽을 고생 끝에 절대로 옮기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았던 포들이 속속 진지 너머 개활지로 위치를 옮기고 있었다.
“아이고··· 시팔, 어떤 망할 인간이 진지를 이 따위로 만든 거야?”
“...그거 내가 만든 건데요오···.”
“앗, 첼레스티나 중대장···.”
“네에, 이렇게 부수고 옮기게 될 줄은 몰라서··· 미안해요오···.”
“아, 아뇨, 그게 말입니다, 중대장님.”
“하이고, 야로스 대장님이 됐으면 위엄을 좀 갖추셔야 하는 것 아닌가?”
“야로스 대장이 그렇죠 뭐!”
야로스가 생각없이 내뱉은 한 마디를 마침 들은 첼레스티나가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자,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힐난의 눈빛을 보낸다.
하기야 애초에 진지는 튼튼하게 만드는 게 우선이지, 부수고 들어내기 힘들다는 건 잘 만들어 졌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말이다.
“여기 도와드릴 분들을 모시고 왔어요. 미안하지만, 저는 티테니아 경이나 다른 지휘관 분들과 조율하러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야전 포병 편성과 출전 준비를 맡겨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다녀오시죠. 저희가 마무리 잘 해두겠습니다.”
‘출전 준비’라는 말에, 잠깐 장난스러움으로 가벼워졌던 분위기가 다시 차갑게 얼어붙는다.
지금 ‘죽도록’ 고생하며 중노동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는 정말로 죽어가는 아군 동료들이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야전 포병으로 재편되어 출전하게 되는 공성부대 인원들 역시 같은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 어서 마저 옮깁시다! 반 넘게 했네요.”
“그러자고. 이번엔 우리가 앞에서 끌겠네.”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작업이 느려지지는 않는다. 어차피 감수할 위험이라면 아군에 여유가 있을 때 감수하는 편이 나으니까.
대부분 전장에서 오래 보낸 베테랑일수록 그렇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어, 저희를 도우러 오셨다고요?”
한편 야로스는 첼레스티나가 데리고 온 조력자들을 만난다.
의외로, 그들은 흉갑을 입고 탄약 가방을 비스듬하게 걸친 총병 복장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좀 특이하게 생긴 총을 가지고 있었고 말이다.
포병 진지에는 화기 엄금이므로 화승에 불이 붙어있나··· 하고 확인을 해 보았는데 불꽃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화승을 끼우는 격철 자체가 보이지 않았기에 야로스는 조금 놀랐지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이들이 무슨 수로 야전 포병을 급조하고 있는 자신들을 돕겠다는 것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단순 인력이라면··· 장소가 협소해서 사람을 많이 투입하는 만큼 효율이 올라가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 저희는 제32 델레망드의 용기병들입니다.”
“용기병이요? 아!”
“첼레스티나 부관께서 정말 급하니, 저희 말들을 화포 견인용으로 써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러셨군요··· 결단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결단은요, 저희는 트랑카벨의 신하들입니다. 명령이 내려오면 당연히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위험한 일을 하는 이들은 다들 반대급부로 강한 자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지만, 기병의 경우는 특히나 그렇다.
이는 아마도 ‘기병’이라는 위치가 단순한 병종의 구분 이상의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리라.
이런 강한 자부심이 때로는 부대의 유동적인 움직임에 방해가 되는 일도 있다.
가령, 갑주로 무장한 기사들에게 말에서 내려 중보병으로 싸우라는 지시도 강한 반발을 사는 경우가 있으니까.
하물며 ‘너희 말을 야포 견인용으로 써야 하니 말에서 내려라’ 라는 명령은 통상적인 기병 부대라면 거의 실행이 불가능한 수준의 명령이다.
설령 실행이 된다고 한들 거의 원한 수준의 깊은 불만을 품게 만들 명령이다.
특히 군마가 기병 개인의 재산인 경우라면 더욱 그런 것이, 사람을 태우는 승용마나 군마와 짐을 옮기는 노역마는 완전히 다른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상식’으로 알고 있는 야로스로서는 그런 명령을 내린 첼레스티나나, 군말 없이 이를 받아들인 용기병들이나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포를 얹을 제대로 된 포가도 이를 연결할 마구도 부족합니다. 지금부터 어떻게든 찾아보겠지만···.”
야로스는 말 끝을 흐린다. 모처럼 도와줄 말을 찾았는데, 포를 결속하고 끌고 갈 자원이 부족한 것이다.
“그것도 첼레스티나 부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든 해결 해 봐야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일단 한 번 봅시다. 저희도 짐 옮기는 데엔 이골이 났으니까요.”
의외로, 용기병대의 간부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며 성큼성큼 포대로 다가간다.
블랑독에서 벌어진 성전에서, 연맹군이 법황군을 격멸해 쫓아보낸 후, 트랑카벨 영지군은 천천히 군축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기병은 반대였다.
지난 전쟁에서 큰 전공을 세웠던 엘리스토프 마르크릭 중대장을 임시 연대장으로 선임하여 제32 델레망드 정찰 반연대를 편성한 것도 이런 기병 증강 계획의 일환이었고 말이다.
추격기병 2개 연대와 용기병 2개 연대로 편성된 이 소규모 기병대는 이름처럼 델레망드 주변 지역에서 지원자들을 모집했다.
‘승마 경험은 있으나 귀족 기병으로서 훈련을 받은 적은 없는’ 이들이 그 대상이었는데, 그 대부분은 상단에서 일하던 마차꾼과 가축 몰이꾼이었다.
특히나 이번에 차출된 용기병들은 곡창지대엔 델레망드 주변에서 생산된 농축산물을 카르카냑이나 라니오타 항구로 옮기던 마차꾼 출신들이다.
