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88화 (455/556)

47-23. 폴름스 전투, 셋째 날

전령이 우익 지휘관 펠쿠트 백작에게 적진 우회를 재촉하는 명령을 가지고 달려간 사이, 만프레트는 중앙군 전선을 조금 ‘조정’했다.

전투가 벌어진 최전선의 상황을 파악하고, 세심하게 후속하거나 예비로 배치된 연대를 조율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최대 전술 단위나 최소 전략 단위로 ‘연대’라고 뭉뚱그려 칭하긴 하지만 사실 이는 관습적인 전투 집단을 의미할 뿐, 공식적으로 분류된 단위는 아니다.

연대라는 개념의 시초는 어느정도 세력을 가진, 통상 한 지방 통치자급인 백작 이상의 영주가 소집, 편성한 영지군을 구분하던 전통적인 의미였다.

이제 훨씬 거대한 규모의 군도 자주 편성되고 편성 주체도 바뀌며, 군 자체가 전문화 되어가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개념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 지휘관인 연대장은 실제로는 귀족이 아니더라도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며, 부대 운용에 대해 막대한 자율권을 가진다.

따라서 시대나 유행에 따라서 어느정도 ‘연대’라는 편성이나 규모를 짐작할 수는 있지만, 모든 연대가 비슷한 규모나 전투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규모 측면에서도 병력 1천 초반에서 2천 중반까지 제각각이었으며, 질적 문제로 들어가면 격차는 더 커진다.

연대로 분류된 이상, 어느정도 ‘평균’적인 역할은 해 주는게 당연하지만 말이다.

또한 과거에 대활약을 했던 유명 연대라 할지라도 현재 컨디션에 따라 전투력이 천차만별일 수 있다.

가령, 직전에 참전했던 전투에서 사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해서 급하게 신병으로 전체 절반 가까이를 채웠다거나.

투자자가 바뀌는 바람에 계약에 문제가 생겨 베테랑들이 떠나 전체적으로 약체화가 되었다거나.

이런 점들을 파악하고 각 연대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보완할 수 있는 포지션을 챙겨주는 것도 참모의 중요한 일이다.

다만 현재는 중앙군만 해도 수만의 대군, 게다가 양 날개의 아군까지 지휘해야 하는 총참모장 입장에서 챙기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때문에 잠시 여유가 생긴 사이, 전쟁관의 보좌 참모들이 미리 정리해둔 자료를 바탕으로 배치를 세심하게 조율한다.

보좌 참모들은 자이트리츠 전쟁관에서 배움이 어느 수준 이상에는 도달했으나, 아직 일군을 지휘할 역량을 인정받지는 못한 일종의 견습 참모라고 할 수 있었다.

허나 이는 전쟁관의 엄격한 인재 관리 시스템을 통과한 상위 멤버라는 의미이기도 했기에, 일처리는 빈틈없었다.

만프레트는 완성된 전체 연대 단위 배치 표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약간 아쉬운 점도 있지만, 이 정도면 훌륭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숙련도가 평균보다 떨어지는 떨어지는 연대 2~3개를 평균보다 우위인 연대 1개가 지원하는 형태의 진형이다.

최소한 보병에서 만큼은, 엘랑키아 보다 숫적 질적으로 우세한 상황이니 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배치이다.

물론 엘랑키아 보병 전력이 예상보다 더 강하기는 하지만 설령 첫 전열을 부수고 돌파해 오더라도, 탈진한 상태에서 더 강한 후열을 마주하게 되리라.

또한 반대로 그룬발트 군이 주도권을 되찾아 전면 반격에 나서게 되는 순간···.

아직 백병전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은 정예 부대가 교대하여 이미 지쳐버린 적진을 일거에 돌파하는 것이다.

너무도 정석적이고 당연한 배치와 전술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다.

약점을 가리고 변수를 줄인다.

작게 이기더라도 큰 패배는 피한다.

그게 만프레트의 방식이었으니까.

“전령! 전려엉!”

“전령 도착! 우익군의 펠쿠트 백작께서 보낸 전령입니다!”

“무슨 내용인가? 어서 이야기 해 보게!”

기다리던 소식이 온 모양이다. 재촉하는 디오보르크 공작의 목소리에 흥분이 실려 있었다.

물론 만프레트 자신도 오랜만에 평소보다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많은 변수가 있었으나, 모두 억제하고 반격의 시간이 온 것이니까.

과연 펠쿠트 백작은 어디까지 병력을 진격시켰을까?

“전령! 우익군은 엘랑키아 중앙군을 우회하기 위해 전진했으나, 적의 반격에 직면해 진격을 멈춘 상태!”

디오보르크 공작과 만프레트는 혼이 나간 표정으로 잠시 마주보았다.보고는 예상과 너무도 다른 내용이었다.

