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02화 (469/556)

47-37.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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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타레 드 카울은 뭔가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뺨을 닦았다. 오래 써서 부드러운 장갑 표면이건만, 상처가 났는지 따끔거렸다.

아까 난전 중에 눈 앞에서 적병의 총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얼굴에 구멍이 날뻔 한 순간이었지만 천운이었다.

하지만 눈 앞에서 섬광이 터진 바람에 번쩍거리는 무언가가 시야를 가렸고, 파편과 화염이 튀었는지 얼굴의 절반이 화끈거렸다.

부디 시야를 가리는 장애가 일시적이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스스로도 어이없음에 웃음이 나왔다.

당장 이 전투에서 살아남을지 어떨지도 알 수 없는데,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니.

지금 눈 앞만 안 보이고 얼굴에 상처만 난 것이 아니다.

벌써 두 번이나 말에서 떨어져 굴렀고, 투구와 갑옷 덕에 치명상은 피했지만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강하게 얻어 맞은 것도 몇 번 된다.

갑옷 안에 받쳐입은 조끼가 유난히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것이 그냥 땀만 흘려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허나 지금 확인해봤자 의미도 없다는 생각에 굳이 살펴보지 않는다. 상처가 심하고 당장 치료해야 한다면 어쩔 건가.

지금 전장을 떠난다?

웃기는 소리였다. 부하들을 버리고, 다고베르 2세 폐하를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느니 여기서 깔끔하게 죽는게 백배 나았다.

상체를 절반쯤 뒤로 돌리자 온 몸이 쑤셔왔다.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닌 것을 보면 뼈가 부러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절반 이하로 줄어 든 충실한 부하들이 눈에 들어온다.

“개자식들, 끝이 없습니다!”

“그럼 끝을 보아야지!”

부장과 전술적으로 아무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눈 후, 서로가 서로에게 웃어 보인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부장 역시 얼굴을 심하게 얻어 맞았는지 웃으며 드러난 이가 시뻘겋게 피로 젖어 있었다.

망신창이가 된 것은 디타레 자신의 몸 뿐만이 아니다.

그가 이끄는 부대는 이미 복구 불능 상태로 심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빠듯한 병력을 믿을 만한 부하들에게 맡겨 총 네 개의 분견대로 나누어 적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나는 적의 함정이 빠져 완전히 전멸당했고, 나머지 셋 중에서는 그나마 디타레의 직속 병력이 상태가 괜찮았다.

그럼에도 최초 병력의 절반에 불과하다.

물론 이탈 병력이 전부 전사한 것은 아니리라. 단순히 힘든 기동 중 낙오되어 복귀하지 못한 경우도 있을 테고, 말을 잃고 낙마하여 전장에서 이탈한 경우도 있겠지.

···허나 대부분은 죽었거나, 죽어가는 상태로 전장 어딘가에 누워 있으리라는 것은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무서울 정도의 피해였다. 통상적인 전투였다면 여기까지 몰렸다면 전장 이탈을 건의해야 할 수도 있었다.

엘랑키아 왕실군의 핵심, 근위기병대는 단순히 사람과 말만 있으면 보충할 수 있는 부대가 아니다. 돈을 주고 용병을 고용해 채울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때문에 나우데사에서 벌어진 북방 전쟁이 끝난 직후에도 그랬고, 남부 블랑독 이단 토벌 전쟁이 끝난 직후에도 전력을 회복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과연 현재 부대 편성이 이대로 존속할 수 있을까? 이걸 ‘보충’한다고 전투력을 회복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물론 그 이상의 피해를, 사망자와 부상자라는 유형의 피해와 전술적 방해라는 무형의 피해를 둘 다 입히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디타레와 그 휘하 부대가 맡은 임무는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 라며 전장을 떠날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승패가 날 때까지, 중앙군이 안전해질 때 까지 싸움을 멈출 수 없다는 극한 상황이다.

“한 번 더 간다! 저 두 개 연대 사이의 좁은 틈을 종대로 돌파한다!”

“옛, 대장!”

그런데 임무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디타레는 나름 기병, 특히나 경기병대 운용에 자신이 있었다.

괜히 국왕 폐하가 자신을 발탁해 근위기병대 간부로 올리고 선봉대를 맡겼던 것이 아니다. 이 점은 디타레의 자랑이며, 드 카울 가문의 자랑이기도 했다.

적을 기만하며, 주력 기사대를 전장 반대편으로 보낸 후 시작된 유격전 초기에는 나름 할 만 했다.

적은 기만당한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몸이 달았는지 눈에 띄게 허둥댔으며, 그 약점을 파고들 수 있었다.

디타레의 기병대가 돌격할 듯 접근하면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방어 대형을 취하고 발작적으로 사방으로 총을 쏴댔다.

그것만으로도 한참 동안이나 적의 발을 봉쇄할 수 있었으며, 만약 적이 진짜로 약점을 보인다면 창날처럼 파고들어 물어 뜯었다.

