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6. 폴름스 전투, 셋째 날
###
“으아아! 으아아악!”
야로스 발렌켄드는 괴성을 지르며 들고 있던 장전봉을 휘둘렀다. 한 번, 두 번.
빠가각!
“크흑!”
화포의 포구로 밀어 넣어 내부를 청소하거나 포탄을 장전하는 장전봉은 단단하고도 밀도 높은 나무로 만든다. 장전하다 부러지면 큰일이니까.
하지만 포병 진지로 넘어 오려던 말에서 내린 그룬발트 기사의 강철 투구를 연거푸 후려치자 바짝 마른 장작처럼 부러져 버린다.
머리를 호되게 얻어 맞은 그룬발트 기사는 충격이 큰 것 같았지만, 그대로 상체를 밀어 넣으며 검을 치켜든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컥, 그르르륵!”
방어 대신 공격을 선택하는 바람에 상체가 비어 버린 기사의 목을 힘껏 찌른다.
날붙이로 사람을 찌를 때와는 전혀 다른, 소름끼치는 살 덩어리를 뚫고 들어가는 감각이 느껴진다.
괴상한 소리를 내며 몸부림치던 기사가 포대 외곽에 세워 둔 흙 담긴 나무통 위에 축 늘어진다. 진득한 핏덩이가 철퍼덕 하고 바닥에 쏟아진다.
“계속 온다! 장전! 장전하라고요!”
“아, 알았네.”
흥분한 야로스가 뒤를 돌아보며 닥달하자, 당황한 듯 보였던 엘랑키아 포수들이 황급히 장전을 마무리한다.
야로스가 들고 있는 반이 부러진 데다가 적 기사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전봉 대신, 새로운 예비 장전봉이 부지런히 포구를 왕복한다.
그들은 슈뵈켄 마을의 후방에 배치된 대규모 엘랑키아 포병 진지의 한쪽 외곽 진지에 배치된 포반이었다.
지금까지는 적이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안전하게 장거리 포격으로 적을 괴롭힐 수 있었지만, 적은 갑자기 슈뵈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타타탕! 타타타타탕!
타다다당! 타탓!
마을 건너편에서도 콩 볶는 총소리가 이어지는 것으로 봐서는 마을에 주둔한 보병 연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야로스는 야로스대로 이 난국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고민한다.
본능적으로 허전한 허리춤을 더듬으며 무기를 두고 온 자신을 저주한다.
매번 무거운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고, 그걸 묵직한 장전봉으로 쑤셔 넣으며, 포격시 반동으로 밀려난 포를 되돌려야 하는 포수는 중노동이다.
그래서 당연히 가급적 가볍게 차려 입고 있었기에 간단한 호신용 무기조차도 캠프에 두고 온 상태였다.
뭐, 애초에 대단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장전 완료!”
“목표 전방의 그룬발트 놈들! 우측으로 돌려!”
바쁘게 포가의 뒤편을 잡고 옆으로 옮긴다. 무게중심 덕에 육중한 공성포의 포구가 우측으로 돌아간다.
“우와아아아아!”
“돌격! 돌격!”
세심하게 포각을 조절할 시간은 없었다. 일부가 말에서 내려 바리케이드를 밀어내 억지로 길을 열자, 그룬발트 기사들이 돌입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빌어먹게도 그 위치가 하필 야로스가 속한 포반의 정면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됐다!”
포술장의 외침에 포수들이 반사적으로 귀를 막고 몸을 돌린다.
“쏴라!”
뻐어엉!
본래 목적과는 전혀 다른 용도로 육중한 공성포가 불을 뿜었다.
굉음, 화염과 함께 포구에서 튀어 나온 시커먼 쇠 포탄이 엄청난 속도로 돌격해오던 기사 대열을 비스듬히 가로 질렀다.
“뭐, 뭐야!”
“으아악! 내 팔이!”
“멈추지 마! 전진! 전진해라!”
오른 팔이 잘려나간 그룬발트 기사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그 옆에서는 상체에 사람 머리가 들락거릴 크기의 구멍이 갑옷 채로 뜯겨 나간 또 다른 기사가 피로 젖은 망토를 펄럭이며 나동그라진다.
목뼈가 보일 정도로 포탄에 쓸린 상처를 입은 군마가 고통에 몸부림치자 사방으로 피가 쏟아진다.
