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7.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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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둘러싼 포위망을 돌파하고자 시도된 폴름스 주둔군의 출성 돌격은 완전히 실패했다.
여지껏 소극적으로 수비만을 해온 입장에서, 처음으로 주도권을 가져오고 더 나아가 전장의 승패를 결정하겠다는 회심의 일격이었으나···.
무수히 많은 희생만 남겼을 뿐, 재기불능의 비참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포위군의 전과는 주변에 널리 전해지지 못했다.
전체 전장을 조망하자면, 아무래도 지엽적인 일이기 때문이었을지.
전과야 어떻든, 순식간에 끝난 전투에 참전 인원도 너무 적었다. 게다가 승리의 진정한 결과를 보려면,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야 했다.
역설적으로, 아무위기 없이 단시간에 폴름스 주둔군의 의도를 분쇄해 버려 더욱 승리가 빛나지 않아 보이는 점도 있었다.
차라리 폴름스 측의 기습 의도가 일부 성공하여, 방어선 일부가 돌파되고 혈전 끝에 문제를 수습했다면 어땠을까.
오히려 위기를 해결하고, 후방을 안정시킨 공로를 누구나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세상 많은 일이 그렇듯 티가 나지 않고, 소리를 내지 않은 전투였기에 오히려 묻혀 버린 일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승리를 위한 병사들의 공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같은 시간대에··· 훨씬 더 거칠고 운이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비교되는’ 대상도 있었다.
엘랑키아 군 북부 전선, 우익군에 속해 측면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적을 막는 드 라글랑 연대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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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장 제르티에 드 라글랑은 침통한 얼굴로 연대 참모의 보고를 듣는다.
“적 화력이 생각보다 강합니다··· 제르티에 경.”
“좌측면은 괜찮은가?”
“지금은 잘 버티고 있습니다만···.”
“필요하다면 예비대를 보내게.”
“알겠습니다. 최대한 버텨보겠습니다.”
타타타타탕!
또 한번 적진에서 일제사격이 훑고 지나갔다.
“흐으윽, 큭! 맞았어!”
“아악!”
“버, 버텨라!”
“쏴라아!”
타타타탕! 타타탕!
분명 일방적으로 얻어 맞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쪽도 열심히 반격탄을 날리고 있었다.
창병 사이의 힘싸움도 마찬가지였다. 격렬하게 맞서고 있었고, 다소 기량이 떨어지더라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싸운다.
“어째서··· 어째서냐···.”
제르티에의 굳게 악 문 이빨 사이에서 신음소리나 다름 없는 중얼거림이 흘러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대는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었다.
‘동등하게 싸우고 있다’
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군 기병을 몰아낸 적 기병에게 협공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한 번 패한 상황에서도, 엘랑키아 기병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측후방을 견제해주고 있었으니까.
오로지 전방의 적, 새로 나타난 적만 상대하면 되었다.
처음으로 공격해온 적 보병 연대를 격파한 이후, 바로 이어진 연전이다. 그래도 자신있었다.
이어진 전투로 다서 지쳤을 수는 있어도 체력은 충분했으며, 방금 승리한 덕에 기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르티에는 지휘관으로서, 혹시라도 적이 이상한 수를 쓰는지, 한 번 물러간 나머지 보병 연대가 측면을 위협하는지 면밀하게 살피기는 했다.
그렇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적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도전해왔다. 어째서 저렇게까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지런한 대열을 갖추고.
그렇게 교전이 시작되었고, 그 시작은 매우 평범했다.
정직한 전진, 정직한 사격, 정직한 힘싸움.
제르티에의 연대 역시 정면으로 맞이했다. 방금 전의 승리로 기세가 올라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렇게 사격을 주고 받고 창대가 엮인 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완전히 밀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차리는 데 늦었다. 대등하게 싸우는 줄 알고 전황을 살피고 있었더니, 어느새 확 밀려 있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크으읏, 크악!”
“물러서지 마, 멍청이들아!”
비슷하게 싸우는 것 같지만, 계속 아군 대열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고 전선이 밀려나고 있었다.
몇몇 손재주가 뛰어난 창병들에게 농락당하며 슬금슬금 밀리는 것이 아니다. 그냥 무슨 짓을 해도 전선을 유지할 수 없다가 맞는 말이었다.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워 제르티에는 자신도 모르게 턱을 닦았다. 진득한 식은 땀이 턱에서 목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라는 점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제르티에 드 라글랑 소후작이 지휘하는 드 라글랑 연대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드 라글랑 후작가에서 창설한 연대였다.
연대 자체가 최근에 창설되어 역사가 길지 않았고 연대장 제르티에도 초보 연대장이다.
하지만 군사 귀족 명문가의 후계자로서 틈틈이 군사 경험을 쌓아 왔으며, 가신들로 이루어진 휘하 장교들 중에는 베테랑 군인들이 꽤 많았다.
실제로도 지금까지 잘 싸우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도무지 지금 상황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당장 대열 여기저기가 뚫리고, 군기를 빼앗기고, 병사들이 전선을 버리고 도망가는 ‘패배의 징후’가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설프게라도 이제 전황을 읽는 데 자신이 붙었기 때문일지, 연대장으로서 제르티에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대로 계속 시간이 흐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연대는 붕괴할 것이다.
물이 담긴 항아리로 비교하자면, 한 두 군데 구멍이 뚫려 물이 흘러 나오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그렇다면 망가진 부분을 고치면 된다.
마치 항아리 자체가 어느 순간, 원인도 모르게 산산조각나서 폭발하듯 사방으로 흩어지는 그런 상황.