하지만 중간부터 적은 마치 다른 군대처럼 바뀌어 버렸다.

일부 병력을 나누어 슈뵈켄 마을을 봉쇄하고, 또 다른 일부는 대열의 외곽을 전담하여 지킨다.

그리고 나머지 주력은 본래의 목적인 중앙군의 측면을 노리는 우회기동을 단행한다.

이 때 부터 돌격할 듯 말 듯 적을 도발하는 기만 전술이 통하지 않기 시작했다.

결국 적의 발을 묶고 혼란시키기 위해서는 ‘정말로’ 돌격을 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희생을 동반한다.

허나 어쩔 수 없다. 여기서 시간을 끌지 않으면, 적어도 1만은 넘는 큰 규모의 ‘야전군’이 중앙군의 측방을 위협하게 되니까.

“대장, 이번에는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그래, 부탁하겠다.”

“적진 건너편에서 무사히 뵙도록 하지요!”

기병대는 즉각적인 반응이 어렵다. 때문에 경험이 많고 직관이 뛰어난 지휘관에 선두에서 지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선두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전황을 살피는 전술가적인 면모도 필요했다. 때문에 믿을 만한 부장의 존재는 큰 도움이 된다.

그렇게 이미 지쳐서 말을 잘 듣지 않는, 아니 못하는 군마를 재촉하며 목표를 향해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한다.

“온다! 이리 온다!”

“모두 준비해! 엘랑키아 놈들이 온다!”

고맙게도, 그룬발트 군은 멀찍이서부터 알아봐 준다. 어지간히도 엘랑키아 기병들이 무서웠던 것인지, 허둥지둥 대응 준비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약화될 대로 약화된 부하들을 이끌고 준비된 보병 대열 돌파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설령 가장 외곽을 돌파한다고 한들 깨끗하게 반대편으로 뚫고 나가는 대신 적의 후속 전력에 붙들려 피해만 누적될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목표는 부대와 부대 사이의 빈 틈이다.

실제로 앞을 가로막는 적 없이 돌파하여 집결하려 노력하는 적군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거나 반대편으로 나오려는 것이다.

다만 물리적으로 막는 벽이 없다 뿐이지, 적 총병의 사거리 안쪽을 지나가야 하므로 위험이 없다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는데, 마주보는 적 대열의 한 가운데를 지나는 것이므로 적이 쏜 척이 반대편 대열에 명중할 수 있다는 위험이 있었다.

이 때문에 보다 신중하고 소극적이 될 총병들의 움직임까지 계산에 넣은 대담한 침투 작전이다.

“우리가 선두다! 가자!”

“예엣!”

디타레의 부장이 이끄는 소부대가 속도를 올려 앞서나간다. 디타레 역시 적당한 여유 거리를 두고 그 뒤를 따라 속도를 올린다.

표적이 된 적 보병 연대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창대를 세운 적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일부 대열이 겁에 질려 갑자기 행군을 멈추는 바람에 대열이 어그러진다.

이런 크고 작은 전술적 이득만으로도 어느정도 엘랑키아 측이 유리해지는 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타타탕! 타타타타탕!

다가오는 엘랑키아 기병대를 보며 비스듬한 각도에서 적 총병들이 사격을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 성급했다. 타이밍이 맞지 않은데다가 비스듬한 각도로 날아온 총탄은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그 틈을 타 선두에 선 부장이 길게 종대로 늘어선 부대를 이끌고 적 대열 사이로 들어간다.

“최대한 빨리 빠져나간다!”

“절대 속도를 늦추지 마!”

위협적으로 함성을 지르기는 하나 가능한 적을 피한다.

반대로 그룬발트 보병들 역시 가급적 기병에게서 멀어지고자 했으므로, 조금씩이지만 통로가 넓어져 버린다.

그 사이로 재빠르게 엘랑키아 기병들이 진입한다.

탕! 탕! 타탕!

산발적으로 그룬발트 총병과, 엘랑키아 기병들이 가진 권총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걱정했던 근거리 일제사격이 터져 나오지는 않는다.

역시 반대편 아군이 맞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적 기병 몇 잡자고 사격을 명령할 만큼 배짱 있는 장교는 거의 없는 모양이었다.

타타타타타탕!

···라고 생각했더니, 여기저기서 총을 쏘기 시작하더니 화력의 밀도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한다.

“끄으윽!”

타고있던 말이 총에 맞는 바람에, 허공으로 붕 날아오른 엘랑키아 기병이 두 바퀴나 굴러 풀밭에 나동그라진다.

목이 부러졌는지 꼼짝도 하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시체 바로 옆에는 빗나간 총탄을 맞은 그룬발트 총병이 바로 뒤이어 쓰러진다.

수많은 인간들이 빽빽하게 몰려있는 좁아 터진 공간에서 서로가 서로를 향해 총기를 마구 쏴대는 지옥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 일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연기가 자욱해진 좁은 돌파구를 통과한 엘랑키아 기병들이 적 사정거리를 벗어나자 느슨한 대열을 이루며 집결한다.