그 바람에 별로 넓지도 않은 진입로가 기사와 군마의 시체, 그리고 아직 죽지는 않은 자들의 몸으로 가로막힌다.
“장전! 재장전하라고!”
“구경할 틈 없다!”
당장은 첫 포격이 엄청난 행운타를 날려 준 덕택에 잠시 시간을 벌었지만, 말에서 내린 다른 기사들이 장애물을 타넘고 다가오고 있었다.
말 탄 기사들 역시 접근해 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야로스는 일단 왼손으로 부러진 장전봉을 창처럼 세워 잡고, 오른손으로는 그가 아까 죽였던 그룬발트 기사가 떨어뜨린 검을 집어 든다.
손목 스냅으로 몇 바퀴 휘둘러 보니, 무게 중심이 적당하고 흙먼지에 더럽혀진 와중에도 시퍼렇게 날카로움이 죽지 않은 훌륭한 검이었다.
악착같이 앞장서서 포병 진지를 돌파하려다 죽은 기사가 누군지는 몰라도 제법 부유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일단은 양손으로 조금이라도 긴 창을 꼬나쥐고 검은 무릎 앞 흙바닥에 꽂아 놓는다. 언제라도 뽑아 휘두를 수 있도록 말이다.
주변 상황을 살펴보지만 딱히 대책이 없었다. 주변에는 야로스가 속한 포반을 비롯해 3문의 대형 화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상황에 따라서 개인용 화승총의 유효 사거리에서도 부대끼며 포격하는 경우가 많은 야전 포병과 다르게, 야로스가 속한 포반은 공성군 산하의 공성 포병이다.
게다가 사람이 부족해 공성 공병대에서 파견온 이들도 많았다.
타국 출신인 상당수 섞여 있는 이 유능한 공병들은 숙련된 기술자이며 건축가, 수학자들이었지만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전장에 익숙하지는 않았다.
물론 어쩌다보니 여기 섞여 들어와버린 야로스 발렌켄드만 빼고 말이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야로스가 시간을 끌어야 했다.
“산탄! 산탄이 있다면···.”
“우리는 공성 포대 소속이라 그런 게 없네!”
“으윽···.”
이들은 어제 오전까지만 해도 폴름스 성벽을 둘러싼 포위망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령부 특명으로 그룬발트와의 결전을 앞두고 차출되어 옮겨온 것이다.
무겁디 무거운 공성포를 여기까지 옮기고 포병 진지를 만드느라 죽을 고생을 하긴 했지만 어떻게든 오늘 전투에 무사히 참전할 수 있었다.
만약 방어망을 어설프게라도 만들어 두지 않았다면 그룬발트 기병대의 돌격을 허용해 기병대는 쓸려 버리고 말았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야로스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또, 또 옵니다!”
“포반에서 한 명씩 저 친구, 야로스를 도와야 할 것 같군.”
“제가 가겠습니다.”
야로스로서는 고마운 일이지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몰랐다. 게다가 무기는 야로스가 노획한 기사의 장검을 들었을 뿐, 신통찮은 대용품이다.
그래도 혼자 싸우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다.
“오, 온다앗!”
“너무 나서지 말아요!”
“네, 넵!”
어떻게든 포가 장전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게다가 구경이 큰 공성포라 장전에는 시간이 더럽게 오래 걸린다.
‘빌어먹을··· 왜 또···.’
다시 몰려드는 그룬발트 기사들의 무리를 보며, 야로스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어쩌다보니 랄렌 강에서 간첩으로 붙잡혔다가, 다리를 유지보수하는 엘랑키아 공병대를 돕게 되었다가, 로델베르크까지 따라가서 참호를 파다가, 어영부영 폴름스 포위망 건설에 동참하여 눌러 앉게 되었다.
옛 상관을 만나러 간다던가 하는 목적은 잊은 지 오래였다. 아니, 애초부터 그냥 구실이었으니까.
작정하고 수소문하거나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면 진작에 연락이 닿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병대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뤄지기 일수였고, 실제로 매일 지쳐서 잠이 들 정도로 바빴기 때문에 공병 동료들도 고마워했다.