“또한, 우익군의 타를라 참모께서 보낸 전언이 추가로 있습니다. 적의 반격을 격퇴하고 길을 열겠다! 다만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 이상입니다!”

“이··· 이게 무슨!”

디오보르크 공작의 입에서 경악의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만프레트 역시 같은 생각이다.

펠쿠트 백작의 우익군은 보병과 기병을 합쳐 2만의 대병력이다.

말 그대로 으뜸패인 엘랑키아의 기병 대군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병력은 분명했다!

그런데 그 병력을 돈좌시키는 전력이라니···. 그것도 만프레트가 신뢰하는 심복 중 하나인 여참모 타를라가 보낸 보고이기도 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추가 보고가 필요하다! 어떤 병력이? 펠쿠트 백작의 진격을 방해하는 적은 어떤 병력인가?”

“그, 그게 어찌 된 일인지 사각에 숨어 있던 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공격에 서둘러 진격하던 보병 연대들이 혼란에 빠지고 전선이 고착되었습니다.”

“기병이? 기병이 아직 있다고? 엘랑키아 기사대는 지금 전장 반대편에 있을 텐데?”

“기사가 아닙니다, 공작 전하! 펠쿠트 백작군을 습격한 엘랑키아 병력은 경기병이 다수였습니다!”

의외의 답변이었다. 경기병이라니··· 그렇다면 생각보다 상황이 나쁜 것은 아닌가?

아무리 강철 갑옷도 종잇장처럼 뚫어 버리는 화약 무기가 수천 수만이나 깔린 전장이라 해도, 여전히 갑주는 중요한 요소였다.

지형지물의 지원을 받으면 모를까, 개활지 싸움에서 백병전을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장창과 화승총이라는 천적이나 다름없는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갑주와 흉갑을 입은 보병이 우글대는 밀집 대형을 상대로 경기병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갑주로 무장한 보병들이 똘똘뭉쳐서 방어만 하고 있어도 경기병이 이를 밀어내는 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나마 시간과 공간이 충분하고, 전술적 상황이 유리하다면 조금씩 껍질을 벗겨내듯 피해를 누적시키는 시도를 할 수 있는 정도일까.

실제로 만프레트는 전투의 승패가 거의 정해지는 후반부에, 경기병 연대가 보병 연대에 돌격하는 경우를 여러차례 본 적 있다.

하지만 이는 정상적인 전술 행동이라기 보다는, 전선이 뚫리고 진격해오는 보병 연대에 대한 발작적이고도 절망적인 마지막 저항에 가까웠다.

보병 연대가 우회하면 잘 싸우고 있는 나머지 전열도 박살났다.

그 상황에서 던질 수 있는 카드가 보조 전력인 경기병 예비대밖에 안 남았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물론 대개의 경우, 경기병대의 용맹한 돌격은 별 소득 없이 장착의 벽 앞에 막히는 경우가 많았고.

이성을 잃고 어리석은 돌격을 지시한 지휘관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되었었다.

그럼 설마 지금도 그런 상황인가?

중기병들을 모두 충격부대로 반대편 전선으로 보낸 상황에서, 마지막 남은 경기병들로 우익군의 진격을 잠시라도 막아보려 한다고?

“대체 경기병 중심이라는 그 부대의 수는 얼마 정도인가?”

“기병의 숫자는 정확히는 모르나 2개에서 3개 연대 규모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2만이 넘는 병력을 잠시라도 멈출 수 있다니 대체 어느 정도의 전력이 필요할까?

2개에서 3개 연대, 3천 전후라 가정하면, 생각보다 남은 기병 수가 많기는 하지만 중기병이 거의 빠진 나머지가 아닌가?

이미 자신이 확인했지만, 펠쿠트 백작은 젊지만 결코 무능한 지휘관이 아니다. 하물며 신임하는 타를라까지 참모로 붙어 있는데 말이다.

“전부가 아니라 함은?”

“포병과 보병의 지원이 있었습니다! 포병을 전부 다 끌어온 듯, 기병이 숨어있던 슈뵈켄 마을 뒤편에 큰 규모의 진지가 있었습니다.”

“...포병이라고?”

“옛, 또한 적 기병 사이에는 총병 부대가 혼성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초전에서 아군이 다소 피해를 입고 혼란을 겪은 모양입니다.”

들을수록 어이가 없는 내용이다.

매복 포병도 황당하지만, 억지로 야전에 부적합한 공성포대를 끌어 왔다면 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그런데 기병과 혼성 배치한 보병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기병의 기동성을 버리는 짓이 아닌가?

설마 기병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방패막이, 버림패로 총병을 쓰는 구닥다리 전술을 말하는 것인지.

