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8. 폴름스 전투, 셋째 날
에카트는 아직 도착하지 못한 동료 연대장을 떠올린다. 언제나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하는 인물인데, 전장에 늦은 것은 의외였다.
뭐, 당초 계획했던 루트를 완전히 수정해야 했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같은 용병단 산하의 자매 연대라고 할 수 있는 그로이엔펠트 셀커크.
그 연대장인 모르네드 셀커크는 용병단의 간부들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하지만 놀랍도록 유능한 인물이었다.
원래 다른 용병단에서 장교로 복무한 경험이 있다던데, 그로이엔펠트에 입대하자마자 순식간에 공을 세우고 고속승진해, 연대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두 연대는 이미 여러차례 전장에서 손발을 맞춰본 경험이 있었다.
만약 두 그로이엔펠트 연대가 합류하여 전선을 짰다면, 설령 두 배의 적이 상대라도 전혀 밀리지 않을 자신도 있었고 말이다.
현재 전장에서 함께하고 있는 동료에게는 다소 실례가 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만약··· 여기에 반츠베르크가 아니라 그로이엔펠트 셀커크가 있었다면 적 연대의 방어를 진작에 돌파했고, 적 후방을 압박하고 있었으리라.
뭐 그거야 ‘그랬다면 좋겠다’ 는 것이고, 안타깝게도 동료 연대는 도착하지 못했다. 한참동안 파견지인 나우데사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엘랑키아 군이 랄렌 강 물길을 막았기 때문에 멀리 바다를 통해 우회해서 온다는 모양이다.
결국 폴름스 전투가 시작될 때까지 도착하지 못했으니 아쉬운 일이다.
“자,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전선을 다른 아군에게 인계하기로 하자. 조금 속도를 올려볼까?”
“예, 연대장님. 전달하겠습니다!”
에카트는 불필요하게 휘하 병력을 잃는 것이 질색이었다.
그로이엔펠트의 숙련 용병들은 전투에 희생이 필요하며 언제든 이를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돈 받고 싸우는 게 직업인 용병이다 보니, 간혹 사상자가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유리하다고 판단이 되면, 다소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밀어 붙이고, 불리하다는 판단이 서면 최대한 빨리 병력을 빼서 희생을 줄인다.
철저하게 위험을 피하는 지휘를 한 것이 아무 배경도 없는 평민 출신 에카트가 그룬발트 최고 명문 용병단의 연대장에 오르게 된 이유였다.
용병과 상인들의 땅, 주디칼리에는 ‘사람은 큰 성공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작은 실패를 막지 못해서 망한다’ 라는 격언이 있다.
에카트는 비록 그룬발트 출신이지만, 계산에 밝은 주디칼리 인들의 말에는 동의하는 바가 있었다.
괜한 기대에, 감정에 빠져서 막심한 손해가 분명한 길을 택한다, 그런 선택지는 에카트의 사전에는 없다.
가령, 지금 그의 연대가 ‘부수기 직전’인 엘랑키아 보병 연대처럼 말이다.
기사들이 그렇듯, 약간의 후퇴도 용납하지 못하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정면으로 대응하는 것 밖에 모르는 멍청이들.
그로이엔펠트의 용병들은, 특히나 에카트의 지휘를 오래 받은 그로이엔펠트 브리체른의 용병들은 이런 적을 상대하는 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적당히 어울려주는 척 하면서, 상대의 힘을 흘려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엘랑키아 군의 기세는 전선에 도달하는 순간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다.
에카트가 보기에 엘랑키아 군의 지휘관은 이런 전후 사정을 이해할 만큼 경험이 많아 보이지는 않지만, 나름 위화감을 느끼고는 있을 것이다.
즉, 죽어라 용은 쓰는데 손맛이 없는 상황.
거기에 노련한 그로이엔펠트의 숙련병들이 ‘강점’을 노리는 전술로 차츰 적을 약화시킨다.
반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용병대장으로서, 에카트는 그런 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경멸한다 해도 좋겠지.
군인이라기보다 전사에 가까운 자들. 그들이 전장에서 흘리는 것은 자기 목숨 뿐이 아니다. 힘이 너무 들어간 나머지 승리까지도 흘리고 만다.
