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7. 폴름스 전투, 셋째 날
자신을 노리는 적 기사와 눈이 마주친다.
투구 아래로 드러난 비틀린 비웃음이 속을 긁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마치 ‘그래서 네 놈이 뭘 할 수 있는데?’라고 묻는 듯한 웃음.
하늘에 맹세코, 지금 야로스의 손에 장창이 있었다면, 곧바로 찔러서 저 미소가 일그러지는 꼴을 봤을 것이다.
야로스는 나름 슈토르히 연대의 창병 소대장이었으며, 중대 내에서도 서열이 꽤 높은 인정받는 장창의 명수였으니까!
그랬거나 말거나, 지금은 두 번째 권총을 안장에서 뽑아드는 ‘압도적 강자’의 모습을 보며 절망감을 느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무심코 칼도 집어 던질까 하다가 말았다. 어차피 맞지도 않을 테고, 이 경우 기스 정도는 낼 수 있겠지만.
차라리 방벽을 넘어 달려들까, 아얘 방벽 아래로 숨을까, 별 생각이 다 든다.
하지만 이쪽에서 방벽을 넘어 달려들다가는 다른 기사에게 저지당할 것이며, 오히려 거리만 좁혀 명중률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
혼자 방벽 아래로 숨는다면 저 자식은 분명 다른 아군을 노릴 것이다.
그러는 대신, 야로스는 좌반신을 앞으로 내밀고 턱을 어깨에 바짝 붙인다. 검은 정면을 겨누고 상체를 숙여 표적을 최대한 줄인다.
적이 보기에 정면으로 선 것에 비해 표적의 넓이가 절반 가까이 줄어들 것이다.
머리에 맞으면 끝장이지만, 치명상을 입기 쉬운 몸통을 보호할 수 있다. 근육과 뼈로 보호되는 어깨나 팔뚝에 맞는다면 왼팔을 잃는 정도로 끝날 가능성도 높았다.
공포와 분노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기가 막히지만 용병 시절에 배운대로 몸이 움직인다.
적절하게 굽힌 양쪽 무릎은 만약에라도 총알이 빗나가거나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을 때 뛰쳐나갈 힘을 잔뜩 비축한다.
머리속으로는 총알이 빗나갔을 때, 그대로 달려들어 적을 낙마시키고 투구의 틈에 검을 꽂아 비트는 상상을 무한히 반복한다.
‘무력한 표적’이 도망치기는 커녕, 기묘한 자세로 이쪽을 노려보자 적 기사는 기분이 상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더욱 신중하게 이쪽으로 권총을 겨눈다. 머리속에서 온갖 최악의 상상이 흘러간다.
땀이 줄줄 흐르고, 지금이라도 바닥에 납작 엎드릴까 하는 충동이 치솟는다.
시팔, 빌어먹을! 나도 총이 있었으면, 창이 있었으면 저 따위 놈 한 방에!
그러거나 말거나 권총의 시커먼 총구가 눈에 들어오자 공포가 엄습한다. 무릎이 부들부들 떨리며 차라리 눈을 감고 싶어진다.
어쩌면 사형수의 눈을 가리는 것은 생각보다 훌륭한 마지막 복지가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야로스는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적의 투구 아래 얼굴에 뜻모를 기묘한 표정이 어린다.
그리고 그 직후, 권총을 쥔 적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 질끈 눈을 감아버린다.
겁쟁이처럼.
타아앙!
총성이 귓가를 때린다. 눈 앞이 핑핑 도는 것 같고, 머리와 어깨, 심장과 허벅지가 동시에 욱신거린다.
맞았나? 총에 맞았나? 빗나갔나? 치명상인가?
눈을 뜨면 사실 나는 바닥에 엎어져서 내가 흘린 피를 들이마시며 죽는 게 아닐까?
“으우아아앗! 시파아알!”
겁쟁이 소시민의 뇌가 바쁘게 돌아가는 사이, 능숙한 전사의 몸은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뛰쳐 나간 것이다.
총에 맞았다면, 답도 없는 치명상이라면 몸이 안 움직이겠지, 그러니까 굳이 맞았는지 상처를 확인할 필요도 없다.
이 따위 생각을 하며 방벽을 타넘기 위해 한 손을 나무 위에 올린다. 하지만 뒤늦게 뜬 눈에 들어온 것은 생각했던 광경이 아니었다.
“으아아아! 으아, 으···?”
자신에게 권총을 발사했어야 할 적 기사의 상체가 흔들리더니, 벌러덩 뒤로 넘어가 버린다. 그 와중에도 공들여 땋은 비단 띠 장식이 아름다운 호를 그린다.
생각해보니 총소리는 앞이 아니라 뒤에서 들렸다.
