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90화 (457/556)

47-25.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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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좋지 않군.”

“면목 없습니다, 만프레트 총참모장 각하.”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은 침통한 얼굴로 전쟁관의 두 참모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룬발트 우익군을 훌륭하게 이끌고 있던 타를라 니케 폰 자이트리츠와, 중앙군에서 갑자기 찾아와서 그녀를 나무라고 있는 만프레트 그로블 폰 자이트리츠.

유능하다고 평가하고 신뢰하고 있는 여참모 타를라와 함께 오래 지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언제나 침착한 그녀가 이렇게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본다.

그만큼 전장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상황은 좋지 않다.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좋지 않다.

전열이 붕괴하거나 패배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그런 상황이라면 좋을 텐데.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귀족으로서, 군인으로서 기꺼이 싸우다 죽을 각오는 되어 있었다.

오히려 강적에게 맞서 용감히 싸우다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펠쿠트 백작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8천에 달하는 엘랑키아 기사 대군의 돌격에 앞서 죽음을 불사하고 함께 싸우고자 했던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엘랑키아 기사 대군은 전장의 반대편으로 달려가 버려서 어색한 촌극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여기서 정말로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적이 강대하지 않고 오히려 약소하기 때문이었다.

기병 대군의 주력이 전장 반대편으로 이동해 버린 이후, 우익군 지휘관인 펠쿠트 백작과 참모 타를라는 텅 비어버린 전방을 보고 당황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절대 놓쳐서는 안되는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두려웠던 적의 주력이 떠나버린 후 자리를 지키는 병력은 얼마 안되는 경기병 뿐이다.

그렇다면 그 무주공산을 장악하고, 빈약한 병력이 수비하는 적의 거점 마을 슈뵈켄을 장악하고 중앙군의 측후방을 위협하는 되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펠쿠트 백작은 허겁지겁 수비 일변도의 진형을 풀고 적이 ‘떠나버린’ 전장으로 진격을 명령했다.

그때만 해도 그동안의 불안함과 기다림이 이런 큰 기회라는 형태로 보상 받는다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펠쿠트 백작님, 외람되오나, 잠시 제게 지휘권을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이오?”

“그건 해 봐야 알겠습니다. 허나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그럴 기회도 점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알겠소. 만프레트 경을 믿고 맡기도록 하겠소이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아무리 총사령관 디오보르크 공작의 신뢰를 받으며, 검은 늑대 운운하는 명성을 가진 총참모장이라 한들 측익 지휘관에게 ‘지휘권을 내놓아라’ 라고 하는 것은 오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측익 지휘관과 총사령관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계급적 상하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히 중앙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으나, 우익군 전체는 펠쿠트 백작 개인의 인맥과 명성에 기반해 유지되는 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히 지휘체계상 우익군에 소속된 중소 가문의 전력도 있겠으나, 핵심은 누가 뭐래도 펠쿠트 백작령과 그 주변 남동부 귀족들의 연합군이니까.

통상적인 관계였다면, 중앙의 참모장은 ‘조언’을 하거나 총사령관인 디오보르크 공작을 ‘통해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옳은 상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참모장 만프레트 단도직입적으로 지휘권을 요구했다.

이는 예의를 갖춰 형식을 취할 수 없을 만큼 상황이 급박하며, 몇 마디 조언으로 해결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는 이야기이다.

이미 타를라를 통해 자이트리츠 전쟁관 참모를 크게 신뢰하게 된 펠쿠트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틈도 없이 만프레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만프레트가 아니라, 악마가 찾아와 지휘권을 요구했어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현재의 엉망진창이 된 전황을 수습할 수 있다면.

“타를라, 현재 가장 상태가 좋은, 전투력을 기대할 수 있는 보병 연대는 뭐가 있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만프레트 경.”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만프레트는 병력 파악에 들어갔다. 타를라 역시, 처음 부임하자마자 병력 파악과 배치 정보를 가장 신경썼던 것이 기억난다.

현 상황은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2만에 가까운 펠쿠트 휘하의 우익군이 그 삼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적에게 마구 휘둘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텅 비어있다고 생각했던 전장은, 그룬발트 군이 섣부르게 발을 들여놓는 순간 덫이 되었다.