그럼 슬쩍 피했다가, 적이 흘린 승리를 줍기만 해도 전공이 된다.
뭐 말은 쉽지만, 나름 전황을 읽는 센스와 ‘힘으로 덤벼오면 이를 슬쩍 흘려보낼 수 있는 노련함’이 없으면 흉내도 내지 못할 마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새로 보강된 3개 연대의 지휘를 맡은 전쟁관의 젊은 참모··· 자이트리츠 가문의 뮤에르니히라고 했던가.
이야기를 많이 나눠본 적은 없지만, 그의 지휘는 에카트와 비슷한 방식이었다. 그런 점에서 신뢰할 수 있었다.
엘랑키아 군의 전열을 구성하는 3군 중, 최약체인 우익군을 몰아붙여 본군에서 떨어지게 만들었고···.
그 연결 고리를, 새로 보강된 정예 3개 연대를 투입해 완전히 부숴 버리고 있었다.
개념적으로는, 에카트가 이 힘만 넘치는 엘랑키아 보병 연대를 상대로 하는 상대법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진! 적진을 일거에 부순다!”
“명령 받았습니다!”
“자, 예비대 역할 끝났다. 밥 값 하러 가자.”
아까 에카트가 내린 명령이 전파되자, 다소 느긋하던 그로이엔펠트 용병들의 분위기가 바뀐다.
창병들의 압박이 점점 강해지고, 총병들도 한 걸음씩 다가가며 공격적으로 교대 사격을 시작한다.
‘임무 완수’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힘차게 압박을 시작하는 부하들이 믿음직하다는 생각을 하며, 언제 대기하고 있는 반츠베르크로 연대에 신호를 보낼까 고민한다.
일단 그로이엔펠트 연대가 적진에 구멍을 뚫으면, 초전의 패배로 칼을 갈고 있는 반츠베르크 연대가 돌격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에카트 입장에서야, 아무래도 예상 밖의 사태가 터질 수 있는 난전을 피할 수 있어서 좋았고, 쇠렌 입장에서는 복수를 할 수 있으니 서로 좋은 일이었다.
“전령! 반츠베르크 연대의 쇠렌 연대장에게 전언을 보낸다.”
“여, 연대장님···.”
“으음?”
명령을 받아 다가온 전령병이 눈을 크게 뜨고 맞은 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카트 역시 전령이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보고, 상황을 파악했다.
모든 게 예상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전령! 쇠렌 연대장에게 전달해라. 우리 연대 측면에 바짝 붙어 있으리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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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장님, 갑자기 적의 압박이 심해졌습니다!”
“현재 상황은? 즉시 지원군을 보내게!”
제르티에 드 라글랑 연대장은 마지막 예비대를 파견하는 데 승인했다.
갑자기 적 연대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진다. 분명 전선이 크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적이 코 앞에 칼을 들이민 것도 아니다.
그런데, 아군 후방의 지휘부에 있는데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어깨를 내리 누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분명··· 샹다메리 전투에서 부대 전체가 붕괴되어 간신히 살아 돌아왔던, 아퀴오슈 연대에 참전했던 친척이었던가.
갑자기 전선을 돌파해 후방에 나타났던, ‘이단자 부대’에 대한 이야기였다.
분명 수적으로 호각인 적이었으나, 정면으로 맞서기조차 힘들었으며 10분도 되지 않아 전열이 붕괴되었다는 이야기.
설마 이런 상황이었던 것일지.
적 창병들이 전혀 피하는 것 없이 강공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총병들은 서슴치 않고 바짝 다가와서 총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불과 25미터 안팎의 거리를 사이에 둔 사격전이 여기저기서 멀어졌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지만, 이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사격의 위력이 파멸적이었다. 서로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하는데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빈 자리를 채워가며 새로운 피해자를 만들어 낸다.
연대장이라는 입장이라 물러서거나 피하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말 그대로 미친 짓이었다.
그리고 그 피해는 이미 열세에 처해 있던 엘랑키아 군 쪽에서 먼저 확산되었다.
중대장이 사망한 중대의 대리를 맡은 중대장이 또 다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달된다.
다음으로 중대장 직을 인계받은 이가 누구인지 보고도 오지 않았으나, 누군가의 지휘 아래에 병사들이 용케 버티고 있던 방어선이 무너진다.
