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1.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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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군 구원에 성공했습니다! 전황은 불리한 상황에서 호각 이상으로 변환, 아직 기병 공세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알겠네. 전황의 변화에 따라 계속 보고를 부탁하지.”
“옛, 폐하! 계속 주시하겠습니다.”
엘랑키아 왕국 국왕이며 폴름스 부근에서 벌어지는 대결전의 총사령관, 다고베르 2세는 굳은 표정으로 보고를 듣는다.
국왕에 즉위하고 나서, 아니 그 이전에도 참전했던 경험을 통틀어도 이번에는 전장이 압도적으로 넓었다.
이미 사령관과 관측병 몇 명이 육안으로 확인하여 지휘를 할 수 있는 상황은 벗어났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전령들이 전장과 사령부를 오가며 각 전장을 담당한 참모들의 머리속을 거쳐 최종적으로 다고베르 2세에게 보고가 올라오게 된다.
그 보고는 전장의 유불리, 새로운 적의 출현, 아군 부대의 이동 등등이다.
하지만 엘랑키아 군의 참모부 체계는 그다지 훌륭하게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타국과 비교하여 그렇다는 것도 알고 있고, 최근 트랑카벨의 에트 경과 이야기하면서도 강하게 느낀 점이다.
비교 대상이 없으니 개선 작업을 하는 게 어려웠다.
어째서 진작에 타국에서 유능한 인재를 영입해 함께 논의하거나 조언을 듣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다른 분야는 타국의 지식과 인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현재의 엘랑키아 군은 한 세대 이전의 엘랑키아 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하다.
정확히는 ‘강하다’ 라는 단어만으로 표현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전통적인 약점이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엘랑키아가 좌절하게 만들던 약점을 보완했다는 표현이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미 모두가 인식하고 있었으나 쉽게 개선되지 않던 부분들.
대표적으로 기병 전력에 취약한 보병 연대나, 요새를 공격하는 공성 전력, 그리고 체계적인 병참 체계 등이었다.
이전 세대의 엘랑키아 군이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전장에서 승리를 쟁취하고도, 그 승리의 대가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게 방해한 요소들이다.
보병의 취약점은 문자 그대로 ‘완승’을 거두는 데 방해가 되었으며, 적이 병력을 온존한 채 퇴각하게 만들어 새로운 군의 편성을 용인하게 만들었다.
공성 전력의 취약점은 적의 야전군을 격멸하면서 얻은 주도권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지지부진해진 전쟁은 아쉽게 끝나버렸다.
병참 체계의 취약점은 장기 원정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으며, 막강한 엘랑키아 기사들조차 타국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이런 점을 개선한 현재의 엘랑키아 군은 최강이다··· 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는 게 다고베르 2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체계화된 참모 시스템은 지향점을 찾지 못했고, 어정쩡한 상황에서 전투를 맞이하게 되었다.
듣기로는, 그룬발트 제국에는 전문적인 군 지휘관도 계약으로 파견, 고용하는 케이스가 있다고 한다.
다양한 지역에서 온 대군을 운용하려면, 그런 인력의 지원을 받는 것도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래도 용병 고용이 일반적이지는 않은 엘랑키아와 사고방식의 차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게 다고베르 2세는 진작 준비하지 못한 점을 자책했지만··· 뭐 이렇게 된 이상 엘랑키아 왕국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수 밖에.
그가 가장 신임하는 두 사람, 왕실군의 두 원수인 아르밀 드 브라뇰 공작과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이 함께 측익을 지휘하고 있었다.
설령 중앙에서 즉각적인 명령이나 대응이 어렵더라도, 그 두 사람이라면 훌륭하게 중앙군과 보조를 맞추며 싸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편으로는··· 지금은 총사령부를 떠나 남부를 책임지고 있는 트랑카벨의 에트 경이 이 자리에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와 오랜시간을 함께한 것은 아니지만, 진정으로 감탄하게 만든 상대였고 그 능력의 끝을 알 수 없어 판단을 보류하게 되었던 인간이다.
어쩌면··· 총사령부에 가장 어울리는 인간이 아닐까.
