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3. 폴름스 전투, 셋째 날
정규 연대 정원에는 미치지 못하는 반연대, 그래도 800여 명의 지빌링엔 청년들로 이루어져 있다.
게다가 그들은 생판 남이 아니다. 대부분이 고향에서 알고 지내던 지인이며, 동료들이다.
심지어 적지 않은 숫자는 울리히와 같은 헨텔 가문의 성씨를 쓰거나, 친가쪽 외가쪽으로 엮인 가까운 친척이기도 했다.
만약, 초보 연대장, 연대장 대리인 울리히가 실수하면 이들이 모두 죽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뛰어난 다음 세대 청년들을 모두 잃어버린 고향 뮈다켄은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될 것이다.
몇년 전 결혼한 어여쁜 아내와, 얼굴도 몇 번 못 본 어린 딸의 얼굴이 자꾸 생각난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목숨을 걸고 돈을 벌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이 따위 망상이나 하게 되다니.
고향으로 금화를 보내거나, 이역만리 땅에 묻힐 뿐이다.
용병이 되어 전장에 나선 지빌링엔의 남자들은 상당수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다.
적어도 세 명 중 한 명은 어딘지 모를 전장에 묻히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금화와 바꿔서.
“연대장님, 전투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좋아, 신속하군.”
진형 변경 훈련만은 혹독하게 훈련해왔다.
굳이 전열 장교나 부사관의 가이드에 의존하지 않아도 대열을 변경하고 유지할 수 있는게 지빌링엔 용병이다.
장교부터 일개 신병까지, 누구든 대열의 선두도, 몸통도, 후위도 될 수 있도록 훈련했다.
그만큼 대열을 짜는 속도가 신속한 것도 당연했다.
지빌링엔 반연대의 횡대 전투 대형이란, 중앙에 비교적 두터운 총병 전열을 배치하고 양 측면에 창병 밀집 대열을 배치하는 것이다.
본래 지빌링엔 용병대는 총병에 비해 창병 비율이 조금 더 높은 경우가 많다.
실제로 트랑카벨 가문에 처음으로 고용되었던 에르만 슈피리 휘하의 지빌링엔 용병들 역시 창병의 비율이 많았다.
그 이유는 저돌적인 이들의 성향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화승총이 비싼 무기이다보니 신병 수급이 쉽지 않았다는 슬픈 이유도 있었다.
허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
풍족하다고는 못해도, 트랑카벨에 고용된 1세대 용병들이 고향으로 보낸 돈이 제법 풀렸다.
게다가 트랑카벨 가문 측에서도 모집 과정에서 총병 비율을 높여줄 것을 요구했기에, 이번 지빌링엔 반연대는 총병의 숫자가 좀 더 많았다.
어쨌든 통상적인 이 규모의 보병 연대라면, 창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그 주변을 총병으로 채우거나, 중앙부를 창병으로 보강했을 것이다.
하지만 울리히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빠른 진형 변환을 통한 대응, 강력한 중앙 화력, 견고한 측면 방어력을 얻었다.
‘당연히’ 중앙에 총병 밖에 없는 만큼, 만약에라도 강한 적의 충격부대가 중앙을 타격하면 대열을 돌파당할 위험성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도망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완고한 동료들을 믿는다. 적의 창 끝이 얼굴에 닿는 순간에도 피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길 총병들을 믿는다.
게다가 다행히 적은 혼전 중에 정신이 팔려 있다.
마지막으로 긴장하였으나 결연한 표정의 부하들의 얼굴을 둘러보던 울리히는 들고있던 검을 앞으로 내밀어 슈뵈켄 방향을 가리킨다.
“피 흘리는 흑곰, 전진, 앞으로!”
“앞으로오!”
“가자!”
지빌링엔 반연대가 힘차게 걸음을 내딛는다. 말 그대로 폴름스에 도착한 이후로, 신규 병력으로 편성된 이래로 첫 실전이다.
“옆의 동료와 보조를 맞춰라.”
“평소 하던 대로만 하자!”
걱정이 되었는지, 대열을 선도하던 장교들이 고함을 지르지만 대열은 큰 어긋남 없이 착착 전진해 나간다.
그러더니 점점 빨라진다.
연대장인 울리히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속도를 올리라고 한 사람은 없었다. 그냥 그게 표준 속도인 것처럼, 익숙한 듯 조금씩 발걸음이 빨라지는 것이다.
총병들은 익숙하게 화승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총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고, 창병들은 무거운 장창을 수직으로 세워 이동에 지장이 없도록 한다.
산악 지형에서 길들여진 바닥이 단단한 군화가 흙바닥을 밟는 소리, 갑옷과 장비가 부딪치며 내는 덜그럭 소리, 건장한 청년들이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뒤섞인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개활지를 반쯤 가로질러가고 있으려니, 그룬발트 군 역시 적대적인 지원군이 도착한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마을 후방 진지를 공격하느라 정신이 없던 기병대 일부가 뒤로 벗어나 평지에 대열을 이루기 시작한다. 접근하는 지빌링엔 반연대를 요격하려는 모양이다.