어안이 벙벙하여 뒤를 돌아보니, 포대 안쪽에 낯선 총병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 선두에 선 총병이 야로스의 너머를 겨누고 있었고, 총구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누군지는 몰라도 이 총병이 자신을 구해줬다.
아마 마지막으로 보았던 적의 기묘한 표정은 적, 즉 야로스가 속한 포대에 지원군이 도착한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가, 감사합니다!”
“늦지 않아 다행이군요.”
총병들은 우르르 몰려와서는 방벽 근처에 자리를 잡고 선다.
포수들이 놀라서 황급히 화약통에 뚜껑을 닫는 게 보인다.
격발시에 총구와 점화구에서 대량의 불꽃이 연기와 함께 뿜어져 나오며, 조용히 타고 있는 화승에서도 불똥이 떨어질 수 있는 게 화승총병이다.
그런데 여기는 포병 진지, 그 어떤 병과보다도 대량으로 화약을 사용하는 장소이며 화약을 방수포로 감쌀 수도 없는 곳이다.
그래서 작은 실수나 방심으로도 대폭발이 발생할 수 있어, 총병의 포병 진지 진입은 엄격하게 금지된다.
하지만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총병들에게 감사하지 않는 포병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야로스도 마찬가지였다.
타타탕! 타앙!
총병들은 방벽 너머에서 접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기사들에게 사격을 가해 쫓아버린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서 재장전하시지요. 우리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릅니다. 여긴 적의 공세가 뜸한 편이지만요.”
“뜸한 편이라니···.”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야로스는 주변을 둘러본다.
여지껏 주변을 살피지 못했지만, 포병 진지 외곽쪽은 개미떼처럼 달라붙은 그룬발트 기사들과 수비대의 전투로 엉망이었다.
오히려 야로스가 속한 포대는 모서리 쪽이라 방어시설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사들의 습격이 덜 한 모양이었다.
확실한 것은, 포병 진지 자체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모두가 몰살당할 것이다. 슈뵈켄 마을로 도망쳐 들어갈 수도 없다. 어차피 거기도 전투로 개판일 테니.
든든한 지원군이 왔으나 해야 할 일이 바뀌지는 않았다. 야로스는 찬찬히 아군 전력을 살핀다.
여전히 부지런히 재장전 중인 포병들 외에 포대로 돌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중간하게 서 있는 포수들.
그리고 새로 도착한 다섯 명의 총병들.
강인해 보이지만 선한 인상이다. 분명히 갑작스럽게 배치되었을 텐데, 물 흐르듯 대응하고서는 묵묵히 총구로 꽂을대를 밀어 넣는 모습이다.
어쩐지 슈토르히 시절 함께했던 총병 동료들의 분위기가 생각난다. 분명 사선을 몇 번이나 넘었던 베테랑 사수들이 분명하겠지.
그러고보니 이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슈뵈켄 부근에서 전개된 전투 초반에, 아군 경기병대 사이에 섞여 배치되어 기습적으로 적의 돌격을 막아냈던 소수 정예 총병들일 것이다.
그러고보니 수백 명은 되어 보이던 그들이 기병대가 떠나버린 후 어디로 갔나 싶었는데, 슈뵈켄에 대기하다 포병 진지를 도와주러 온 모양이다.
미리 계획된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여러분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저희는 트랑카벨 영지군 소속,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 소속의 선발 사수입니다.”
척 봐도 주문제작품이 분명한, 잘 닦인 청동 총열을 쑤시고 있던 총병이 대답한다.
트랑카벨이라··· 어디서 들어봤던, 분명 최근에 어딘가에서 들었던 이름인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은 구원자나 다름없었으니까.
“장전 완료!”
마침 포병대도 장전이 끝났다. 적은 불리한 지형과 격렬한 저항에 지쳤는지, 방향을 틀어 방어선이 약한 부분에 공격을 집중하고 있었다.
장전을 마치고 이 광경을 확인한 포술장과 야로스의 눈이 서로 마주친다.
아군을 도울 절호의 기회였다.
“포 돌려! 포 돌려!”
“그룬발트 놈들 옆구리에 한 방 먹여주자고!”
“자, 조심조심, 하나, 둘!”
아마 이렇게 존재감을 과시하면 이 진지도 다시 적의 목표가 되겠지만, 그걸 두려워할 겁쟁이는 여기 없었다.
혹은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지도 않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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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좌측의 상황이 불안해 보입니다. 예비대를 일부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는 참모의 간곡한 진언에 마지막으로 망설였다.
지금 그는 마지막 예비대에 공세 명령을 내리기 직전이었다.
현재 양측의 중앙군은 호각인 상황.
우익군은 원래는 불리했으나, 좌측으로부터 기습적으로 집중 투입된 대규모 기병대의 돌입으로 확실한 우위.