상황이 더 위험하고, 더 급박하며 옮기는 물건이 좀 무겁고 특이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원래 하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럼 저는 마저 옮겨올 포가 남아서···.”
“그러십시오. 생각보다 포가 많은데, 어떻게든 저희가 끌고 갈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습니다.”
“맡기겠습니다!”
다행히도 가장 큰 걱정을 하나 덜 수 있었다.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야로스는 감투 쓴지 얼마 됐다고 자신이 ‘과몰입’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바로 얼마 전, 나우데사에서도 팔자에도 맞지 않는 연대장이랍시고 화려찬란한 깃털 투구 쓰고 폼 잡다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야로스 대장! 여기 사람 부족하니 좀 도와주시오!”
“예, 갑니다, 지금 가요!”
그렇다 해도, 웃통 벗고 땀을 뻘뻘 흘리는 지금이 자신에게는 더 맞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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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레스티나나 북부 전선에서는 추가로 연락은 없지?”
“옛, 콘도티에레. 아직 아무런 전령도 없습니다. 확인 연락을 보내볼까요?”
“아, 그럴 필요는 없어. 무소식이 희소식··· 이었으면 좋겠구만.”
나는 빠릿빠릿하게 첼레스티나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참모 장교에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북부 전선에서 소식이 없다고 무작정 좋은 일만 벌어지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겠지.
하지만 ‘진짜로 큰 일’이라면 분명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이 없다면 가장 좋겠지만, 가능하다면 너무 늦기 전에 알게 되기를.
주장 티테니아에게 첼레스티나를 부장으로 붙여 보냈고, ‘권위’라는 점에서 이들을 돕게 하기 위해서 연락장교 뤼브르 드 루블랭 경도 보냈다.
정말 나로서는 짜내고 짜낸 병력, 1천 기의 혼성 기병대와 800명의 지빌링엔 보병들도 보냈다.
양측 합쳐 10만 대군이 격돌하고 있을 전장의 규모를 생각하면 미약한 병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체력까지 보존하며 온존했던 예비대인 만큼, 그 숫자 이상의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따로 걱정되는 점이나 조언을 정리하여 총사령부의 다고베르 2세 국왕에게도 보냈다.
여기서 더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은,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전방 지휘관들에게 실례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내 일이나 잘 해야지.
“리타르몽 드 당세르 참모께서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모든 적군이 백기를 올렸습니다! 포위당한 적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에 응했다는 소식입니다, 콘도티에레!”
“아, 그거 다행이네. 포로는 대충 얼마나 되는지 추산할 수 있나?”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3개에서 4개 연대의 지휘부가 포함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내가 또 사서 고민을 하게 된 이유는, ‘내 일’이 생각 이상으로 잘 풀렸기 때문이다.
리타르몽 참모는 내 지휘부 산하 장교들 중 가장 냉정한 사람이니, 아마 그의 보고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3개에서 4개 연대라면, 이미 전열이 붕괴되어 병력 이탈이 많은 상태일지라도 2천 이상은 될 테고 지휘부의 상당 부분이 통째로 포로로 잡힌 경우이리라.
이 정도면 적의 규모를 1만 정도로 예상했을 때 사실상 복구 불능 상태가 되었을지도.
“카렐 드 상포리앙 경께서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전령! 기병대는 숲 속을 통해 2킬로미터 정도 적을 추격했으나, 흩어져 패주하는 적 외에 나머지 본대는 찾지 못했습니다. 이상입니다!”
“그래. 곧바로 전령을 보내줘. 수고했으며, 더 이상 적을 추격하지 말고 귀환하도록 말이야.”
카렐 경의 기병대가 또 다른 큰 전과를 얻어 주었다면 사실상 적의 전멸 확정이었을 텐데, 아쉽기는 하지만 카렐 경은 이미 할 만큼 해 주었다 생각한다.
그런데 포위망을 벗어난 적이 거의 절반은 될 텐데, 그 본대를 찾지도 못하고 돌아온다는 것은··· 살짝 불안한 생각이 든다.
적이 본대도 찾지 못할 정도로 산산조각나서 추격이 의미 없는 상황일까?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잔존 병력을 수습해서, 우리 기병대의 추격 방향까지 예상해서 병력을 ‘빼돌린’ 상황일까?
설마··· 전면적인 붕괴 상태에서 병력을 일관되게 지휘하고, 동시에 전술적 대응까지 하는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게 가능하다면, 분명 적장은 대단히 냉정하면서도 남다른 통솔력을 가진 인물이겠지.
그랬다면, 애초에 저런 졸전 끝에 맥없이 자멸해 버렸을리가 없다.
아룬하비크 남쪽 숲을 통해 갑자기 나타난 1만여의 병력에 바짝 긴장했으나, 그들은 무모하게 돌진해왔고 준비한 아군의 반격에 어이없게 박살나버렸다.
한 번 기세를 잃어버리더니 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무너져서 도망쳤고 말이다.
그런 부대에 그런 재능있는 지휘관이 숨어 있었다면, 부대가 무너지는 동안 구경만 하고 있었을리가 없지 않은가.
전선이 넓어지다 보니 자꾸 과하게 신경을 쓰게 되는 모양이다. 나도 반성해야지···.
“콘도티에레! 리타르몽 경의 전령입니다! 적 지휘관을 포로로 잡았다는 것 같습니다!”
“지휘관? 따로 전령을 보낼 정도의 인물인가?”
“옛, 본인을 선제후 계승자라 주장하는 엘프라고 합니다.”
“엘··· 프?”
“옛, 소년의 외형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긴, 그룬발트니까 지휘부에 엘프가 있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주의해서 사령부로 호송하라고 전해줘.”
“알겠습니다.”
엘프라는 종족이라고 하면··· 피곤한 기억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어쩌면 정말 중요한 포로일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