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9.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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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엉!
쉬이이익, 퍼걱!
포구를 떠난 포탄이 위험천만하게도 난전 속을 뚫고 날아간다. 한참이나, 아무것도 명중하지 않고.
“흐윽!”
“컥!”
서로 창대를 겨누고 힘싸움을 하던 그룬발트 보병과 엘랑키아 기병이 동시에 포탄에 꿰뚫린다.
정확히는 그룬발트 보병의 배갑을 뚫고 몸속에 박힌 포탄이, 마주한 엘랑키아 기병을 때려 말에서 떨어지게 만든 것이다.
당연히 그룬발트 보병은 그대로 즉사하여 축 늘어졌고, 그 위력에 밀쳐진 엘랑키아 기병도 충격이 큰지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이이잇! 하이앗!”
그 모습을 본 또 다른 그룬발트 병사가 기합인지 비명인지 모를 괴성을 지르며 바닥에 떨어진 엘랑키아 기병을 연거푸 찌른다.
간접적으로 포탄의 에너지에 얻어 맞은 데다가, 심하게 부딪쳐서 정신이 없는 기사였으나, 얼굴을 제외하면 갑주로 보호받고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며 저항한다.
가슴을 발로 밟으며 마구 찔러대는 그룬발트 보병은 참혹한 몰골이다.
뭐에 얻어맞아 머리가 깨졌는지, 철철 흘러내리는 피로 머리카락이 완전히 젖어 있었으며 매끈한 철제 흉갑 위로 작은 개울을 이룰 정도였다.
어떤 전투를 겪었는지 모르나, 이미 피와 기름으로 더럽혀지고 이빨이 몇 군데 나간 장검으로 집요하게 기사의 얼굴을 찌르려 한다.
“하으앗! 죽어! 죽어어엇!”
기묘한 괴성을 지르면서 말이다. 하지만 좀처럼 생각대로 되지 않자, 검을 짧게 잡고 마구 찌른다.
날 부분을 잡은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나와 사방으로 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낙마한 기사를 죽이기 위해 찌르고 또 찌를 뿐이다.
퍼석!
결국 그 광기의 몸놀림은 접근한 다른 엘랑키아 기사의 일격에 끝났다.
피에 젖은 머리카락이 붙은 시뻘건 덩어리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면서, 자기파괴적인 공격을 거듭하던 병사가 천천히 무릎을 꿇더니 고개를 떨구고 움직이지 않는다.
난데없이 봉변에 당했던 기사가 간신히 그 시체를 밀치고 기어 나온다. 이마와 코에서 피가 줄줄 흐르지만 치명상은 아닌 모양이다.
기사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는 전장을 살핀다.
동료 기사들은 자신과 충돌했던 적의 방어선을 밀어버리고 이미 저 앞까지 달려나가있었다.
그룬발트 보병들의 방어선은 끈질기기는 했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엘랑키아 기사들의 가공할 돌격은 그룬발트 군의 방어시도를 순식간에 분쇄하고, 얕은 방어선을 걷어버리며 적진으로 파고들고 또 파고들었다.
아마도 그를 때렸던 포탄을 쏜 적의 포대 역시, 치열한 백병전의 와중에 휩쓸려 버렸을지도 모른다.
실수로 아군을 맞춰 버린 것인지, 아니면 아군이 맞아도 상관 없다는 식으로 쏜 것인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더는 쏘고 싶어도 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기사는 피를 대충 닦더니 주변을 둘러본다. 자신의 말을 찾을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주변에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도 시체는 보이지 않는다. 놀라서 도망갔거나 돌격하는 동료 군마들을 따라 주인을 놓고 뛰쳐나갔겠지.
어릴때부터 주의깊게 선발되고 훈련한 군마는 충성스럽고 용감하지만 잘 놀라고 기세에도 잘 휘둘린다.
기사는 더 군마를 찾아보거나 상처를 지혈하는 대신, 허리에서 검을 뽑아든다. 그리고 허공에 몇 번 휘둘러 보더니 동료들이 밀어낸 전선을 향해
전투 중 낙마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총병을 상대하든 창병을 상대하든, 언제나 군마들이 기병보다 훨씬 많이 죽거나 다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전선에서 낙마하고도 사지 멀쩡하게 살아 남는 것은 꽤 운이 좋은 일이다.
이미 전선에는 그 기사처럼 말에서 떨어진 후에도 동료 기병들과 함께 전투를 계속하는 이들이 많았다.
주변에는 두려울 정도로 시체가 많았다.
적군이 훨씬 많지만, 아군 기사들과 군마의 시체도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기만책에 따라 전장 절반을 가로질러 반대편의 적 대열을 타격한 엘랑키아 기사대였다.