반대로 그렇게 알짜 병력을 대부분 빼준 좌익군은 얼마 안되는 경기병과 폴름스 방어선에서 차출한 임시변통 병력으로 간신히 버티는 상황.
이 상황에서, 다고베르 2세는 최후의 최후까지 사령부가 쥐고 있던 예비대 3개 연대를 중앙군에 투입해 호각인 전투의 무게추를 이쪽으로 이끌어 오려는 것이다.
이 거대한 전장의 중앙에서 격돌하는 대군의 규모를 보자면, 3개 연대는 그다지 결정적인 전력이 아니라 생각될지도 모른다.
허나 이 3개 연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긴 엘랑키아 왕실의 정예들이다.
베르마유 왕성의 정문과 국왕이 거처하는 왕궁을 지키는 궁정근위대를 비롯한 말 그대로 국왕 친위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전투가 계속되어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황에서, 이 생생한 정예군이 투입된다면 전장의 어느 한 국면 정도는 결정적으로 뒤집을 수 있으리라.
게다가 걱정거리였던 그룬발트 군의 예비대는 현재 대부분 소모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병력의 우세를 과시하듯, 상당한 규모로 남아있던 그들은 전장의 절반을 가로질러 반대편에 투입된 기사대의 돌격을 막기 위해 모조리 투입된 모양이다.
오래 걸렸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마침내 서로가 가진 대부분의 카드를 공개한 시점이 되었다.
그 시점에서 엘랑키아 군은 아직 패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꽤 강력한 패로 말이다.
모두가 ‘계획대로’ 였다. 여기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계획대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우선, 엘랑키아 군이 준비한 ‘회심의 일격’에 맞아 빈사상태에 빠졌으리라 생각했던 그룬발트 좌익군은 아직도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 빈사상태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감당 불가능한 대규모 기병대가 벼락처럼 꽂혀 대열은 엉망으로 어그러지고, 전체 연대의 절반 이상이 대형이나 원래 위치를 고수하지 못하고 밀려났으니까.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적은 병력을 빼지 않고 있었다.
이는 대단히 위험한 판단이다. ‘병력을 뺄 수 있을 때’ 빼지 않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전면적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불리하면 불리한대로 시간과 공간을 확보해가며 전투를 지속한다는 선택지를 스스로 버리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보고에 의하면, 대신 남은 병력은 그 자리에 사각 대형을 취하고 무조건 버티고 보자는 태도를 취했다.
이어서 중앙군에서 대량의 예비대를 보냈기 때문에 전선은 고착화 되었다.
하지만 이를 고착화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그룬발트 좌익군 지휘관 입장에서는 대열이 무너지고 일관된 지휘가 불가능한 상황에 몰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버틴다는 것은, 연대 단위로 병력을 ‘제물’로 바쳐가며 목숨을 이어가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와중에 발생하는 막대한 사상자는 안중에도 두지 않겠다는 것인지.
허나 이는 다고베르 2세 또한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원래 계획은, 기병 대군의 돌격으로 적을 붕괴시킨 후, 퇴각하면 추격을 자제하고 보병 중심으로 전열을 다시 가다듬는 것이었다.
기병 대군은 계속 기동부대로 남아 적을 위협하고, 아군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서 싸우지 않고도 전술적 우위를 확보하는 게 목적이었다.
추격전은 적 대열 전체가 서서히 무너져 전장을 벗어나려 할 때 하면 충분하다, 라는 생각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적이 물러서지 않음으로서 그룬발트 군의 시체와 혈전이라는 늪에 빠지고 만 거이다.
신성 그룬발트 제국, 더 나아가 황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자체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 한동안 엘랑키아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생각하면 나쁘지는 않다.
도망도 못가고 몰려있는 그룬발트 군을 확실하게 때려잡을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서 엘랑키아 측은 핵심 기동부대가 묶여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대로라면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측근의 조언이 옳은 것이 아닌가.
트랑카벨의 에트 경과 함께 세운 계획대로, 중앙군을 압박해 ‘승리는 커녕 전투 지속이 어렵다’ 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답이라 할 수 있는가.
예비대는 이대로 온존하다가 ‘측면을 공격하는 것이 기정사실인’ 적의 우익군을 막는 데 활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망설임이 들었다.
“...좌측의 디타레 경으로부터 다른 보고는 없는가?”
“예, 폐하. 아까 어떻게든 버텨보겠다는 보고 이후로는 아직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디타레 경을 믿어야겠지.”
“...폐하? 그러시다면···.”
“예비대는 예정대로 중앙 전선에 투입한다! 승패는 이곳에서 갈릴 것이네.”
모험 없이 승리를 얻을 수는 없다. 다고베르 2세는 불안함에 휘둘리는 대신, 신뢰하는 인물과 함께 세운 계획을 따르는 편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