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1. 폴름스 전투, 셋째 날
“무슨 적이 나타난 거지? 병력은?”
“숲을 통과해온 적은 선견대였던 모양, 병력을 수습하고 전장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새로운 적의 선두와 조우! 그 병력은···.”
첼레스티나의 얼굴이 한층 일그러졌다.
“적어도 8천 이상, 아마도 1만 정도로 추측되는 병력··· 이라고 하네요오···.”
“어휴··· 어디서 또 그만한 병력이 튀어 나온 거야? 그룬발트 군은 병력을 어디서 마구 찍어 내고 있기라도 한가?”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는 적이 숲속을 통과해오는 것을 예상해 온갖 함정을 깔아 놓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적은 정확히 준비한 루트로 나타났으며, 우리가 준비한 함정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무작정 깊숙하게 들어왔다.
그리고 아군이 일시에 적을 포위해 섬멸해 버린 것이다.
내 입으로 자랑하기는 좀 그렇지만, 완벽한 승리였으며 지원군을 보내기 위해 예비대를 아껴가면서도 이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선견대였고, 이제 본대가 나타났다! 라는 것.
이건 예상 못했다.
젠장할··· 말하자면 준비된 함정을 적이 온통 밟아 준 덕분에, 손쉽게 승리했다.
하지만 더 강한 후속 병력이 나타났는데 준비된 함정은 이미 적이 다 밟아서 망가뜨린 상황이다.
좋든 싫든 힘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다소 방심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군이 그렇듯, 적 역시 주력을 북부 전선에 몰아 넣고 있는 상황이었을 테고, 아룬하비크와 브레세른을 연결하는 도로의 진지들 역시 건재한 상황이다.
그런데 한두 개 연대도 아니고, 1개 야전군에 가까운 신규 병력이 갑자기 튀어 나올 것이라고는··· 정말 생각 못했다.
변명을 해보자면··· 아마도 전장을 서둘러 정리하고 북부 전선을 지원해야겠다는 부담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에 가까울까.
이렇게 허를 찔리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정신적 패배를 곱씹을 시간도 없었다. 서둘러 대응해야 한다.
병력을 재편해 어디서 적을 맞이할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싸울 것이며, 무엇보다 북쪽으로 파견할 병력은 어떻게 할 것인가.
“콘도티에레, 북부 전선으로 파견 예정일 병력을 되돌릴까요?”
“안 돼! 최소한 그 정도의 병력은 보내야 해. 아우페브라즈의 지빌링엔 반연대에 7~800기 정도의 기병. 전장에 영향을 미치려면 말이야.”
“네에, 그렇게 할게요, 콘도티에레!”
여기서는 나머지 병력으로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지치고 휴식을 기대하고 있었을 병사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한 번 더 싸우는 수 밖에.
“그, 그런데, 콘도티에레!”
전령을 보낼 준비하던 첼레스티나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북부 전선으로 파견할 부대의 지휘관을 누구에게 맡길까요오···.”
“아···!”
이걸 생각을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직접 통솔해서 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적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북부 전선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남부 전선을 팽개치고 갈 수는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지키는 아룬하비크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여길 적에게 빼앗겼다가는 북부 전선의 본대, 브레세른을 지키는 루제 드 제브레도뉴 공작의 군, 거기에 폴름스 포위 성벽까지도 위험에 처하게 된다.
죽기살기로 지켜야 하는 지역이라는 말이다.
애초에 작전 계획도, 아무리 밀리고 밀리더라도 무조건 아우페브라즈와 아룬하비크, 두 마을은 사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말이다.
생각을 해보자··· 능력이나 경험은 둘째치고서라도 연대급 병력을 지휘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인물은 그다지 많지가 않았다.
우선 방금까지의 전투에서 주 전선에서 보병을 담당했던 리타르몽 드 당세르 작전 참모와 기병을 담당했던 카렐 드 상포리앙 경이 있다.
이 경우 폭넓은 전술적 시각과 작전 능력을 몇 차례나 증명한 리타르몽이 적합한 인물이라 생각하지만··· 전투를 앞둔 와중에 갑자기 주요 지휘관을 빼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은 지금 전장 깊숙이 있어서 지금 불러낸다면 큰 혼란이 올 것이다.