지휘검을 잡은 연대장 대리 울리히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간다. 드디어 시작이다.
멈추고 방어선을 새로 짤까?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지금은 서로 정신이 없는 상황, 적 역시 준비되지 않았다는 점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속보!”
“속보오! 속도를 올린다!”
“서둘러! 서둘러!”
통상적인 보병 부대라면 적 기병이 주변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사각 밀집 대형을 취하고 적을 기다렸을 것이다.
보병으로서 기병 상대로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대응책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위협이 되지 않으면 슈뵈켄의 포위당한 아군을 구원할 수 없다.
울리히는 이 국면을 보병 대 기병의 싸움이 아니라, 다른 아군을 공격하느라 정신이 팔린 적의 후방을 공격하는 싸움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실제로 과거에도 능선과 수풀을 이용하여, 적 기병의 후방을 보병으로 기습 공격하는 데 성공했던 적이 있으니까.
물론 지금은 적도 아군도 숫자가 훨씬 많고, 기습도 아니고, 개활지라는 차이점은 있었지만··· 말이다.
확실히 효과는 있어 보인다.
부랴부랴 개활지에서 대응하기 위해 새롭게 대열을 만들던 그룬발트 기병대는, 적 보병이 생각도 못한 빠르기로 거리를 좁혀버리자 당황한 것 같았다.
자기들끼리 뭐라 뭐라 외치는 듯 했지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들리지 않는다. 상관 없었다. 적이 흥분하고 초조해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으니까.
적과 거리가 400미터 쯤 되었을 때, 느슨한 횡대 진형을 갖춘 기병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중앙이 약해보이니, 그대로 면 대 면 싸움으로 밀어버리겠다는 것이다.
기병이 보병을 공격할 때 두려워하는 것은 창병이 세운 창날의 벽과, 근거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총병의 일제사격이다.
이렇게 창병이 측면에만 배치된 대열은 중앙 총병의 총만 비어 있다면 쉬운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제자리에 섯! 사격 준비!”
“멈춰! 멈춰! 사격 준비!”
“사격 준비잇!”
“옆 사람과 대열 맞춘다!”
두 개의 명령이 동시에 내려지고 빠르게 전파된다.
전진하느라 다소 흐트러졌던 대열이 빠르게 정돈되고, 총병들이 화승총을 수직으로 세우고 천천히 타들어가는 노끈이 물린 격철을 당긴다.
“후우, 후욱!”
“후우우!”
여기까지 소중하게 지켜온 화승의 불꽃이 커지면 큰일이다. 모두가 조심스럽게 입김을 불어 넣으며 불씨를 살린다.
이 정도로 정신이 없다 보니, 오히려 접근하는 적 기병이 두렵다는 생각을 잊게 된다. 천천히 속보 정도로 접근하는 적 기병을 곁눈질로 노려볼 뿐.
“적은 분명 우리가 총을 쏴 버리기를 기다릴 것이다!”
“절대 명령없이 쏘지 마!”
“지빌링엔의 배짱을 보이라고!”
예상대로, 적은 곧바로 돌격해오지 않고 선두가 어정쩡한 거리에서 얼쩡거린다.
탕! 타앙!
꽤 먼 거리에서 이쪽을 향해 총을 쏴 댄다. 총열이 짧아 탄도가 안정되지 않는 권총이라 이 거리에서는 잘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근처로 총탄이 날아갈 때마다 병사들이 움찔거린다.
아무리 배짱이니 뭐니 해도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억눌러 참을 뿐이지.
“악!”
권총을 여러 발 쏴대다 보니, 첫 희생자가 나와 대열에서 비명소리가 난다.
“으윽, 제기랄··· 끄으···.”
“괜찮냐? 뒤로 빠져.”
“으으··· 개자식들 다가오기만 하면 죽여버린다.”
하지만 다행히도 먼 거리에서 날아온 권총탄은 어깨 근육을 관통하지 못했다.
총열이 짧기에 타들어가는 속도가 빠른 고운 화약을 쓰는 만큼, 총구를 벗어나면 탄도가 안정되지 못하고 급격하게 위력이 저하되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총상은 총상, 주변 병사들의 몸이 바짝 얼어 붙는다.
그럼에도 어느 누구도 공포에 질리거나 충동적으로 사격하는 이는 없었다. 울리히는 침착한 부하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룬발트 기병 본대는 멀리서 기다릴 뿐, 더 접근하지 않는다.
이대로는 안된다. 적이 띄엄띄엄 쏘는 사격에 피해가 누적되는 것도 문제지만, 중요한 아군 구원에 늦어버리고 만다.
