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0.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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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서둘러! 불필요한 물건은 챙기지 않는다.”
“예엣!”
바로 하루 전까지만 해도, 국왕 다고베르 2세가 머무는 엘랑키아 군의 총사령부가 있었던 아우페브라즈에서는 지빌링엔 병사들이 바쁘게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화약 가방에 빈 칸은 없지?”
“옛, 모두 어제 새로 포장한 새 탄약포입니다!”
“예비 탄약포도 챙겨야지.”
“그것도 물론 챙겼죠, 에르문드 대장.”
출전에 앞서 부하들을 챙기는 전열 부사관 에르문드 호르덴은 열아홉 살이다. 그리고 그 휘하 병사들도 대부분 나이가 많아봤자 스물 안팎이다.
가장 어린 병사의 나이는 열 여섯. 성인식을 한지 얼마 안된 신입 용병이다.
“좋아, 백병전 무기는? 설마 어제 받은 것 벌써 잃어버린 놈이 있나?”
“물론 챙겼습니다.”
“이건 절대 놓고 갈 수 없지요. 하하핫!”
총병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허리띠에 걸친 무기를 다시 확인한다.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듯,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무기를 살펴보는 그들에게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
지빌링엔은 대륙에서 가장 척박한 지역 중 하나이다.
그래서 병사들 중 대부분은 장창이나 화승총 등 주무기를 마련하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이는 형님에게 물려받은 화승총으로 무장한 에르문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보조무기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잘 없었다.
운 좋은 경우 다용도 연장인 도끼와 망치를 병행해서 사용했고, 그나마 형편이 나은 경우 납을 입힌 몽둥이나 단검 정도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트랑카벨 가문과 계약을 맺고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영토를 가로질러 엘랑키아 군의 후속 병력과 합류했고 이내 폴름스 부근에 도착했다.
‘대리 사령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라는 아직 계약 조건이 발효되기 전이라는 애매한 포지션을 이용한 대담한 이동이었다.
자신들의 고용을 승인해줄 대리 사령관,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 에트’를 만나 문제 없이 사열도 받았다.
그리고 막 자신들의 근무지인 아룬하비크에 도착한 직후, 다시 사령부 병참기지로 이동해 무거운 짐을 잔뜩 날라야 했다.
거기에서 나온 것은 기사들이나 쓸 법한 장검과 만듦새가 훌륭한 전투용 도끼, 철퇴 등 백병전 무기였다.
한동안 방치되고 손질이 잘 되지 않은 물건들이었지만, 모두가 실전적이고 값진 무기들이었다.
본래 전장에서 전투에 승리하거나 대규모 포로를 잡으면 무기를 잔뜩 노획하게 마련이다.
전쟁이 끝나고 재활용할 여지가 생기면, 이런 무기는 실물로 사용하든 녹여서 철재로 활용하든 가치가 높은 노획품이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는 한은 짐일 뿐이다.
이번 원정의 엘랑키아 군 역시 수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로델베르크에서 대량의 포로를 잡으면서 엄청난 양의 무기를 노획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애물단지가 되어 병참부 외곽의 임시 창고에 처박혀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폴름스 주변에 계속 주둔하고 있어서 다행이지, 그마저도 아니면 호수나 강에 던지거나, 땅에 파묻고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장거리를 행군해 폴름스로 도착한 충성스러운 지빌링엔 병사들을 본 그들의 콘도티에레는, 왕실군 병참 장교들과 협상하여 1천개의 무기를 얻어 낸 것이다.
어차피 수요가 많은 주무기, 즉 장창과 화승총 재고가 아니라면 그다지 유용한 치장물자도 아니므로 협상에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주어진 무기들은 병사들에게 분배되었으며, 단연 인기가 많았던 것은 종류를 막론하고 검 종류였다.
본래 검은 어느정도 재산과 지위가 있는 전사계급을 위한 무기이다. 제조에 필요한 기술과 재료가 모두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가지지 못한 이들은 동경하게 된다. 특히나 젊다 못해서 어리기까지 한 신병들은 더더욱 말이다.