전위로 내보냈던 보병과 기병들은 너무 서두른 탓에, 슈뵈켄 마을 뒤편에 숨어있던 적의 기습 공격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으니까.

그 이후로는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긴 채, 압도적인 병력으로 방어 진형을 짜고 슬금슬금 움직이고 있었다.

요리조리 빠져 나가는 적 기병 유격대에 몇 개 연대나 되는 보병이 농락당했다.

분통이 터지는 일이지만, 적의 숫자는 적지만 기병과 포병이 생각보다 매우 강력했고 맞상대를 해 주지는 않는 바람에 병력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대로 천천히 전진하기만 해도, 적이 물리적인 방어선을 펴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언젠가는 밀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동안 펠쿠트 백작의 우익군이 전장에서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지금 당장 고속 행군하여 적의 측후면을 타격해도 부족할 판에, 얼마 안되는 적에게 발목이나 잡히다니.

“펠쿠트 백작님! 병력 지휘를 요청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든! 원하는 바를 말하시오!”

하마터면 ‘명령대로 하겠다’라고 대답할 뻔 했다. 그만큼 펠쿠트 백작은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만프레트는 이미 타를라와 몇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탁자 위에 몇가지 표시를 하며 빠르게 설명한다.

간단하면서도 대담한 작전이었이며, 설명은 간략하지만 명쾌했다.

전장에 도착한지 5분도 되지 않았고, 지휘권을 넘겨받고 3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신속한 지휘였다.

“중요한 것은 속도입니다. 타를라가 따로 선발된 별동대를 지휘해 측면을 지키는 동안, 백작님의 본대는 빠르게 적의 중앙군 측방을 노릴 수 있도록 기동합니다.”

“알겠소! 그런데 지금 까다로운 적 기병은 어떻게 한다는 말이오?”

“타를라의 별동대가 적을 끌어들일 겁니다. 그리고 끌어들이지 못한 병력은··· 피해를 감수하겠습니다.”

“음··· 알겠소.”

혹시 상황이 예정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 라는 질문이 생각났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현 상황을 타개할 대책은 펠쿠트 백작에게 없었고, 그렇다고 전술을 보완할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다.

여기서 굳이 추가 의견을 제시하거나 불만을 이야기 해 실행을 늦추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속도입니다’

만프레트의 이 말은 문자 그대로 무엇보다도 앞서는 기본 전제였으니까.

“그럼, 부탁드립니다 백작님. 무운을 빌겠습니다!”

“맡겨주시오!”

혼란한 전장을 그룬발트 군 전령들이 사방으로 달려나간다.

연대 단위로 무질서하게, 안간힘을 쓰며 전진하던 보병 연대들 사이에 다시 질서가 생기고 의기소침했던 기병 연대가 집결한다.

각 고위 지휘관들이 자기 역할을 위해 부대로 이동한다.

엘랑키아 군은 여전히 얄밉게도 견제 공격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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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타탕! 타탕! 타타탕! 따당!

퍼펑, 뻥! 꽈광!

한동안 전장의 핵심에서 빠져있어 조용했던 슈뵈켄 마을 주변에서 요란한 총성과 포성이 울려퍼진다.

그룬발트 군이 후방에 뒤처져 있던 병력 일부를 추스르더니, 방금까지는 접근하는 것도 꺼려하던 슈뵈켄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빌어먹을, 저 놈들이 갑자기 왜 저러지!”

한 줌 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간시히 적의 진격을 방해하고 있던 디타레 드 카울은 상황이 심각해 지고 있음을 느꼈다.

어차피 얼마 안되는 병력으로 적을 직접적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

그렇다면 속도라도 늦추겠다, 라는 생각으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군 방향으로 향하는 적과, 정 반대인 슈뵈켄 마을을 공격하는 적 모두를 견제할 병력은 없었다.

“귀스벨 경이 전사하셨습니다!”

“무리하면 안 된다! 적 대열 사이에 들어가면 안 돼! 슈뵈켄은 이대로 방치한다!”

“버, 버리게 되는 겁니까?”