울리히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단을 내린다.
“총병, 전진 앞으로!”
“앞으로오!”
명령을 잘못 들은 건가 싶은 일부 소대들이 명령 전달이 늦어졌지만, 총병들이 발걸음을 내딛는다.
몸을 사리며 적의 접근만 기다려야 할 총병들이 오히려 기병을 상대로 접근하는 해괴한 상황이다.
사격을 유발하기 위해 얼쩡거리던 적 선두는 움찔하더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난다.
그러거나 말거나, 총병 대열이 천천히 나아간다. 사격 준비가 완료된 총을 가슴 앞에 세워 든 채로.
지금까지는 창병이 양 측면을 지키고 있었다면, 어느새 길게 횡렬로 늘어선 총병의 측후방을 지키는 꼴이 된다.
“돌겨어어어억!”
“돌격! 쓸어버려라!”
자존심이 상한 탓일까, 미친 짓을 하는 보병 따위는 두렵지 않다는 것일까, 그룬발트 기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다가오기 시작한다.
“멈춰! 사격준비, 조준!”
“모두 멈춰어어어!”
“사격준비, 조준!”
엉망진창의 구령이다. 신병이 적지 않은 와중에 무리하는 지시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울리히는 부하들을 믿었다.
게다가 총병 대열은 깊이가 5명이나 6명이나 되었다.
모두 한번에 쏠 수는 없고 교대로 사격해야겠으나, 정면으로 뿜어낼 수 있는 화력은 막강하다.
설령 적의 일부가 대열로 뛰어든다 해도 무력하게 무너지지는 않을 자신도 있었으니까.
다행히도 대부분의 지빌링엔 병사들이 침착하게 주변의 통제에 잘 따르고 있었다. 아슬아슬했다.
“사격 개시!”
타타타타탕! 타타탕! 타타탕!
따다당! 타타탓, 타타타탓! 타앙!
소대장의 지시에 따라 대열의 정면으로 엄청난 화염과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삽시간에 시야가 가려진다.
“2열 쏴!”
타타탕! 타타타타탕! 타타탕!
그리고 그 연기가 사라지기도 전에, 후열이 사격한다. 또다시 귀가 따가운 폭음이 사방에서 터지며 일제사격의 화력이 뿜어져 나간다.
“재장전! 재장전!”
“서둘러라, 그룬발트 놈들이 온다!”
평소보다 폭이 깊기 때문에, 비교적 수가 적지만 한 줄이 더 남았다. 허나 이들을 아껴두기로 한다.
총병들이 여전히 뜨거운 총구를 열심히 꽂을대로 쑤시는 사이, 연기가 걷힌다.
그리고 모든 게 명백해졌다.
방금 두 차례에 걸친 지빌링엔 반연대의 일제사격은 돌진해오던 그룬발트 기병대를 완전히 깨부쉈다.
물리적으로야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완전히 부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마지막까지 참은 두 차례의 일제사격은 후속하는 기병이 앞서 간 군마의 시체에 걸려 넘어질 정도로 성공적인 위력을 보여줬다.
그 뿐 아니라, 지휘관과 전열 장교들이 모조리 쓰러졌는지 겁에 질린 나머지 기병들이 양 측면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부대가 더 이상 기능을 못하는 완전 붕괴 상태에 빠졌다는 상징적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후방으로 도망치고 있다면, 명령에 의한 전술적 후퇴일 가능성이라도 있고 위협에서 벗어난 시점에서 재집결해 부대 기능을 회복할 아주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리라.
하지만 양 측면으로 도망친다는 것은 그럴 가능성조차 없이, 그저 공포에 질려 살기 위해 전장을 떠나려는 행위라고 할 수 있었다.
이미 참호와 방책을 타넘으며 전투를 한 탓에 체력이 바닥날대로 바닥난 군마, 준비 없었던 발작적 돌격이라는 이유도 있겠다.
하지만 침착하고도 대담하며 성공적인 근거리 사격이 없었다면 달성할 수 없었던 결과이다.
“이겼다!”
“이겼다아아!”
일시에 긴장이 풀리자, 총병 창병 할것 없이 모두가 주먹을 치켜들며 함성을 지른다. 첫 승리, 그것도 압도적이고도 깔끔한 승리이다.
하지만 연대장 대리 울리히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이 작은 승리는 방해하는 적을 배제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들이 여기 온 목적은 슈뵈켄을 구원하는 것이다.
“재장전을 마치고 전진한다! 슈뵈켄의 아군을 구해야 한다!”
“아, 알겠습니다 대장님.”
“모두 재장전을 서둘러!”
아직 적은 얼마든지 남아있었다. 방금 무너뜨린 적은 그 일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작은 반쪽짜리 연대가 슈뵈켄의 후방에 등장하면서, 그 영향은 파문처럼 전장 전체에 번져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