그리고 제32 델레망드 정찰 반연대의 엘리스토프 마르크릭 연대장은 더 멀리, 숲속에서 마지막까지 적을 추격하고 이제 귀환하는 도중이었다!
남은 것은··· 티테니아 드 몽파르지에?
지금 북부 전선으로 파견되는 지원군의 지휘관이 맡은 임무는 막중하다.
전장의 전체 병력으로 따지면 정말 한줌밖에 되지 않는 소수의 병력으로 전장을 움직일 쐐기를 박는 역할이다.
하물며 그 병력은 최소한 3개 이상의 소속을 가진 부대에서 긁어 모으듯 차출한 혼성부대였다.
그래서 충분한 권위를 가진 인물에게 맡길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고.
이것을··· 당차고 훌륭한 여기사이기는 하지만, 티테니아가 해낼 수 있을까?
절대로 못할 것은 없겠으나 이런 중요한 일을 지금 맡겨도 되나? 그녀를 위해서도, 군 전체를 위해서도 말이다.
이제와서 유능한 중대장급 인물에게 연대장 대리를 맡기기에는 늦어버렸다.
통상적인 봉건 군대였다면 충분한 권위를 가진 간부들이 충분히 있을 테니 이런 걱정은 없었겠지만···.
지휘체계 정립을 위해 직위만 높은 간부를 두지 않은 것은 이런 상황에서는 확실히 단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낀다.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첼레스티나와 마주보며, 나는 잠시 고민한다.
그리고 빠르게 결단을 내린다. 어차피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북부전선으로 가는 지원군은··· 티테니아에게 맡기도록 하자.”
“네에··· 티테니아 아가씨··· 는 훌륭한 여기사님이시긴 한데요오···.”
내 말을 들은 첼레스티나는 일단 받아들이기는 한 것 같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마 더 좋은 후보자가 있었다면 그녀가 먼저 나에게 제안했을 것이다.
나만큼이나 현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물쭈물한다는 것은 달리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내 말은 여기서 끝나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휘관으로서 티테니아를 보좌할 참모··· 아니, 부장이 있어.”
“네에? 누구인가요, 콘도티에레?”
“첼레스티나 델 캄포브레소.”
“네? 네엣! 콘도티에레, 저를 보내버리실 건가요?”
부장으로 적합한 인물이 있나 고민했던 듯한 첼레스티나는 내 말을 듣고 정말 놀란 것 같다.
“하지만 생각해봐, 첼레스티나. 지금 아직 경험이 부족한 티테니아를 보좌할 수 있는 인물이 누가 있겠어?”
“으으음··· 그래도··· 그래도요, 콘도티에레에···.”
“티테니아는 겨울에 카르카냑에서 참모 양성 과정을 무사히 마쳤잖아. 첼레스티나가 그때 교관이었지?”
“그렇긴 했지만···. 콘도티에레가 시키신다면 할게요오.”
아무래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무척 우유부단해 보이지만, 이런 첼레스티나를 명확하게 움직이는 방법이 있지.
“내가 첼레스티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티테니아의 보좌도 있지만 슈뵈켄 배후의 대규모 포병 진지야. 어떻게든 탈환해서 첼레스티나의 실력을 보여 주라고?”
“네에? 아앗,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항상 그렇지만 콘도티에레가 옳아요!”
첼레스티나는 목표가 명확할 때, 그리고 그게 자신 있는 분야일 때 엄청난 추진력을 보여주는 타입이니까.
사실 슈토르히의 선임 중대장들은 첼레스티나를 포함해서, 모두가 어느 용병단을 가든 연대장급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특출난 인물들이 작은 부대에 모여 있다보니 가장 잘 하는 일들만 해서 정작 본인들은 잘 모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트랑카벨 가문과 함께하면서, 이 친구들의 재능이 새롭게 꽃을 피우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첼레스티나는 지금 불안해하고 자신감이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하면 잘 할 사람이다. 전재산을 걸고 보증하라면 그럴 의향도 있다.