그들을 지켜보던 숙련병들 중에서는 ‘니들 키에 안 맞게 너무 큰 칼 쓰면 균형 안 맞아서 고생한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런 말이 들릴 리 없었다.
뭐 어쨌거나,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고 익숙해지는 과정은 필요하니까··· 굳이 강하게 말리지는 않는다.
뭐 나중에 팔게 되더라도 중고가가 가장 높은 무기니까 말이다.
그렇게 신규 지빌링엔 반연대는 창병 총병 할 것 없이 든든한 보조 무기를 지급받았다.
전쟁터의 한 복판에서 새로운 무기를 지급받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새로운 전장으로 출격.
모두가 알았고, 이해했으며 각오했다. 일부러 경쟁을 뚫고 여기까지 온 이상 겁을 내는 것도 모순되는 일이다.
그래서 바로 다음 날 아침, 이동 명령이 내려왔을 때 모두가 환호했다. 당연히 긴장하고 걱정도 했으나 환호 자체는 진짜였다.
그런데··· 그 명령은 전장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북쪽의 사령부가 있는 아우페브라즈 마을로 향하라는 내용이었다.
아룬하비크를 둘러싼 남부 전선에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북부 전선의 주력군을 증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장교들은 더 큰 전투를 위해 예비대 역할을 하러 가는 것이라고 힘을 내라 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다소 침울한 분위기가 되었다.
어쩌면 이번 전투가 끝날 때까지 대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
숙련병들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나름 조용히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했지만, 징집병도 아니고 용병에게 참전 기회가 없다는 것은 충분히 걱정될만한 일이었다.
용병에게는, 아니 용병이 아니라도 자신들의 역할과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고용된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동안 사령부 거점으로서, 항시 최소 1만 이상의 병력이 머물렀던 아우페브라즈는 지금은 적막하다.
소수의 보급부대와 경비대를 빼면 모두가 각자의 전장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800명의 지빌링엔 반연대는 그렇게 텅 비어버린 아우페브라즈에서 한참동안 머물렀다.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을 들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출격 명령이 내려왔다.
이번에는 진짜였다.
“곧 출발한다! 각 중대장은 보고를 서두르도록!”
연대장 대리, 울리히 헨텔이 부하들을 재촉한다.
“완료되었습니다.”
“자, 출발하자! 콘도티에레께서 기다리신다!”
비록 1개 연대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사기만은 누구보다 높은 지빌링엔 반연대가 북쪽으로 행군을 시작한다.
그들의 첫 전장, 슈뵈켄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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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레스티나, 더 필요한 것 있나?”
“네에, 화약이 부족하네요 콘도티에레?”
“으음··· 그럼 일단 아룬하비크 수비대에서 화약을 양도받고, 그래도 모자란 것은 아우페브라즈의 병참 창고에 요청에서 보충받도록 해야겠네.”
“네에, 콘도티에레!”
정신이 없다. 아룬하비크 남쪽 숲에서 벌어진 전투의 전장 정비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전장 반대편인 슈뵈켄으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왕 다고베르 2세는 ‘좌익군 위험’ 이라는 전령을 보내왔다.
말 그대로 좌측, 슈뵈켄 부근의 전장이 위험하다는 것이겠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북부 전선 좌측은 위험하지 않을 수가 없는 전장이다.
기만책으로 배치되어 있던 기병 대군의 주력을 몽땅 전장 반대편으로 빼돌리고, 소수에 불과한 나머지 전력으로 시간을 끄는 극단적인 상황이니까.
보병, 기병, 포병의 적절한 협력이 말이 좋지, 결국은 정면대결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버티기 위한 기책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전령이 온 것을 보면, 이제 그 정도 기책으로는 대책이 없을 정도의 상황이라는 것이겠다.
“북부전선 좌측이 위험하다는 것은··· 나머지 전선도 쉽지는 않다는 것이겠지.”
“네에··· 아마도요, 콘도티에레.”
첼레스티나 역시 어두운 표정으로 내 말에 동의한다.
