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8.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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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걱정이 되어 북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내가 담당한 영역은 전장의 다른 남쪽 절반이니,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둔 만큼 신경쓰지 않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당장 내가 맡은 역할이 있고 내 지휘아래 적과 싸우며 목숨을 거는 부하들이 있는데, 딴 생각을 하는 것은 안될 일이니까.
게다가 북부 전선의 사령관은 무려 국왕 다고베르 2세 폐하이고, 각자 역할을 맡은 중견 지휘관과 참모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계속 신경 쓰는 건 대놓고 ‘너희는 못 믿겠다’ 라고 하는 꼴이라 조심스러운 점도 있고 말이다.
단일 군주의 군대가 아니라, 여러 군세가 모여 협력하는 연합군의 경우 이게 생각보다 큰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에이, 내가 맡은 일이나 완벽하게 하고 남 걱정을 하든 말든 해야지. 그게 맞는 법이다.
···라고 원론적으로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걸 어떻게 하느냔 말이다.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말 위에서 몸을 뒤틀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첼레스티나가 무슨 일인가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콘도티에레, 무언가 걱정 되시는 게 있으신가요오?”
“음? 아니, 아니야. 그냥 잠깐··· 딴 생각을 좀 했어.”
“네에··· 콘도티에레, 북부 전선이 걱정되시는 건가요?”
“그야 뭐··· 그렇지.”
역시 오래 함께 지낸 눈치 백단 첼레스티나한테 속마음을 숨긴다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다.
게다가 첼레스티나는 보기보다··· 가 아니라 애초에 만명 단위 대군의 참모 역할도 문제없이 할 만큼 전술 식견도 훌륭한 사람이니까.
아마 그녀 자신도 머리속에 나름의 전황도는 그려보고 있을 것이다. 슈뵈켄의 포병 진지 공사를 돕기도 했었으니···.
“엘리스토프 경의 부대가 돌격, 아니 추격을 시작했다는 보 고가 들어왔어요! 예상대로 적군은 ‘아주 얇은 대열에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콘도티에레!”
“그래··· 뭐 뻔한 일이지. 그룬발트 군은 계속 정면에 우리가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굳이 핑계를 좀 대보자면, 지금 내가 맡고 있는 남부 전선, 특히 아룬하비크 부근에서의 전투가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룬발트 군 별동대가 가볍게 무장하고 아룬하비크 남쪽의 숲을 우회하려 한다는 정보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정보를 바탕으로 병력을 매복시키고, 오히려 선공을 걸었다.
그렇게 숲속에서 벌어진 숨바꼭질 형식의 전투는, 당연히 미리 준비하고 있던 아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보병간의 전투에서, 아군은 적절하게 반은 싸우고 반은 물러서며 적을 끌어들였고 숲 속에서 지휘체계를 잃어버린 적의 대열은 늘어졌다.
그 후방을 숲속 깊은 곳에서 대기하던 엘리스토프 마르크릭 연대장이 이끄는 제32 델레망드 정찰 반연대의 추격기병들이 들이쳐 버린 것이다!
적 입장에서는 기가 막힌 일이겠지.
자신들이 지나 왔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한 방향에서, 그것도 기병들이 우르르 나타나 불의의 일격을 가해왔으니 말이다.
숲속에서 기병이 기동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고, 보병 입장에서 대기병 전투를 벌이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나무 몇 그루만 쓰러뜨려 가로로 걸쳐 놓아도 적어도 기병의 충격력이 상당부분 상실되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면 거추장스러운 장창 밀집 대형 없이도 기병을 견제할 수 있을 정도니까. 군인 뿐 아니라, 일반인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상식’이다.
누구나 아는 ‘상식’일 정도니까, 그걸 저질러 버리면 놀라움도 두 배가 된다.
다행히도 폴름스 남부 숲은 수종이 균일하고 조성된지 오래된지라 나무들의 키가 컸으며, 트랑카벨의 추격기병대를 이끄는 장교들은 몽세나의 산악지대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숲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키는 작지만 강인한 말에 타고 끝까지 쫓아오는 기병대의 존재는 엄청난 충격을 일으켰을 것이다.
게다가 숲속이라 정확한 적의 숫자도 알 수 없으니··· 느슨한 행군 경계 대형으로는 막지 못했으리라.
아직 확실한 보고가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숲속을 통과해 오고 있던 적의 별동대는 이미 붕괴 상태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숨바꼭질을 계속하며 소탕전을 진행할지, 적을 흩어 버린 것에 만족하여 병력을 뺄지 인데···.