이미 눈에 보일 정도로 결원이 극심하던 방어선의 한 귀퉁이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물리적으로 버텨내지 못한 창병들이 밀려나고, 적의 창 끝이 마침내 엘랑키아 군의 대열을 뚫고 침입해 온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 와중에도 적군은 대열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거대한 사각 대형이 드 라글랑 연대의 방어선을 짓눌러 부수고 있었다.
대열이 무너진 창병들이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고, 주변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총병들 또한 화승총을 거꾸로 들고 몽둥이처럼 휘두르며 저항한다.
허나 중과부적이다. 이미 힘이 다해 뚫린 방어선을 잔존 병력이 밀어낼리 만무한 것이다.
허나 지원 보낼 병력이 없다. 마지막 예비대는 방금 다른 방면으로 보내 버렸기 때문이다.
“연대 지휘부, 모두 검을 뽑아라.”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방법이 없었다. 제르티에가 먼저 엄숙한 태도로 검을 뽑고 명령을 내린다. 참모들도 각자 무기를 꺼낸다.
연대장과 참모, 거기에 소수의 호위병과 전령까지.
그 한 줌도 되지 않는 이들이 패배 직전의 드 라글랑 연대가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예비 전력이었다.
나머지는 다른 전선 어딘가에서 창이든 총이든 들고 결사적으로 싸우고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후퇴는 불가능했고, 이대로는 조직적인 저항도 불가능해질지 모른다.
하지만 제르티에는 패배를 인정할 마음이 없었다.
“승리를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소후작님.”
“...누가 할 소리를.”
그들은 연대장과 참모들이기도 하지만, 명문가의 계승자와 그 가신들이기도 하다. 아니, 훨씬 오랜 세월을 그렇게 함께 살아온 사이이다.
자신의 손바닥에 딱 달라붙는 검 손잡이의 감촉을 느낀다. 자신의 성인식 날, 아버지가 선물로 준 검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믿고 검과 가병, 그리고 가신들을 맡겨 주었지만 어리석은 아들은 지켜내지 못했다.
후계자와 가문의 중신, 그리고 정예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면 상심이 크겠지···.
허나 적어도 드 라글랑 후작가의 이름은 겁쟁이로 남지는 않으리라.
“모두 가자! 드 라글랑에는 겁쟁이는 없다는 것을 그룬발트 놈들에게 보여주자!”
“알겠습니다!”
“드 라글랑을 위하여!”
제르티에와 그를 따르는 소규모 돌격대가 호전적인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려는 찰나···.
갑자기 전장의 분위기가 바뀐다.
가만히 서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던 압박감이 서서히 사라진다.
사라진 것은 압박감 뿐이 아니다. 안간힘을 쓰며 저항하는 아군을 밀쳐내며 슬금슬금 영역을 확장하던 적 밀집 대형의 전진이 멈추었다.
적병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혼란스러움이 느껴진다.
무언가 일어나려 한다.
아니,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다고베르 2세 폐하의 중앙군에서 지원을 보냈나?
그게 아니라면, 이미 중앙군이 붕괴되어 이를 추격하느라 이쪽에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나?
거의 희망사항에서 피해망상에 가까운 생각을 짧은 시간 동안 거듭하던 와중, 참모가 갑자기 자신의 팔을 잡아 끌며 엉뚱한 방향을 가리킨다.
“측면을 노리던 그룬발트 기병들이 멀어집니다!”
“뭐라고? 어째서!”
그 말 대로였다. 기병이든 보병이든 약점이 보이면 물어 뜯어 주겠다는 듯, 여유만만한 태도로 상황을 관망하던 그룬발트 군 용기병들이 갑자기 물러서고 있었다.
무질서하게 도망치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기마 대열은 유지하고 있었으나 멀어지는 것은 분명했다.
적이 무언가 두려워하고 있었다!
설마··· 설마?
“일단 돌격은 취소하고 지휘부로 돌아간다! 전령! 두 명은 연대 측면으로 향해 혹시 특별한 보고가 있는지 전달하도록!”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기대감과 불안함을 동시에 안고, 제르티에가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장을 울리는 진동이 그들을 엄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