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0. 폴름스 전투, 셋째 날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진 연대장의 말에 움찔한 전령이 조심스럽게 보고를 이어간다.
“그게··· 처음에 싸웠던 엘랑키아 보병입니다. 갑자기 공세로 전환한 모양입니다.”
“빌어먹을 새끼들, 우리가 우스워 보이나?”
분명 그로이엔펠트가 부숴 버리기 직전이었고, 방금까지는 지키기에 급급하던 놈들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로이엔펠트가 아니라 반츠베르크 연대를 향해 공격해온다는 것은, 두 연대 중 ‘더 만만해 보이는 쪽’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것이리라.
그나저나 골치아픈 일이다.
작정하고 버티기에 들어간 연대급 보병 부대를 무너뜨리기는 매우 힘든 일이지만 그렇다고 절대 무적은 아니다.
애초에 서로 무적이라면 전투의 승패도 갈리지 않겠지.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방법은 보병과 기병, 그리고 가능하면 포병까지 여러 병과가 협동하여 공격하는 것이다.
일단 같은 밀집 대형이라 해도 보병과 기병을 상대할 때 효율적인 방어선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고도의 통제력과 숙련도가 요구된다.
솔직히 평소의 반츠베르크 연대라면 충분히 수행 가능한 전술이지만, 하필이면 이런 어려운 상황이라 걱정이 되었다.
“버텨! 버티라고!”
“쏴라!”
타타타타탕!
타탕! 따다당!
“크으윽! 막아라!”
“빌어먹을 새끼들!”
잠깐 보병에게 공격당하는 방향을 신경쓰고 있었더니,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기병들이 난리다.
아무리 네 방향 모두의 공격에 대응하는 사각 방어 진형이라 해도, 두 방향 이상, 그것도 보병과 기병 양자에게 공격당하자 숨이 턱턱 막혔다.
그것도 엄청난 공격성을 가진 엘랑키아 녀석들에게 말이다.
방금도 어느새 나타난 엘랑키아 기사들이 휘하 연대의 창병 대열을 뚫고 들어오기 위해 접근했다가 물러서고 있었다.
어떤 미친 기병대가 어깨가 붙을 정도로 빽빽하게 늘어선 장창 부대의 정면으로 돌파를 시도하느냐는 말이다!
“미친 자식들 아냐? 이걸 정면으로 들이받는다고?”
“그게··· 외부에서 도망쳐 오던 생존자들로 인해 대열이 무너지자 그걸 놓치지 않고 따라 붙었습니다.”
“...미치고 환장 하겠군.”
말 그대로 쪽팔린 일, 특히나 이웃한 그로이엔펠트 연대에 부끄러운 일이었다. 비슷한 입장에서 저들은 완벽한 대열을 갖추고 이쪽은 저런 추태라니.
중기병과 경기병이 뒤섞인 엘랑키아 기병들은 일단 물러나긴 했지만 도망치는 게 아닌, 다음 기회를 노린다는 느낌이다.
정말 질려버릴 것 같았다.
당장은 격퇴하기는 했지만, 언제라도 약점이 보이면 돌입해 온다는 것은 전방을 지키는 병사들 머리속에 확실하게 각인이 됐다.
끊이지 않는 긴장은 집중력을 소모시키고, 소모된 집중력은 실수를 유발한다. 그리고 실수는 또 다른 공격을 유발하겠지.
저렇게 근거리에서 적 기병들이 얼쩡거리는데 아군 총병들은 대응 사격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바로 견제 사격을 했다가 총이 비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강령 완벽한 기회를 노려 성공적인 일제사격을 퍼부었다고 치자. 그래서 엘랑키아 기병의 절반을 쓰러뜨렸다고 가정한다.
그런다고 했을 때, 반츠베르크 연대 총병들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적 기병을 격퇴하고 승승장구하는 자신들의 모습이 아니다.
하얀 화약 연기를 뚫고 돌진해오는 나머지 절반, 빌어먹을 엘랑키아 기사들의 모습인 것이다!
커버하는 범위는 짧고 살상력은 적지만 철저하게 약점을 좁히고 적을 막을 수 있는 창병.
그리고 훨씬 긴 사거리와 압도적인 살상력을 가지고 적을 위협하는 총병.
두 병종이 조화되어야 종합적으로 적 기병의 접근 자체를 틀어 막고, 혹시라도 접근하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며 위협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벌써부터 삐걱대며 돌아가니, 오히려 기병들이 들이대며 ‘쏠 거면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라고 위협하는 형국이다.
···이제사 깨달았다. 초전에 엘랑키아 보병 연대와의 싸움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던 이유를 말이다.
“빌어먹을 엘랑키아 놈들!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 거냐!”
연대장 쇠렌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보병 주제에 마치 기병처럼 싸우고 있었고, 물러서는 게 유리한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모든 엘랑키아 놈들이 그런 건 아니라 알고 있었다. 저 보병 연대가 문제다. 어디 마귀가 다스리는 영지에서라도 소집된 병력인지.
그에 비해서 용병인 반츠베르크의 병사들은 상대적으로 몸을 사리는 면이 있었기에, 전투가 지지부진했다는 것이다.