만약 전투가 계획대로 잘 풀렸다면, 기병 대군이 전장을 이동해 적 측면에 통렬한 기습 공격을 날린 시점에서 전황이 확 기울었어야 했다.
적 측익이 무너지고, 반신불수가 되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사이 전열을 재정비한 기병 대군이 그 충격력을 다른 적에게 투사하는 것이 전술의 핵심이었으니까.
하지만 전황은 그렇게 돌아가지 못했고, 마침내 국왕으로부터 지원 요청이 들어오고야 말았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정기 연락때 전령들이 가져다 주는 단편적인 정리 정보만으로 북부 전선의 확실한 상황을 알기는 어려웠다.
다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정보로 봐서는, 중기병 기습 돌격으로 붕괴 상태에 빠졌어야 할 그룬발트 좌익군이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
적 좌익군이 생각보다 많고 강했을까?
혹은 적 중앙군의 압박이 생각보다 심해서 기만책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을까?
적에게 전술을 미리 읽혔을까?
전쟁터에서 작전이 어그러지는 경우의 수야 한도 끝도 없이 많았다.
아니, 애초에 작전은 초동 단계부터 무조건 어그러지기 시작한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적군도 대응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그리고 아군 역시 몰랐던 정보가 게속 확인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극단적으로 말하면, 작전이란 예정대로 돌아가는 경우가 오히려 신기한 경우라 할 수 있으며, 보통은 그 어그러진 작전을 어떻게 바로잡느냐가 지휘관의 역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좌익군 붕괴’가 아니라 ‘좌익군 위험’이라는 것부터가 극단적으로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적이 ‘최소한’ 1.5배는 유리한 전장이니까··· 비슷한 수준의 전력으로 시작한 싸움이라고 해도 어느새 밀리기 시작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아무튼 이런 상황은 미리 예상한 것이기에, 간신히 예비대랍시고 확보해 두었던 병력들에 출동 명령을 내렸거나, 내릴 참이다.
우선 아우페브라즈에 머물던 지빌링엔 반연대는 슈뵈켄으로 직행하도록 명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막 아룬하비크 남쪽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를 재편성하는 것도 북쪽으로 이끌고 갈 병력을 차출하기 위해서였다.
속도가 문제였다. 어떤 부대도 두 곳의 전장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
전투 사이에 시간차를 두고, 돌려 쓸 수 있는 병력은 최대한 돌려쓰지 않으면 안된다.
전장이 넓고 아군은 적다. 우리는 계획대로 최대한 내선의 이점을 살려 적 예상보다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질 수 밖에 없는 전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럼, 티테니아 경의 기병에 제 32 반연대의 용기병들을 추가하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카렐 경 휘하의 예비대를 합치면 그럭저럭··· 얼마나 되지?”
“네에, 콘도티에레. 700기에서 800기 정도는 확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오.”
“빠듯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 확보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네.”
반나절을 내내 숲속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숨바꼭질을 하며 적을 격파한 병력들은 상당히 지쳐 있었다.
어느정도 휴식을 주지 않으면 전장 반대편으로의 강행군을 견디기는 어려웠다. 사기가 아무리 높더라도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니까.
게다가 아직 전선이 팽팽하다고 가정한다면 이 정도의 충격 병력이 전장에 새로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실릴 것이며, 보병 전력은 좀 천천히 도착하더라도 문제는 없으리라.
어떻게든 병력을 빠듯하게 운용했던 것도 다 이런 때를 위해서였다. 다행히, 아룬하비크도 그렇고 브레세른도 크게 위기를 겪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니까.
“그럼 리타르몽 참모에게 아룬하비크를 잘 부탁한다고 전달···.”
“콘도티에레, 리타르몽 경이 전령을 보내왔어요!”
“뭐? 무슨 내용인데?”
···보통은 이럴 때는 좋은 소식인 경우가 없는데 말이다. 종이를 펼치던 첼레스티나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는다.
“남쪽에서··· 숲 속을 통해서 새로운 병력이 나타났다고 하네요오···.”
낭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