물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지금 결전이 벌어지고 있는 북부 전선 사령부에서 떠나보낸 것은 다고베르 2세 자신의 판단이었다.
전투가 격화되면서 자신이 실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룬발트 군 우익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폐하!”
전황을 지켜보는 한편 다음 보고를 기다리며 상념에 빠져있던 그 때, 반대편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그럴 때가 되긴 했다.
아직 엘랑키아의 좌측, 그리고 그룬발트의 우측에서는 제대로 전투 다운 전투가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야 당연히, 다고베르 2세가 좌익군에 집결시켜 놓은 기병의 대군과 마주한 그룬발트 우익군이 바짝 긴장한 채로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을 억제하고 있던 수단이었던 엘랑키아 기병의 대군은 대부분 전장 반대편으로 떠난 상태였다.
마주보고 있던 ‘짝’을 잃어버린 그룬발트 우익군이 약이 올라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당연하겠지.
“자, 지금부터가 중요하겠지. 디타레 경은 대응하고 있나?”
“옛, 폐하.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경거망동 없도록 사령부에 전달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래, 모든 것이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다. 이는 누구보다도 불안해하고 있는 다고베르 2세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참모 에트 경에게 제안받아 자세하게 설명을 듣고, 누구보다도 신임하는 왕실군 원수들과 논의하여 국왕이자 총사령관인 자신이 승인한 작전이다.
‘한 번은 반드시 통할 작전입니다’
그렇겠지, 그래야겠지. 통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다고베르 2세는 전투가 시작된 이래로 가장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전장을 살핀다.
수 많은 엘랑키아 왕국의 신하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엘랑키아 왕국을 위해서. 승리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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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룬발트 군 좌익 지휘관, 레트폴레 아티오크 폰 벤셀샤프 후작은 잠깐 눈을 질끈 감는다.
마치 눈에서 보이지 않으면 보기 싫은 게 사라질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3초도 지나기 전에 눈을 뜬 레트폴레 후작의 눈 앞에는 여전히 절망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부대가, 전열이,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나름 전장에서 오랜 기간 지휘관으로 커리어를 쌓아 온 레트폴레 후작은 신중한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었고, 스스로도 신중하다 생각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신중한 지휘도,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친 압도적 충격력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수적 열세인 엘랑키아 우측을 밀어 붙이고 있었다.
가장 측면을 지키는 요새화된 마을 호펜로이테에서 시작하여 중앙군 끼리의 전장까지 이어지는 적의 전선을 조율이라도 하듯 세밀하게 파악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전 전선에 거쳐 전력을 배분했고, 진격 속도 또한 철저하게 조절했다.
수적으로 유리했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지점을 가져 후퇴도 진격도 마음대로 못하는 엘랑키아 군에 비해 전술적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생각했다.
위험과 변수를 최소화 하며 ‘대군의 본질’을 최대한 활용해 적을 내리 누르듯 차근차근 우위를 적립한다.
만에 하나라도 승리를 서두르다가 다 잡은 승리를 놓쳐버리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레트폴레 후작의 철칙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신중하게 쌓아 올린 ‘승리로 향하는 저금’이 방금 와르르 무너져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일시에 몰아닥친 엘랑키아 중장기병 수천기의 돌격이 모든 계산을 때려 부쉈기 때문이다.
“후작 각하, 후퇴··· 후퇴를!”
“으음, 물러서야겠지. 계획을 세워주게. 나는 연대를 선정하도록 할 테니.”
“알겠습니다, 각하.”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참모, 뮤에르니히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저래서는 일을 제대로 할까 싶을 정도이다.
어쨌든 그 제안은 옳았다. 병력을 추려 후퇴시키고 전선을 끌어 내려서라도 궤멸을 막아야 하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활약할 전장을 드디어 찾았다며 활기 넘치는 이 젊다 못해 어린 전쟁관의 참모는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시퍼런 안색을 하고 있었다.
평생의 기회라 생각했던 것이 곧바로 위기로 바뀌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한편으로는 원망스럽기도 했다. 어리다고는 해도 ‘그 전쟁관’의 인정을 받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 이런 상황을 예상 못했다는 말인가.