“각 부대는 인원을 보고해라!”

다행히 혹시라도 걱정했던 것과 같은 막대한 피해는 없었다. 천운이었고, 앞으로 조금은 더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적의 외곽 방어선을 돌파해 반대편으로 나왔기 때문에, 적의 이동과 집결은 좀 더 늦어질 것이다. 큰 성과였다.

디타레는 위험한 작전을 침착하게 따라준 부하들이, 특히 맨 앞에서 이끌었던 부장이 자랑스러웠다.

“부장! 정말 훌륭한 선도였다! 지금부터는 내가 이끌겠네. 잠시 대열 안쪽에서 쉬도···.”

디타레는 말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다른 부하들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말 위에 상체를 세우고 있는 부장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총탄을 맞았는지 흉갑이 온통 깨져 있었으며, 입에서 흘러나온 진득한 피가 흘러내려 흉갑의 조각난 철판에 기분 나쁜 죽음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아··· 괜찮··· 은가?”

물음에 대답하려던 것이었는지, 입술을 조금 움직이던 부장은 다음 순간 상체가 훽 숙여지더니 안장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지휘관을 지켜내지 못한 부하들이 비명을 지르지만, 이제 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투 중에 죽은 동료를 애도하기 위해 말에서 내릴 수는 없었다. 특히 시시각각 적에게 노려지는 이런 상황에서는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 자체가 위험이니까.

“...내가 선두를 이어받겠다.”

“예, 대장님.”

지금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디타레가 말머리를 돌리고, 부하들은 부장이 탔던 군마를 챙겨 그 뒤를 따른다.

기병보다 훨씬 많은 말들이 죽어가는 참혹한 전장에서, 지금 군마는 너무도 귀중한 자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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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완전히 몰아낼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겠어요오···.”

“그럼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첼레스티나 중대장?”

“포들을 먼저 진지 밖으로 빼내야 해요! 티테니아 경에게는 그 후에 알리도록 할게요.”

“그, 그게 좀 위험··· 아닙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그 시각, 슈뵈켄 남쪽 방어 진지의 상황도 정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부 전선으로부터 티테니아가 이끌고 온 지원군은 슈뵈켄 후방의 포병 진지를 공격하던 그룬발트 기병대를 격파했으며, 이제 슈뵈켄 자체를 공격하는 그룬발트 보병대를 협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병처럼 단판 싸움으로 몰아낼 수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

일단 작은 마을에 달라붙은 병력이 3개 보병 연대나 되어 전력이 만만치 않았고, 이미 마을 외곽의 건물 몇 개를 점령까지 한 상태라 반격이 힘들었다.

이대로 싸우면 이기기야 할 것이다. 그렇게 슈뵈켄 마을은 온전히 엘랑키아 군의 소유가 되겠지.

하지만 지금, 전장은 슈뵈켄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전장 중앙 방향으로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손바닥만한 요새화 된 마을은 정말 아무런 전략적 가치도 없게 된다.

그것을 두고만 볼 수는 없었던 첼레스티나는 어떻게든 ‘주 전장’에 영향을 미칠 전력을 만들어내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임무를 돕게 된 야로스 발렌켄드는 눈 앞이 캄캄해졌다.

고정식 공성포는 애초에 움직이는 게 어려우니 포기한다고 해도, 야포로 활용할 수 있는 중소 구경의 화포들은 최대한 꺼내야 했다.

그런데 모든 게 부족했다. 몽땅 인력으로만 옮길 수도 없는데, 수레도 포가도, 이를 끌어 줄 짐말도 어디서 찾는다는 말인가.

“와··· 이걸 어쩌지 정말?”

야로스는 본래 보병 대열 안쪽에 소수의 경야포를 함께 움직이며 화력을 극대화하는 슈토르히 연대 출신이다.

경험이 있기에 지금 처한 상황이 엉망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

“이, 일단 방책을 부수고 길을 냅시다. 거기로 포를 꺼내죠!”

“그룬발트 놈들이 다시 오지 않을까요?”

“거야 기사님들이 어떻게든 막아 주시겠죠 시팔!”

좋든 싫든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멀리 전장의 중앙부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는 것은 문외한인 야로스도 알 정도로 명확했으니까.

“제기랄···.”

그의 눈에, 멀리 개활지에 빽빽한 그룬발트 보병 대열 사이를 뛰어다니는 엘랑키아 기병들의 모습이 보인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적에게 피해를 입히려는 필사적인 움직임이다. 얼굴도 모르고 대화도 한 적 없는 이들이지만 한 전장에 선 아군이라 생각하니 안타까웠고, 돕고 싶었다.

어떻게든 적 보병 대열의 뒤통수에 포탄 한 발이라도 갈겨 주려면 서둘러야 했다.

“이쪽, 이쪽으로 길을 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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