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2. 폴름스 전투, 셋째 날
“후우우우···.”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전달하는 전쟁관 출신의 젊은 참모 뮤에르니히를 확인한 레트폴레 후작은 천천히 숨을 몰아쉰다.
주변의 다른 참모와 전령들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눈치를 본다.
그들 입장에서 과묵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좌익군 지휘관이 저렇게 행동하는 것은 놀랄 일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래, 알겠다.”
어차피 여기서 나이가 절반도 안 되는 참모에게 화를 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대신 총사령부에서 내려온 명령의 의도를 곱씹어 본다.
만약 통상적인 경우라면, 측익 방어선이 이렇게나 무너진 경우, 병력을 물리는 것이 옳다.
그렇다고 무조건 등을 돌리고 도망친다는 것이 아니다.
최대한 병력을 살려 퇴각시키고, 그들이 ‘겁에 질려 도망치는 오합지졸’이 아니라 ‘아직 적을 위협할 수 있는 전력’으로 남기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다.
말하자면 현재 전선을 포기하고, 즉 공간을 내주고 압박을 줄여 시간을 얻는 것이다.
다만 이런 ‘합리적인 선택’을 총사령부에서 거부하며, 현재 위치를 고수하고 버티라 하는 이유는 어느정도 알 수 있었다.
우선 대열의 일부가 퇴각해 본래 역할을 못하는 만큼, 이웃한 중앙군 역시 전선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총사령부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다음 이유 때문일 것이다.
레트폴레 후작 휘하의 좌익군이 재편성을 위해 물러서면서, 맞서 싸우던 엘랑키아 우익군 역시 재편성을 할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기습적으로 돌진해온 공포의 엘랑키아 기사대가 말이다.
방금 첫 돌격을 성공시키고 적진을 퇴각시켜 사기까지 오른 엘랑키아 기병대의 충격력이 다음으로 어느 방향을 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러서며 전선을 재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레트폴레 휘하의 좌익군을 계속 추격할 수도 있고···.
그룬발트 중앙군을 때려 전투를 단숨에 끝내려고 할 수도 있다.
아마도 총사령부에서는 후자가 발생해 변수가 추가로 생기는 것을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 대가는 무엇일까?
전열을 재정비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로, 엘랑키아 기사들의 가공한 충격력을 정면으로 받아 버린 레트폴레 후작 휘하의 병력 전체가 될지도 모른다.
“뮤에르니히 경, 하나 묻고 싶네.”
“옛, 레트폴레 후작님?”
“귀경은 총사령부의 만프레트 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가?”
“무, 물론입니다, 제 선배이시며··· 스승이시기도 합니다.”
“좋네. 그래서 만프레트 경은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인가?”
역전의 숙장인 레트폴레 후작과, 하나의 전선을 담당하는 것이 처음인 젊은 뮤에르니히 참모의 시선이 다시 교차한다.
뮤에르니히는 새파랗게 질렸던 방금 전에 비해서, 많이 냉정함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2초 정도 기다렸을까, 그 시간이 레트폴레 후작에게는 퍽 길게 느껴졌다.
“물론입니다. 만프레트 경 이상으로 적임자는 없다 생각합니다.”
“흠, 그렇군. 그럼 총사령부의 방금 지시에 대해 귀경은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저는··· 다, 당연히 만프레트 경의, 아니 총사령부의 명령에 따라야···.”
“아니, 나는 당위성이 아니라 귀경의 참모로서 의견을 묻고 있다.”
“....”
상관인 후작의 단호한 물음에, 뮤에르니히의 입가가 다시 떨린다.
상부에서 내려온 명확한 지시를 따르는 것과, 스스로의 판단을 내세우는 것은 같은 일을 하더라도 역시 무게가 다른 모양이다.
“...무너지는 병력을 최대한 수습해 이중 삼중으로 방벽을 만들겠습니다. 아군과 적군이 마구 뒤섞인 현재, 이 전선은 엘랑키아 기사들이 빠진 ‘늪’이 되어야 합니다.”
“늪이라고?”
“예. 이 전투에서 엘랑키아 기사대의 돌격이 더 이상 없도록 해야 합니다.”
많이 당황했던 아까와 달리, 뮤에르니히의 발음이 또렷해지고 확신이 선 듯한 모습이었다.