명 전술가는 지도만 보고도, 보고만 듣고도 전장의 상황을 또렷하게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전황 파악이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전쟁관에서도 중점적으로 훈련시키는 내용이었고.

주신에게 맹세코, 만프레트는 전쟁관의 정식 참모로 전장에 나선 이후 지금처럼 혼란스럽고 전황이 머리속에 그려지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내가 직접 가보겠다. 호위대를 준비하도록.”

“마, 만프레트 경? 아니, 총참모장이 사령부를 떠나는 것이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공작 전하. 제가 없는 동안에도 잠시는 대응할 수 있습니다. 전쟁관의 참모 조직을 믿어 주십시오.”

“그··· 알겠소이다···.”

기겁하는 디오보르크 공작을 안심시킨다.

만프레트로서도 미덥지 못한 사령관만 두고 중앙군을 떠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익군의 상황은 반드시 그의 눈으로 보고 판단해야 할 것 같았다.

더 이상 변수가 끼어들게 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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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타타탕!

후욱, 하고 뜨거운 기운이 느껴진다. 총구에서 튀어나온 작은 납덩어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날아와 가로막는 모든 것을 찢어 발긴다.

“크아악!”

“으윽, 맞았어!”

멀지 않은 거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일제사격은 엘랑키아 기병대에 큰 상처를 남긴다. 선두에서 지휘하던 장교들을 포함해 가장 용맹한 다수가 맥없이 쓰러진다.

“돌격! 가자!”

직접 경기병 부대의 선두 집단에서 돌파와 추격을 지휘하고 있던 엘랑키아 왕실군 기병대장, 디타레 드 카울은 빠르게 판단을 내린다.

“으아아아아아!”

“쓸어버려!”

허나 사격을 뒤집어 쓴 기병대는 혼란에 빠지기는 커녕 하얀 화약 연기가 자욱한 총병대 방향으로 돌격하기 시작한다.

전방에는 위협적인 창병 대열이 없으며, 총병은 방금 사격으로 탄이 비었다. 기병에게는 최고의 찬스였다.

“우와아아아아!”

“죽어! 죽어라!”

“돌격 앞으로!”

“으아앗, 도망치지 마!”

비록 경기병이지만, 엘랑키아 왕국군의 중핵을 이루는 군사 귀족 가문의 말석을 차지하는 젊은 견습 기사와 종사들로 이루어진 부대이다.

그 기세는 결코 중기병대에 뒤처지지 않았다.

오히려 산개 대형인 경기병대의 순발력을 이용해, 일제사격 직후 그룬발트 총병들이 대응하기 전에 그 사이로 뛰어든다.

퍼걱!

“끄윽!”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겁에 질린 부하들을 질책하던 총병 중대장의 다리가 허공이 붕 뜬다. 창 끝이 흉갑을 뚫고 가슴에 박힌 것이다.

비록 기사들이 쓰는 정식 거창만큼 길고 육중하지는 않은 짧은 창이었으나, 그렇다고 맞으면 덜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며 뜨거운 총을 들고 우왕좌왕하던 총병들은 경기병이 돌진해오자 빠르게 무너진다.

창에 찔리고, 칼에 베이고, 철퇴에 머리가 박살나면서 우르르 밀려난다.

통상 경기병이 타는 말은 중기병의 군마에 비해 작고 약하다. 또한 훈련의 차이 때문에 과감한 돌격전에 맞지 않는다··· 라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현재, 앞뒤 가리지 않고 스스로가 창날이 되어 그룬발트 총병 대열에 꽂히고 있는 엘랑키아 경기병들은 그 상식을 벗어나는 존재들이다.

군사 귀족 문화가 국가의 중심 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엘랑키아 북부에서 대륙 최고의 군마들과 함께 자라고 훈련받은 말들이다.

때문이 비록 승용마나 사역마의 혈통이라 할지라도 맹수처럼 총병 대열을 들이 받는다.

군마보다 덩치가 작다 해도 성인 남자보다 몇 배나 크고 무거운데다 빠른 짐승이다. 요행히 무기를 피했어도 말에 부딪친 그룬발트 병사들이 나동그라진다.

그렇게 늘어난 돌파구로 뒤따르던 기병들이 계속 달려 나간다.

휩쓸려 도망치는 그룬발트 병사들의 생명이 빠르게 꺼져간다. 병사 개개인의 목숨도, 총병 부대로서의 목숨도 말이다.

하지만 적군 전체로 보면 충분한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니다.

주력 기사대를 전장 반대편으로 보내고 남은 전력, 그게 디타레 드 카울이 지휘하는 경기병대이다.

거기에··· 사령부 참모 트랑카벨의 에트 경이 챙겨준 묘한 지원군이 합쳐진 이질적인 부대가 적의 발목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꽤 잘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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