“우아아아아!”
“막아라! 쏴라! 측면에서 쏘라고!”
타타탕! 타다다당!
“이번에는 또 어디서 난리인가?”
“대열에 돌출된 부분이 있었는데, 엘랑키아 기사놈들이 거기를 또 밀고 들어왔습니다!”
“미친 자식들!”
이제는 화를 낼 힘도 없었다.
급하게 대열을 짜다보니, 방어선을 만드는 중대들이 딱 맞아 들어가지를 않았다.
그 바람에 종심이 얕아지거나, 전선을 고르게 긋지 못해 일부가 튀어나오거나 하는 점은 어쩔 수 없었다.
원래 보병 밀집 대형의 모서리 부분은 취약점이고, 만약 기병 상대로 무너진다면 모서리가 무너져서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수비측도 바보는 아니다. 그래서 사각 방어 대형을 갖출 때, 모서리를 보강하는 건 기본이다.
가장 용감하고 경험 많은 창병들을 배치해 공격에 대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선발된 베테랑 총병들로 작은 울타리를 둘러 창병의 보호 아래 접근하는 적을 노리기도 한다.
그런데 방어선 한복판에 돌출부가 생겼으니, 이런 대응책을 갖출 틈이 없었고 이 악마같은 놈들은 여길 노리고 들어온 것이다.
부근의 총병들이 사격을 가해보지만, 각도상 대열을 벗어나지 않으면 충분한 화력을 집중하기 어려웠다.
엘랑키아 기사들도 약아 빠지게도 장전된 총병 대열 앞에 측면을 노출하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타타탕! 타탓, 타탕! 타앙!
오히려 약점을 드러낸 소떼에게 몰려든 늑대 무리처럼, 우르르 몰려든 적 기병들이 바짝 달라 붙어서 권총을 쏴대고 있었다.
밀집 대열을 갖춘 창병들 사이에서 납탄이 명중할 때 나는, 소름끼치는 퍽퍽 소리가 이어진다.
그럴 때마다 피와 뼛조각, 가끔은 부러진 창대가 파편이 되어 흩날린다.
마치 아래에서 누군가가 쑤욱 잡아 당기는 것처럼, 밀집 대열을 유지하고 있던 창대가 하나 둘씩 사라지거나 쓰러져 간다.
“으아아! 끼아아아!”
“멈춰!”
주변에서 동료들이 계속 쓰러지자 공포와 긴장에 신경이 한계에 도달한 반츠베르크 창병 하나가 기성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간다.
총탄이 부수고 지나갔는지 부러진 창대를 마구 휘두르며, 사실상의 자살행위다.
전열을 교대해가며 사격하던 엘랑키아 기병들은 소름이 끼칠정도로 세련된 기마술로, 반쯤 정신이 나간 창병의 결사적인 돌격을 슬쩍 피한다.
그러더니 뒤에서 대기하던 경기병이 시야 밖에서 슬쩍 접근한다.
퍼걱!
사격 무기가 없는 대신 후방에서 기회를 노리던 엘랑키아 경기병은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철퇴를 후려쳤다.
그 위력은 챙 달린 가죽 모자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창병의 귀와 코에서 피가 튀어 나오는 것은 안타깝게 지켜보던 동료 창병들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그렇게 ‘이질 분자’를 처리한 엘랑키아 기병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작업’을 재개했다.
슬쩍 슬쩍 대열을 전진시켜 사각을 확보해 사격 지원을 하려던 총병들의 움직임이 얼어붙은 듯 멈춘다.
대열을 잘못 벗어났다가는 ‘머리가 터진다’ 라는 것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창병 대열이 돌파당하지는 않겠지만, 약점을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적 기병들에게 끊임없이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연대장 쇠렌은 욕설을 퍼부으며 얼마 없는 예비대를 파견해 대열을 보강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엘랑키아 기사들은 그냥 무모하게 정면 돌파만 잘 하는 귀족 기사대가 아니었다.
악랄하고도 악랄할 만큼 상대의 약점을 잘 괴롭히는 전쟁 전문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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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웃한 그로이엔펠트 브리체른 연대의 사정은 그보다 조금 나았다.
“이거 아군에게 조금 미안한데···.”
연대장 에카트 브리체른은 수염이 자라 까끌까끌한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현재, 그의 연대 전방에는 갑주로 완전 무장한 엘랑키아 기사 200여 명과 그들이 탔던 군마가 널브러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엘랑키아 기사들이 기습해온 초반, 불운한 동료 연대보다 한 발 빠르게 방어선을 갖춘 덕이었다.
방어선을 갖추고 기병의 접근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고의적으로 약점을 노출해, 한 차례 적의 돌격을 유도했다.
그 전과가 200여기를 일제 사격과 창병의 짧은 전진으로 쓰러뜨린 것이다.
그렇게 매운 맛을 보여 준 덕분에, 엘랑키아 기사들은 이쪽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면서도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었다.