위기에 처해 잠시 잊었던, 전쟁관 참모로서 몸에 익힌 가르침이 되돌아 오는 모양이었다.
늪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확실히, 자연 상태에서도 늪은 기병이 돌파하기 어려운 지형이지. 늪은 보병에게도 위험하지만, 기병에게는 말 그대로 무덤이나 다름 없다.
엘랑키아 기병을 여기 묶어두고, 전멸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그 가공할 충격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것이다.
반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레트폴레 후작이 보기에 천재적인 생각은 아니더라도, 나름 근거가 없는 의견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늪에 휘하 병력도 함께 빠져서 천천히 죽어가야 한다는 것이지만.
레트폴레 휘하의 병력은 2만을 훌쩍 넘는다. 판단여하에 따라서, 이들은 정말로 가혹한 시련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니, 총사령부에서 지시가 왔을 때 절반쯤은 결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실행하도록 하지. 작전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가?”
“아닙니다. 즉시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방침이 결정되자, 뮤에르니히를 중심으로 지휘부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전방 부대의 상황이 파악되고, 연대 혹은 그 미만 단위로 역할이 분배된다. 전령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그 지시를 전달한다.
핵심 참모로서 뮤에르니히가 세운 계획은 이러했다.
엘랑키아 군에 의해 잠식되고 피해를 입은 정도에 따라서 각 연대를 분류한다.
그리고 새롭게 선을 그어 아직 온전한 연대들로 그 선을 지탱하도록 한다.
그리고 선 바깥의 병력들은 전황에 따라 새로운 방어선의 일부가 되거나, 그 측면으로 물러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술은 잔혹한 판단을 필요로 했다.
“레트폴레 공! 지원군은 언제 오는 것입니까? 이미 연대가 붕괴 직전입니다! 엘랑키아 기사들은 미친 짐승입니다! 같은 수의 병력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전령! 중대장 절반이 사망했습니다. 지원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카르나프 연대가 후퇴하고 있습니다! 방어선 측면이 열렸습니다! 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후작 각하?”
온갖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소식들이 지휘부에 빗발친다.
왜냐하면 현재 지휘부의 작전 행동은 전방 부대들이 원했던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그룬발트 보병들이 전투도 후퇴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엘랑키아 기사라는 끔찍한 인간 병기들에게 눌려 피를 토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괴롭게도 이는 ‘예정된’ 결과였다. 레트폴레 후작은 이리 될 것을 알고 작전을 승인한 것이란 말이다.
“조금만, 조금만 버텨달라고 전해라.”
그래서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타타타탕! 타탕! 타다다당!
“버텨! 버티라고!”
“자리에서 벗어나지 마! 깃발이 기준이다! 뭉쳐라!”
“크아아아아악!”
“온다! 엘랑키아 놈들이 온다고!”
잔뜩 밀려버려 최전선이 가까워진 탓인지, 병사들이 아우성치는 소리 사이로 장교들의 호령도 또렷하게 들린다.
게다가 적은 엘랑키아 기병만이 아니다. 처음부터 싸우던 보병들도 무섭게 압박해오고 있었다.
지키는 입장이 아니라 공격하는 입장이 되었기 때문인지, 이미 지쳐버린 줄 알았던 그들의 공격은 상당히 매서웠다.
“총사령부에, 디오보르크 공작께 전령을 보낸다.”
“옛, 후작 각하!”
“좌익군은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겠다. 승리하라. 우리가 다 죽기 전에. 이상이다.”
“좌익군은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겠다. 승리하라, 우리가 다 죽기 전에! 전달하겠습니다.”
전령이 떠난 후, 레트폴레 후작은 참혹한 전장을 둘러본다.
작전 지휘는 뮤에르니히를 비롯한 참모부에 일임했으니, 그는 퇴각하거나 낙오한 병력을 재편하기로 한다.
공포에 질린 그들을 다독이고 북돋아 다시 사지로 보내는 것, 그게 좌익군 지휘관으로서 그의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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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음··· 쿰, 흐음···.”
총사령관 디오보르크 루프트 폰 제블링 공작은 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닦아내며 기묘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긴장이 극에 달한 모양이었다.