본래 전달받은 계획은 조심스럽게 전장의 위치를 바꿔버려 적을 당황시키고, 감당하지 못할 전력을 동원 적을 일시에 격파하는 것이었다.
일단 적을 밀어내고 나면, 계속해서 추격전을 하든 재집결 후 전열을 정돈해 다른 적을 공격하든 그건 지휘관들이 정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룬발트 군은 정말로 악착같이 저항해왔다. 오랫동안 국왕 폐하를 섬겨온 왕실군 선배 기사들조차 당황해 할 정도로 말이다.
분명 이기고 있다. 이기고는 있고, 적을 수도 없이 쓰러뜨리고 연대급 부대의 방어 대열도 몇 개나 밀어 버렸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어느샌가 적의 새로운 부대가 기병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전황이 예상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무심코 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돌격을 멈춰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말을 잃은 엘랑키아 왕실군 기사는 다시 한 번 힘차게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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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군···.”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 엘랑키아 우익군을 통솔하고 있던 왕실군 원수는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실언이었다.
어떤 위험에 처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노장일지라도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 전황에서 걱정 정도는 한다.
하지만 이를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하지만 그런 노장의 마음을 생각해서인지, 정말 듣지 못한것인지, 주변의 참모들은 바쁘게 자기 일을 하느라 신경쓰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노장이 이런 실수를 할 정도로, 전투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본래 우익군으로서 호펜로이테를 지키고 있던 병력의 절반 이상은 수세에 몰린 적 좌익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당연히 측면에서 날아온 기병 대군의 지원을 받아서 말이다.
“이렇게··· 이렇게까지 싸워서 남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노장 프레니히 백작은 또다시 탄식에 가까운 한마디를 했다. 이번에는 실언은 아니었다.
그 역시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며, 하급 귀족 가문의 일개 무장병에서 왕실군 원수까지 오른 인물이다.
때로는 승리를 위해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말이다. 설령 자신의 목숨을 걸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북부 전선 우측 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혈전은 그런 ‘구실’을 대기에 민망할 정도로 끔찍한 전투였다.
어째서 병력을 후퇴시키지 않는가?
어느 정도의 전술적 진퇴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특히 한쪽이 접전에서 분명한 우세를 점한 것이 확실하다면, 명백하 불리한 쪽이 전선을 물리는 것은 말하자면 ‘암묵적 규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결코 전투 자체의 패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엽적인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일보 후퇴를 할 뿐이며, 이후 전투 전개를 통해 얼마든지 역전할 수 있다.
오히려 전장의 다른 부분에서 아군이 활약해 진짜로 역전할 수 있는 상황이 갖추어 졌을 때, 모루 역할도 못할 정도로 전선이 피폐해져 있다면 역전의 기회조차 날리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런데 지금 그룬발트 군의 행동은 말 그대로 ‘부하들을 갈아 넣으면서’ 버티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기고 있는 엘랑키아 군이 병력을 뺄 수도 없는 일이다! 심지어 전력면에서나 교전 비율에서나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다.
전장에 계속해서 쌓인 긴장과 부하, 일선 장병들의 분노와 짜증이 한계까지 이른 치열한 접전은 자연스럽게 참혹해지고 있었다.
특히 용병끼리의 전투라면, 이 ‘전진과 후퇴의 암묵적 규칙’이 잘 지켜지게 마련이다.
용병단장들에게 휘하 병력이란 자산이나 다름 없었으며, 목표는 성공적인 전투 및 승리였지 적을 많이 죽이는 것 따위는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령 적이라고 해도 많은 사상자를 내는 것은 불길한 일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프레니히 백작은 용병은 아니지만 이런 규칙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지휘관은 언제나 그 타이밍을 잘 알아야 하며, 적절한 타이밍에 병력을 물리면 전술적 피해는 입을지라도 전략적 패배는 피할 수 있으니까.
절대로 질 것 같으면 도망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무리해서 버티느니 조금 물러나서 병력을 온존하고 승리를 위해 노력하라는 이야기이다.
이번 전쟁의 목표는 그룬발트의 전쟁 수행능력, 즉 군대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라고 다고베르 2세 폐하와, 트랑카벨의 에트 경이 진지하게 이야기 했었지.
허나 그 방식은 철저한 전장의 승리로 적을 포위섬멸하며, 대량의 포로를 잡아 사회적, 경제적으로 몰락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처럼 문자 그대로 전장에서 시체로 산을 쌓는 형태의 ‘파괴’를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전장을 가득 채우고, 적 전선을 조금씩 깨뜨려 가는 엘랑키아 기사대를 바라본다.
프레니히 백작 자신도 그 일원이기도 하기에, 정말 믿음직하고 멋진 광경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은 이유 모를 섬뜩함이 조금씩 느껴지고 있었다.
“조뤼크 경은 아직인가?”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아르밀 공작님의 지휘부로 전령을 보내볼까요?”