튼튼한 방어 태세를 확인했을 뿐 아니라, 마치 두툼한 띠처럼 쓰러진 동료 기병 200여 기의 시체가 일종의 나지막한 바리케이드처럼 돌격 진입로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 덕택에 에카트는 한숨을 돌리고 다소 어수선한 연대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문제는 한 번 튕겨나간 엘랑키아 기병대가 ‘좀 더 만만한’ 이웃 연대를 노리고 몰려갔다는 것이다.
그 반대편에서는 조금 전까지 두들겨 패던 엘랑키아 보병까지 달려들고 있었으니, 총체적 난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쉽사리 도울 수도 없었다.
만약 눈 앞의 적 기병만이 적이라면 천천히 중대 단위로 역공을 시도해볼 수 있었겠지만, 지금 주변 전장을 가득 채운 기병의 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대다수는 에카트의 그로이엔펠트 연대를 비롯한 3개 연대가 지원하고 있었던 그룬발트 좌익군 본대를 향해 달려갔다.
아마 그로이엔펠트나 반츠베르크보다 훨씬 준비가 안 되고 체력적으로도 한계에 이르렀을 그룬발트 본대는 상황이 훨씬 나쁠 것이다.
하지만, 에카트는 상황을 그렇게까지 비관적으로 보고 있지는 않았다.
만약 좌익군이 엘랑키아 기사들의 돌격을 어떻게든 버텨 낸다면, ‘살아만 있다면’ 반격의 기회는 분명 오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주변을 스치고 지나간 엘랑키아 기병 대군은 못해도 수천 기.
그렇다면, 디오보르크 공작의 사령부에서 들었던 대로 7천에서 8천이나 되는 기병을 몰아서 배치하고 있었던 엘랑키아 군 좌익이 이동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만한 병력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을리 만무하다.
기만책으로 조금씩 이동하거나, 아군 부대로 시야를 가리거나 하는 방식으로 움직임을 최대한 숨겼겠지.
아마도 붕괴 위기에 처한 엘랑키아 우익군을 두고 보지만은 못했겠지.
허나 그 기병들이 본래 위치에서 떠났기 때문에, 대치하고 있던 그룬발트 우익군이 자유롭게 풀려나 버렸다.
에카트가 생각하기에, 엘랑키아 사령부는 극단적인 도박수를 쓴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한쪽 측면을 비우고, 좌우익군 모두를 집결시킨 것이라 할 수 있으니까.
일시적으로 압도적 우위를 점할 수는 있겠으나, 이는 그룬발트의 좌익군에 대한 지엽적인 우위에 불과하다.
엘랑키아의 ‘도박’이 성공하려면, 으뜸패인 기병 대군이 최대한 빠르게 그룬발트 좌익군을 궤멸시키고 원래 위치로 돌아가거나 그룬발트 중앙군에게 치명타를 입혀야 했다.
하지만 그룬발트 좌익군이 다소 지쳐있다고는 해도, 2만을 넘는 대군이다.
단기간에 궤멸시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며, 무리해서 밀어 붙인다고 하면 엘랑키아 기병대가 입는 피해도 막대할 것이다.
그렇게 전력이 감소하고 이미 전장을 한 번 왕복해서 체력까지 낭비한 엘랑키아 기병의 충격력은 전과 같을 리가 없었다.
그들이 돌아갔을 때면, 이미 그룬발트 중앙군도, 자유로워진 우익군도 대기병 준비는 끝난 상태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이 도박수는 악수가 되고 만다.
하물며, 현재 전무후무한 그룬발트 대군의 지휘는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참모들이 맡고 있었다.
방향성은 다소 다르지만 같은 ‘전쟁 전문가’로서, 에카트는 자이트리츠의 지휘를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특히 디오보르크 공작을 보좌하는 만프레트 경은 에카트도 잘 알고 있었다. 숨 쉴 틈을 틀어막아 질식하게 만드는 것 같은 철저한 전술가였으니까.
이제 엘랑키아 군이 이길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는 대단한 전쟁 군주라는 이야기는 들었다. 실제로도 연전연승을 했다 알고 있고.
농담으로라도 훌륭한 총사령관이라 하기 힘든 이쪽의 디오보르크 공작과 비교하면 분명 뛰어난 지도자겠지.
허나 만프레트 경이 참모장으로서 보좌하는 순간 그런 격차는 아무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엘랑키아 사령부에 그만한 기량을 가진 전술가라도 있지 않으면 말이다.
===전투 서열===
북부전선 그룬발트 지휘부
[중앙군]
총사령관 디오보르크 루프트 폰 제블링 공작
총참모장 만프레트 그로블 폰 자이트리츠
[좌익군]
지휘 레트폴레 아티오크 폰 벤셀샤프 후작
참모 뮤에르니히 빌팍스 폰 자이트리츠
[우익군]
지휘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
참모 타를라 니케 폰 자이트리츠
북부전선 엘랑키아 지휘부
[중앙군]
총사령관 다고베르 드 팔라스 2세 국왕
[좌익군]
지휘 아르밀 드 브라뇰 공작, 왕실군 원수
[우익군]
지휘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 왕실군 원수
참모 조뤼크 드 브라셀노 자작, 왕실군 부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