그는 상관으로서 그렇게 나쁜 지휘관은 아니다··· 라고 총참모장 만프레트가 생각했다.
적어도 지휘를 위임한 이후로는 괜한 참견을 하며 지휘부의 역량을 깎아먹는 짓은 하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편 디오보르크 공작이 그처럼 흥분하고 긴장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최근 수십년 간, 신성 그룬발트 제국에서 가장 황위에 가까이 다가간 인간이고, 옥좌에 막 손이 닿으려던 참이었으니까.
하지만 실패한다면 이는 그냥 기회를 잃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리라.
그룬발트의 역사를 살펴보면, 후보자로 황위에 다가갔으나 계승에 실패한 이들의 최후는 좋지 않았다.
경쟁자에 의해 참살되든, 실망한 지지자들에게 배신당하든.
상당수가 멸문지화에 가까운 끔찍한 최후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마 디오보르크 공작 역시, 만약에라도 폴름스 구원이라는 지상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냥 황위에서 멀어지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그를 지지하고 나섰던 여러 엘프 선제후들이, 그리고 새로운 황제의 측근을 자처하며 참전했던 인간 영주들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작에게 청구서를 들이 밀 테니까.
정치적 죽음으로 끝나면 다행이지, 가문도 영지도 무사히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심지어 목숨조차도 말이다.
그러니 그를 섬기는 입장인 만프레트로서는 그렇게 둘 수 없었다.
물론 현재 상황은 결코 공작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뼈아프게도 전황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프레트가 수 없이 승리로 이끌었던 표준적인 크기의 전장이었다면, 이런 불의의 일격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전장은 너무 넓었고, 엘랑키아의 기병 지휘관들은 상상 이상으로 교활했다.
결국 만프레트 휘하의 정보 장교들은 엘랑키아 기병의 움직임을 예상하는 데 실패했다.
후방 예비대 틈에 섞여 전장의 절반을 가로지르려는 기만책은 교묘했고, 관측병들의 정보를 종합해 사령부에 전달하기에 전장은 너무도 넓었다.
그 결과가 좌익군의 붕괴 직전, 더 이상 공세가 불가능하다는 현재 상황이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집결한 엘랑키아 기사들은 분명 위력적이다. 어느 전장에서든 어떤 국면에서든 반드시 한 번은 이길 수 있는 무적의 카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엘랑키아 군은 그걸 방금 써 버렸다.
레트폴레 후작 휘하의 좌익군은 끔찍한 피해를 입었고, 아마 이번 전투 내내 수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멸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집결되어 막강한 엘랑키아 기사대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해도 일격에 2만이 넘는 좌익군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이야기이다.
냉혹하게 말해서, 전군의 삼 분의 일 정도를 제물로 엘랑키아 기병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싸게 먹힌 것이다.
분명 좌익군의 병사들은 끔찍한 싸움을 하게 될 것이며 시체가 산을 이루겠지.
하지만 그 시체의 산에는 엘랑키아 기사들도 상당수 섞여 들어갈 것이다.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돌격시의 충격 효과가 끝난 이후에도 엘랑키아 기사들은 여전히 강력한 인간 병기들이지만, 자유롭게 공간과 기동성을 활용할 수 있는 상태에 비하면 훨씬 할만한 싸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언젠가 좌익군이 버티지 못하고 궤멸하든 돌파당하든 무너지겠지. 적어도 그 때 까지 엘랑키아 기사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에 비해서 그룬발트 군은 우익이 자유로운 상태이다. 대치하던 엘랑키아 기병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장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우회하고 있다.
적이 남겨놓고 간 다소의 저항이 있을지 몰라도, 조만간 그들이 엘랑키아 중앙군의 측방을 타격할 것이다.
그 때를 맞춰 ‘힘을 아끼고 있던’ 만프레트 직할의 중앙군 역시 예비대를 총투입해 적을 몰아 붙인다.
아마도 승패는 그때 정해지리라.
“우측의 펠쿠트 백작에게 전령을 보내라. 조금 더 서둘러 달라고 말이다.”
“옛, 만프레트 경!”
좌측에서 패하더라도, 중앙과 우측에서 이긴다. 그것이 큰 계획이었다.
조금 수정되기는 했으나, 필승을 향한 계획은 여전히 진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