“누가 버린다고 했나? 슈뵈켄에는 그랑다투아 군 소속의 정예 연대가 주둔하고 있고, 우리 엘랑키아 군 포병대의 절반이 모여있다! 충분히 알아서 지킬 수 있다.”

“알겠습니다, 대장님!”

성큼성큼 슈뵈켄으로 다가가는 적을 보자 초조해졌는지, 분견대 지휘관 중 하나였던 귀스벨이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접근하는 적 보병 연대 두 개의 사이로 부대를 몰고 들어간 것이다.

물론 이는 전혀 의미 없는 전술은 아니다. 오히려 대담한 시도를 성공만 한다면 적에게 남기는 심리적 피해는 상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중간한 거리를 두고 밀집한 대열 사이를 파고 드는 경우, 마주한 적 총병대의 사격이 아군을 맞출 가능성도 높았다.

지휘관들이야 어느정도 아군 끼리의 사격도 감수하고 명령을 내리겠지만, 적 너머의 아군이 맞을 수 있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가진 총병들의 손이 평소보다 떨리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귀스벨은 운이 없었다. 딱 적이 예상한 십자포화 지점으로 부대를 몰았고, 치명적인 화력에 분견대 병력의 절반이 지휘관 자신과 함께 사라졌다.

나머지 절반은 간신히 빠져 나오기는 했으나, 지휘관까지 잃어버린 와중 전투력은 절반 미만으로 떨어졌을 것이며 재결집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어차피 말 위에서 보면 시야가 조금 높기는 해도, 시시각각 변하는 전장 상황을 다 알 수 있을리가 없다.

어느정도는 감으로, 운으로 적의 약점을 돌파해 살아남는 것이 기병대이다.

디타레는 조금 더 운이 좋고, 귀스벨은 조금 더 운이 나빴다. 안타깝지만 그 뿐이었다.

허나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이다.

지휘관인 디타레가 그런 생각을 할 정도니, 아군 부대 하나가 삽시간에 반토막 나는 모습을 본 휘하 기병들의 마음도 엉망일 것이다.

하지만 중앙군, 그것도 다고베르 2세 폐하가 직접 이끄는 본대와 요새화된 그룬발트 변경의 마을이다.

중요성을 따졌을 때 어느 쪽이 중요할지는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슈뵈켄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게다가 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도 아니었다. 슈뵈켄에 배치된 병력도 결과적으로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이 작전을 세우고 세심하게 상세 계획을 지휘했던 트랑카벨의 에트 경도 말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제한된 병력으로 전선 전체를 지킬 수는 없습니다.’

승리를 위해서였다. 적이 상당한 병력을 슈뵈켄에 투입한 만큼, 적의 전력은 ‘낭비’ 되고 있는 것이다.

“아우페브라즈의 사령부로 전령을 보냈나?”

“예, 대장님! 보병 3개 연대와 기병 거의 전부가 슈뵈켄을 공격하고 있다··· 라고 보냈습니다.”

“좋다! 우리는 다시 적을 막으러 간다. 절대 폐하의 본대로 적을 보낼 수는 없다!”

“물론입니다!”

슈뵈켄의 위기는, 단순히 2개 보병 연대를 선두로 총 3개 연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격을 개시했다는 것 뿐이 아니다.

2천 기는 충분히 넘는 그룬발트 기병대가 마을을 우회해, 지금까지 적을 무던히도 괴롭혔던 후방의 포병 진지를 공격했던 것이다.

그 말은, 이제 디타레의 경기병 유격대는 더 이상 포병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적 기병을 제압할 때 훌륭하게 도움을 주었던 정예 총병대 역시 슈뵈켄에 묶여 버렸다.

그룬발트 군이 거의 전군의 삼 분의 일에 달하는 병력을 ‘낭비’해 가면서 병력의 조합을 깨 버렸다.

이게 얼만큼의 가치가 있었던 결단인지는 앞으로의 전황, 디타레 휘하 병력의 활약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콰앙! 퍼엉!

그룬발트 기병대가 포병 진지로 난입한 와중에서도, 용감한 포병들은 포격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부디 그들이 용감히 싸워 자신의 역할을 다 할 수 있기를.

그리고 살아남을 수 있기를 디타레는 진심으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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