“다른 보고는 없어? 브레세른은 어떻지?”
“네에, 특별한 보고는 없어요, 콘도티에레. 아침에 온 전투 개시 연락이 마지막이네요!”
“흐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아마도, 네에, 그렇지 않을까요오?”
대화를 많이 나눠본 상대는 아니었지만, 브레세른을 지키고 있는 루제 드 제브레도뉴 공작은 불리한 상황이 되면 자존심이나 강한 척 때문에 그 사실을 숨길 사람은 아니다.
전형적인 엘랑키아의 군사 귀족이라기 보단 용병단장에 가까운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피투성이 영광보다는 안전한 효율을 따른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루제 공작이 특별한 요구를 하지 않고 있다는 건 정말로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고 있다 판단해도 되겠지 싶었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자면, 그룬발트 군이 브레세른과 아룬하비크 사이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해 전령을 보내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경우이겠으나···.
아직 적은 두 마을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도 장악하지 못한 상황이니, 우회하는 전령까지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첼레스티나, 혹시 모르니 브레세른의 루제 공작에게 전령을 보내줘. 내용은 평범하게 아룬하비크 주변 전투의 경과 보고면 되겠어.”
“네에, 콘도티에레! 그럼 전령이 돌아올 때 브레세른 주변의 전황을 파악해서 오겠네요?”
“바로 그거지.”
고맙게도 첼레스티나는 단번에 내 생각을 알아차려주었다.
그리고 어차피, 주력 병력의 상당수를 북부 전선에 내준 것은 아군만큼이나 적군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서로 힘이 빠진 상태에서 갑자기 전선이 밀리거나 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남부 전선의 적의 활동이 눈에 띄게 약해진 만큼, 북부 전선의 결전부대가 걱정이 되는데···.
으으, 무슨 생각을 하다가도 결말은 북부 전선 걱정에 이르게 되는구나.
타타탕! 타탕!
숲속에서 총성이 좀 더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적군이 좀 더 다가오고, 전장이 가까워졌다는 말이다.
물론 적이 다가온 이유가 명확한 공격 의사를 가지고 진격해온 것이느냐, 엘리스토프 연대장의 부대에게 공격당해 밀려난 것이느냐에 따라 천지차이긴 하겠지만.
아마 후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긴 한다.
지휘부 주변에는 예비대로 배치된 카렐 드 상포리앙 경의 중기병대, 티테니아 드 몽파르지에 경의 경기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지휘부에 함께 머물고 있는 티테니아는 예쁘장한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조용히 지휘부가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엘리스토프 경의 추격기병들의 역할을 본인이 맡고 싶어했다.
하지만, 드 몽파르지에 가문이 보내준 기병대는 무장만 좀 가볍다 뿐이지 중기병과 비교해도 손색 없는 훌륭한 전투부대였다.
게다가 산악지대나 삼림지대에서 활동한 경험이 없는 키가 큰 말을 탄 기병은 숲에서 활약하기가 까다로울 테니 말이다.
각자에게 맞는 역할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아쉬운 모양이었다.
통상적으로 전장에서 기병에게 기대받는 가장 큰 요소는 ‘기동성’이다.
두 발로 걸어다니는 인간에 비해 더욱 중무장을 하고도 훨씬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니 말이다.
특히나 빠르게 전장과 주둔지, 도시를 오가는 전령들을 보았던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도 많은 경우 기병, 특히 중기병의 위력은 기동성에서 오는 충격력에서 발휘된다.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돌격 속도가 빨라서 더 큰 충격을 준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돌격시 속력과 육중한 군마의 무게도 중요한 요소이기야 하겠지만, 더 높은 단계의 전술적 우위가 존재한다.
보병에 비해서 훨씬 우월한 속도와 시야로 전장을 이동하며, 상대가 취약한 지점을 노린다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충돌하는 순간 싸움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보병에 비해 우월하게 높은 위치, 정면에선 화약 무기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상대가 불가능할 정도의 중무장 따위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말이다.
엘랑키아 왕실군 기사들은 그런 점에서 완벽한 기병대의 자질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기사들로 이루어진 중기병 집단에는 통상 좋은 집안 출신들이 모이기 쉽다.
어릴 때부터 말에 익숙해야 하고, 질 좋은 군마와 갑주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가문 출신이 아니면 중기병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애초에 기사라는 용어가 하급 귀족 이상의 지위를 가진 사회적 계급과, 전통적 중장기병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가진 까닭이 있다.