“음, 아닐세. 때가 되면 어련히 돌아오겠지.”
현재 우익군의 부원수, 조뤼크 드 브라셀노 자작은 기병 대군을 이끄는 아르밀 드 브라뇰 공작을 만나러 간 상황이다.
그 역시, 이대로 소모전을 계속하는 것은 상황상 좋지 않다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유리함이 계속되는 것은 당연하고, 결과적으로 적 좌익군이 파멸하는 것도 거의 확실한 일이지만···.
우익군의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고, 그게 전장 전체와 엘랑키아 군에게도 유리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기병대는 상황을 정리하고 진작에 다음 목표를 찾았어야 하는 상황이니까.
적은 몇만 명의 병력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프레니히와 아르밀, 두 원수가 이끄는 엘랑키아 군의 양익을 이곳에 묶어놓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적의 의도를 파악해 여기 대응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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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군의 프레니히 백작이 걱정하고 있는 동안, 실제로 엘랑키아 군의 중앙군과 좌익군에는 부담이 쌓여가고 있었다.
당장 전황으로 보면 쉽게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방금 막, 새로운 충격력으로 예비 근위대를 투입한 엘랑키아 군의 중앙은 우위를 굳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긴 힘싸움으로 서서히 지쳐가고 있던 양측인데, 한쪽에만 힘이 넘치는 정예 병력이 소수나마 투입되었다는 것은 결정적이었다.
종심이 깊은 공격 대형으로 투입된 근위 보병들은 그룬발트 보병 연대 하나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그들이 지키던 영역으로 엘랑키아 보병들이 진군해 들어갔으며, 거미떼처럼 흩어진 반수의 적 보병들은 아군의 재집결을 방해하며 사방으로 도망쳤다.
아직 질서를 잃지 않은 나머지 반수도 서둘러 후속 연대에게 자리를 내주고 재편성을 위해 퇴각했다.
엄청난 공방이 거듭되는 양익과 달리, 오히려 큰 변경점 없이 힘싸움만 반복하고 있던 중앙 끼리의 싸움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변수였다.
그리고 좌익군의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있던 디타레 드 카울의 유격대는 여전히 잘 버티고 있다.
몇 배나 되는 그룬발트 군 보병을, 몇 개 연대나 되는 그들을 여전히 농락하고 괴롭히며 견제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총사령관, 국왕 다고베르 2세의 표정은 어둡다.
개인이 눈으로 전체를 살필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전장에서, 파편적인 보고만 받았음에도 그의 제법 명석한 두뇌는 전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우익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계획했던 기동전은 한참동안 불가능한 상황.
중앙군도 제법 우세하지만, 적을 붕괴시키고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올 정도는 절대 아닌 상황.
좌익군은 지금까지는 잘 싸우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얼마 안되는 유격대와 벼락치기로 보강한 슈뵈켄 수비대의 분전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
역설적이게도, 엘랑키아 기사대가 적 좌익군을 격멸하고 중앙군을 돕는 것 보다, 디타레 경의 방해를 뚫은 그룬발트 우익 보병이 중앙군의 전투에 개입하는 것이 빠르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는 단순히 기동성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 문제이다.
하지만 이미 예비대는 ‘대부분’ 투입했다. 자기 역할을 확실하고 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병력을 모두 투입한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통해 팽팽하던 중앙 전선의 균형이 깨졌으며, 적에게 남은 시간을 착실하게 줄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군에게 남은 시간이 더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었지만.
“에트 경에게, 호펜로이테로 전령이 출발한지 얼마나 되었지?”
“20분이 조금 넘었습니다, 폐하. 조금 있으면 25분이 됩니다.”
정기 보고 전령은 30분마다 출발하게 되어 있었다. 하필이면, 이런 정보의 공백기에.
“곧바로 새 전령을 보내게. 내용은, 좌익군 위험! 이상이네.”
“옛! 좌익군 위험, 더 보내실 내용은 없으십니까?”
“거기 더해서··· 음, 아니, 아닐세. 좌익군 위험. 그것으로 끝이야.”
“옛, 폐하! 곧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중앙군도 위험하다고 보내려고 하였으나··· 그만두기로 했다.
그것이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지, ‘좌익군 위험’ 만으로 에트 경에게는 충분한 전달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디타레 경을 도와야겠군. 적군이 너무 많고, 그들에게는 짐이 무겁다.”
“옛? 폐, 폐하, 하지만 예비대는 전부···.”
“마지막 예비대는 여기 있네. 왕국 제일가는 기사가 이끄는 정예부대가 말이지.”
“폐··· 하?”
“엘랑키아의 제일기사는 언제나 국왕이었으니까.”
다고베르 2세의 씨익 웃는 얼굴을 보며, 호위대장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