아니, 조금 다르다. 예상이야 레트폴레 자신도 하고 있었다.
엘랑키아가 말도 안되는 규모의 기병을 한 곳에 몰아둔 것 부터가 그럴 의도를 보여주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는 상대의 눈길을 끌어 들이는 생각의 함정이며 실제 변수는 다른 전장에서 일으키는 게 아니냐···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의 허점 사이에 잘 숨긴 것인지 어떤 것인지, 엘랑키아 기병 대군의 움직임은 예상 밖이었고, 대응하기에는 이미 너무 가까이 있었다.
이렇게 빠르게, 전조도 없이 측면이 뻥 뚫리게 될 줄은 몰랐다.
어리석었다.
전력이 우위에 있으니, 이쪽은 사냥꾼이며 사냥감의 움직임은 얼마든지 읽고 대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짧은 방심은 사냥감이 사냥꾼의 목을 물게 하는 데 충분했던 것이고.
아니, 애초에 ‘사냥꾼’이라 생각했던 것부터가 오만함의 발로였을지도 모르지.
적 사령관인 엘랑키아 국왕은 즉위 이래로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전략가이며, 기병 전문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상대도 악착같이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인데,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지휘를 받고 있다고 안일하게 행동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뭐, 이제는 반성해도 늦었다.
지금은 어떻게 살아남을지를 고민해야 할 때였다.
아니··· ‘누가’ 살아남을지를 ‘결단’해야 할 때라고 할까.
레트폴레 후작 또한 일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서, 냉정하고도 냉혹하게 판단해야 했다.
어느 연대를 살리고, 어느 연대를 죽도록 내버려 둘 것인지.
모두 살겠다고 도망치면, 당연히 전열은 붕괴하고 모두 죽을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효율적으로, ‘살려서 유용할’ 연대들을 골라 퇴각시키고 제2 전선을 형성해 그룬발트 좌익군의 흔적은 남겨야 했다.
그래야 중앙군이, 우익군이 전황을 뒤집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 중앙군의 지휘를 맡은 만프레트 총참모장은 레트폴레 후작 역시 어느정도 알고 있는 유명인이다.
적을 완전하게 분석해서 뼈만 남기기로 알려진 검은 늑대. 어찌 보면 신중하게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레트폴레 후작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비록 자신의 역할은 여기서 끝일지 모르지만, ‘폴름스 전투’ 자체를 패배로 끌고 들어가는 추태를 부릴 수는 없었으니까.
“후, 후작 각하!”
“무슨 일인가?”
‘살려야 할’ 연대를 추리기 시작했을 때, 뮤에르니히 참모가 찾아왔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방금 만프레트 경··· 디오보르크 공작 전하의 사령부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무슨 내용이길래 그런 표정인가?”
“내, 내용은, 좌익군의 퇴각을 금지하니, 최후까지 현재 전선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뭐라고?”
방금까지 정말 싫은 선택을 하고 있던 레트폴레 후작의 눈썹이 분노로 꿈틀거렸다.
“뮤에르니히 경, 그 명령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는지 해석해보게.”
“총사령부의 뜻은··· 여기서 좌익군이 물러서 적 기병이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도 공간도 내주지 말라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후작 각하.”
“우리 상대는 갑자기 나타난 기병 뿐이 아니지 않나! 정면에는 적 우익의 보병들이 버젓이 버티고 있는데?”
버티고 있을 뿐이 아니다. 이 지겹도록 끈질긴 엘랑키아 보병들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것 처럼 보였던 주제에, 기병이 도착해 전황이 바뀌자 무려 반격을 가해오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사령부에서는 우리에게 여기서 물러서지 말고 그냥 죽으라는 것이 아닌가? 적과 함께 말이지!”
상관인 레트폴레 후작이 처음으로 뜨거운 분노를 내비치자, 젊은 참모 뮤에르니히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갑자기 열 살은 더 늙은 듯 괴로워보이는 표정을 보아서는, 대답하지 않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그렇게, 분노와 불안, 우려와 공포를 숨기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시선을 교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