이는 엘랑키아도 마찬가지이지만, 엄격한 실력 본위 집단인 왕실군 기사대, 더 나아가 그 핵심 전력인 근위기병대는 조금 다른 특징을 가진다.
설령 귀족의 반열에 이르지 못하거나, 군마와 갑주를 살 만큼 부유하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기량을 증명하면 왕실로부터 무장을 지급받을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훌륭한 군마와 갑주를 갖추고 있고 대귀족 출신이라 할지라도 기량이 부족하면 근위기병대에 입대할 수 없었다.
이는 귀족 중심의 중기병 부대가 겪기 쉬운, ‘개개인은 강하지만 집단으로서 응집력은 떨어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즉, 적어도 왕실군의 일원으로 전장에 나서는 엘랑키아 기사들은 최강의 기마 전사일 뿐 아니라, 부대 일원으로 싸우는 데 익숙한 군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런 강력한 중기병 전력을 갖춘 엘랑키아 군은 엄청난 강점을 가진다.
나 역시 트랑카벨 가문의 대리 사령관으로서 기병 양성에 큰 노력을 기울인 편이지만··· 엘랑키아 본토의 기사대는 도저히 못 당한다 생각한다.
샹다메리 전투에서도 정면 대결은 극구 피하려고 했었고 말이다.
그러니, 현재의 압도적인 병력 열세를 뒤집으려면 기병대의 활약 말고는 답이 없었다.
내가 건의한, 일단 한쪽 측면에 기병 주력을 몽땅 모아놓고, 실제로는 전장 반대편으로 기동하는 기만책 역시 그걸 전제로 한 전술이니까.
아마 북부 전선에서는 수적으로 2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 1.5배에서 가까이 되는 적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그런 만큼 ‘엘랑키아 기사’들이 전장을 흔들어주지 않으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좌충우돌 전장을 뛰어 다니면서, 적어도 중앙, 좌, 우의 삼군 중 2개 군 이상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만약에 적에게 냉정한 전술가가 있어서 통상적인 전술적 우위를 포기하더라도, 오로지 엘랑키아 기사대를 고착시키는 전술을 사용한다면···.
그건 상황이 좀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콘도티에레! 리타르몽 참모가 전령을 보내왔어요!”
“음, 무슨 내용이지?”
“전령! 적의 절반 정도는 전열이 무너져 무리지어 도주 중이며, 나머지도 소규모로 분절되어 도주 중! 소탕전을 진행해도 될까 건의드립니다! 이상이네요오!”
“소탕전···.”
숲속에서 실질적인 전투 지휘를 맡은 리타르몽 드 당세르 참모는 역시나 완벽하게 작전을 수행한 모양이었다.
소탕전이라··· 흩어져 도망치는 적의 수를 줄이고, 포로를 확보하며, 그 마음 속에 씻어내기 힘든 공포를 주려면 끝까지 추격하는 게 낫겠지.
하지만 자꾸 찜찜한 기분이 든다. 눈 앞의 작은 승리에 만족해서 섬멸전에 들어가도 되는 것일지.
산산히 흩어져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는 것은, 특히나 이런 시야가 제한되는 숲속에서는 작전을 수행한 아군 부대를 다시 수습하는 것도 큰 일이 된다.
게다가 이쪽도 체력 소모와 병력 피해가 없을 수는 없으니, 휴식과 재편성 없이는 전투력을 일시적으로 상실한다고 해도 좋겠지.
지금은 작은 적에 대한 섬멸에 기뻐할 때는 아니다. 나는 결심을 굳혔다.
“소탕전은 포기하자. 추격은 기병에게 맡기고, 보병은 적의 붕괴를 확인했다면 일단 다시 전열을 정돈하고, 그 위치에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라고 전해줘.”
“네에, 콘도티에레!”
숲속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싸운 것은 좋았고, 이긴 것도 좋았지만 병력 수습해서 물러서는 것도 큰 일이다.
실제로 소부대가 연락을 받지 못하고 숲 속에서 며칠이나 방치되는 등의 일이 자주 벌어질 정도니까···.
그리고 이 전장에 적이 별 것 없다는 것은, 있어야할 병력이 다른 전장에 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신을 낼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은 전력을 최대한 유지하도록 하자. 유리한 만큼 힘을 아끼며 다른 전장의 요청에 대응해야 할 때가 올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