야로스의 목적은 ‘평온한 삶’을 얻는 것이지, 다시 전투 병과로 돌아가 공격 신호를 기다리며, 또 이쪽을 겨눈 총구를 바라보며 두려움으로 사무치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내심 이대로 공병대를 종군하며 적당히 밑천을 모아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것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데···.
빌어먹을, 또 이렇게 되어버렸다.
“으와아아아아!”
“엘랑키아 놈들을 밀어버려!”
“가자!”
이미 상당부분이 파손된 바리케이드와, 먼저 공격해오다 사망한 기사와 군마의 시체를 넘으며 말에서 내린 기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 후방으로는 바리케이드를 부수는 모습도 보였다.
총이라도 몇 자루 가져다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주변에는 폭발 위험 때문에 화약무기가 없다.
이거 최악의 경우 화약통을 끌어 당겨 자폭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싶을 지경이다.
“이야아아아!”
야로스와 소수의 포반원들이 질러대는 빈약한 고함소리는 마치 비명과도 같았다.
어설프게 방벽을 넘으려 드는 적을 장대로 밀어내고, 흙으로 가득차 무거운 통을 치우려는 적의 손을 말뚝으로 후려친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어설픈 전력이지만, 방벽이 있고 높이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적은 더 접근하는 데 애를 먹는 모양이었다.
어떤 적들은 방벽을 따라 길이 없나 모색하며 떠나 버리기도 한다. 그런 것까지 여기서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다른 포대의 동료들이 잘 막아주기를 기도할 수 밖에.
타앙!
바로 귀 옆을 지나가는 총탄의 감각에 야로스는 흠칫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이 새끼가!”
귓가에 남은 소름돋는 욱신거림을 참으며 정면을 노려본다. 어느새 여기까지 다가왔는지, 말에 탄 적 기사가 연기가 나는 권총을 이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비단 매듭으로 화려한 띠 장식이 있고, 투구에는 색색으로 염색된 깃털 장식이 잔뜩 달린 것으로 보아 직위가 꽤나 높은 기사로 보인다.
어쩌면 이 지역의 전투를 이끄는 지휘관급일지도 모른다.
간발의 차이로 맞을 뻔 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하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평소 상황이었다면 당장 고함을 지르며 달려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지금까지 포대를 지켜주던 든든한 외곽 방벽이 발을 묶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삼 중장기병은 온 몸을 철갑으로 감싼 데다가 위치가 높아 위협적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방벽 너머로 상체를 내밀고 이쪽을 내려다 보고 있다는 것 부터 위축되는 장면이다.
홧김에 왼손의 부러진 장대를 투창처럼 집어 던진다.
“으윽!”
부러져서 뾰족한 부분이 드러난 얼굴에 꽂히는 기적적인 일은 없었다. 적은 오른팔로 어설픈 투척무기를 쳐냈을 뿐이다.
갑주로 온 몸을 감싼 기사를 부러진 나무토막으로 쓰러뜨리다니··· 그야말로 소설같은 일이다. 말 그대로 기스조차도 나지 않는다.
투구 아래로 드러난 비틀린 비웃음이 속을 긁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마치 ‘그래서 네 놈이 뭘 할 수 있는데?’라고 묻는 듯한 웃음.
하늘에 맹세코, 지금 야로스의 손에 장창이 있었다면, 곧바로 찔러서 저 미소가 일그러지는 꼴을 봤을 것이다.
야로스는 나름 슈토르히 연대의 창병 소대장이었으며, 중대 내에서도 서열이 꽤 높은 인정받는 장창의 명수였으니까!
하지만 그 자리를 버리고 떠난 건 자신이다!
용병 생활이 지긋지긋해 떠났지만, 남아있었다면 적어도 이렇게 무방비하게 적에게 노출되어 벌벌 떠는 일은 없었겠지.
죽이는 일도, 죽는 일도 싫었다. 솔직히 죽을까봐 덜덜 떠는 게 더 싫었다. 부하나 동료들 앞에서는 강한 척 해야 하는 것도 환장할 노릇이었고.
그래서 떠났다. 이제 그런 것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돈을 모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 빌어먹을···.
어째 전쟁터에서 떠날 수가 없다. 어딜 가도 종국에는 살륙의 한가운데에서 총질을 하고 칼질을 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렇게 힘 빠진 채로 적을 만나다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