“그럼 첼레스티나, 티테니아에게 명령을 전달하고 부대 재편이 완료되는대로 출발해! 따로 보고는 필요 없어.”
“네에, 콘도티에레! 잠시 다녀올게요오!”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한다.
불과 수백 기의 기병대. 거기에 먼저 출발했을 지빌링엔 반연대의 보병들이 포함해도 간신히 통상적인 1개 보병 연대 정원 정도의 적은 수이다.
하지만 2만 명 정도라는 적 측익을 상대로 한 전장에서 변수를 일으키기엔 충분한 숫자이며, 여기서 변수를 일으킨다면 이는 연쇄적으로 10만 대군이 격돌하는 전장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굳이 표현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 첼레스티나는 잘 알고 있고 티테니아에게도 잘 전달해 줄 것이라 믿는다.
자, 그럼··· 나는 그만큼이나 중요한 남부 전선을 틀어막을 준비를 해야겠다.
이제 현실적으로, 남부 전선에서 쓸 수 있는 예비대는 몽땅 뽑아서 북부 전선으로 보냈다.
하필이면···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아룬하비크를 공격하다니.
심지어 선견대가 왔던 방향이 아닌, 더 서쪽으로 우회해서 안쪽을 노리는 포지션이다.
내 입장에서는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까다로운 상황이다.
차라리 브레세른에 병력을 집중했거나, 도로를 통해 진격해 왔다면 전술적으로 여유롭게 상대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숲을 통해 남쪽에서 시간차로 공격해오는 바람에 쉽게 상대하기가 어려워졌다.
순간 아룬하비크까지 적을 끌어들여 요새화 된 마을을 기반으로 방어전을 할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포기한다.
더 이상 적에게 주도권을 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몰라도, 적은 아군 방어 체계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여기서 적이 병력을 분산해 게릴라전에 나선다면··· 더 약해지지만 더 위험해진다.
게다가 지난 전투를 마치고 재편성도 마무리되지 않은 지금, 무리해서 행군을 요구하면 그 과정에서 낙오되는 병력도 적지 않게 발생할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차라리 숲에서 나오는 적을 영격하는게 싸게 먹힌다는 판단이다.
나는 차근차근 지형을 살피며, 새로운 전투를 여러가지 각도에서 계획해본다.
숲의 외곽, 시야를 가리는 위치, 미리 점거하고 있는 나지막한 언덕 등···. 지형은 아군에게 불리하지만은 않다.
불리한 것은, 조금만 물러나도 아룬하비크가 위험에 노출되는 어정쩡한 위치라는 점 정도인가.
어찌됐든, 적은 이쪽의 의표를 찌를 정도로 전황을 잘 읽고 있고, 1만에 가까운 병력을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을 정도로 참을성이 강한 인간이다.
상당히 침착하고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전술가라고 할 수 있겠지.
설마··· 전장이 어느정도 정리되고 북부 전선이 격화되는 타이밍에 맞춰서 공격을 계획했다면···.
아니, 설마. 그렇게까지는 아니겠지. 현실적으로 직선으로 전령을 보낼 수 있는 우리와 달리, 전장을 한바퀴 빙 돌아야 하는 그룬발트 측이 그런 고도의 연계를 할 수 있을리는 없다.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다. 나는 주의깊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
“정찰대가 적과 조우했다고 합니다! 적은 한 차례 사격 후 퇴각했으며, 숲의 외곽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오오! 드디어, 적의 후방으로 통하는 길을 개척했군!”
아룬하비크 남쪽 숲에서 진격하고 있는, 아니 ‘헤매고’ 있었던 병력은 세두시온 공이 지휘하는 브라우나인 선제후령의 군세였다.
그들은 본래 숲을 우회하여 남쪽으로부터 아룬하비크를 공격할 예정이었으나··· 일정에서 크게 어긋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제는 방향을 찾은 모양이다. 세두시온의 얼굴에 환한, 하지만 어딘가 섬뜩한 미소가 어린다.
“이대로 적을 몰아 붙인다. 모두 전투 대형으로!”
“전투 대형을 갖춰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