어떻게 손을 쓰기도 전에, 항아리 안의 물은 쏟아져 되돌릴 수 없게 되리라.
“제6 중대에서 지원 요청이 왔습니다! 적 창병대가 전진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 알겠다. 곧 지원을 보내겠다고 전달하라. 조금만 버텨 달라고!”
“예엣, 연대장님!”
하얗게 질린 전령이 자신의 지시를 받고 전선으로 돌아간다.
이제 예비대로 나누어 놓은 임시 분견대도 2개 밖에 남지 않았다. 이들을 다 소모하고 나면··· 그는 지휘관이 아니라 방관자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비대를 파견한 들,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까?
공포와 우려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회전시키며 고민해 보았지만 방도가 없었다.
기병의 지원을 받는다?
지금 그나마 적 기병으로부터 안전한 것은 그들이 대치 상황을 유지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럴 수 없다. 이쪽이 힘이 빠진 것을 알면 늑대 무리처럼 달려들어 다시 물어 뜯으려 하겠지.
프레니히 백작의 사령부에 지원 요청을 한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마 본대도 예비대는 없을 것이다.
아니, 본래는 제르티에의 연대가 연대급 부대로서는 마지막 남은 예비대였다. 그들이 나섰다는 것 자체가 큰 위기라는 것이었고 말이다.
전장에서 부하들이 쓰러지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들은 드 라글랑 후작, 아버지를 섬기는 신하들이기에 앞서서 자신의 고향 지인들이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들이 속절 없이 쓰러지고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잠시 부대를 후퇴시키며 적의 압박을 줄일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곧 머리속에서 지운다.
적군은 방금 물러난 보병 연대를 포함해 충분한 예비대가 있을 테고, 아군은 아니다.
여기서 병력을 물리게 되면, 드 라글랑 연대는 잠시 여유가 생길 것이다. 어쩌면 재정비해서 좀 더 나은 상황에서 전투를 지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에랑키아 군 우익의 측후방이다.
가뜩이나 다고베르 2세 폐하의 중앙군과 연결이 끊어져 적이 밀고 들어온 상태인데, 여기서 공간을 내주게 되면 적군은 아군 후방으로 밀고 들어가게 되리라.
그럴 수는 없었다. 존경하는 프레니히 백작, 원수 각하의 군을 위험에 빠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
“전령! 전령 있나?”
“옛, 연대장님!”
“우익 사령부에, 프레니히 백작님께 전령을 보낸다.”
“알겠습니다. 무슨 내용을 보냅니까?”
“내용은···.”
제르티에는 아주 잠깐, 조금 더 망설이며 부하들을 눈에 담았다.
겹겹이 늘어선, 갑주를 걸친 드 라글랑 후작가의 보병들의 늠름한 뒷모습.
애석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그들에게 승리를 약속할 수 없을 것 같다.
···무사 귀환조차도 말이다.
“프레니히 백작 각하께, 드 라글랑 연대는 적의 새로운 공격을 막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희는 여기서 끝까지 적을 막을 생각입니다. 이상이다.”
“드, 드 라글랑 연대는 적의 새로운 공격을 막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희는 여기서 끝까지 적을··· 막을 생각입니다. 이상입니다!”
“그래, 정확하다. 어서 우익 사령부로 가거라!”
“옛, 연대장님! 다녀 오겠습니다!”
전언의 내용에 충격을 받은 듯한 어린 전령병이 눈을 크게 뜨고 제르티에에게 경례를 붙인다. 제르티에는 슬픈 눈으로 고개를 끄덕여 답례한다.
전령이 ‘다녀 오겠다’ 라고 말했으니, 적어도 그가 돌아올 때까지는 자리를 지키지 않을 수 없겠다.
“전선을 좁히고 종심을 늘린다!”
가능한 똘똘 뭉쳐서 오래 버틴다. 대신 기동성을 상실하고, 전선에서 물러날 가능성은 한 없이 낮아진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라고 연대장 제르티에는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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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전선을 좁히고 측면을 후퇴시키고 있다고?”
“예, 연대장님.”
에카트 브리체른, 그로이엔펠트 브리체른 연대의 지휘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그가 밀어붙이고 있던 엘랑키아 보병 연대가 갑자기 수세를 취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흐음··· 도망칠 줄 알았는데, 버티는 건가?”
“더 물러설 데가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름 측면을 지키는 정예부대일 텐데.”
“정예? 자네는 저들이 정예로 보이던가?”
“그건 아닙니다만··· 엘랑키아 보병은 소문이 나쁘지 않습니까? 자기들 사이에서는 정예일지도 모르지요.”
“흐음···.”
에카트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금 그가 상대하고 있는 엘랑키아 보병들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기량은 평범 이상이었고 사기도 매우 높았다.
하지만 노련한 그로이엔펠트의 숙련병들이 노린 것이 바로 이 높은 사기였다.
딱히 연대장인 자신이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었다.
첫 교전이 시작되자마자 전방 중대에서 그렇게 판단하고 싸우는 방식을 정한 것이다. 연대장으로서 이를 승인했을 뿐이고.
근본적으로 이 ‘귀족적인’ 엘랑키아 보병 연대는 그룬발트에서 통상적으로 만나는 용병이나 귀족 가문 소속의 보병 연대와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보병이라기 보다는, ‘말에서 내린 엘랑키아 기사들이 장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집단’에 가까웠다.
누구보다도 자신감이 넘치고, 이상은 높았으며, 겁을 먹거나 물러서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다.
그래서, 엘랑키아 귀족 기사들을 상대하는 것과 비슷하게 상대했다.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적진에 취약점을 만들고, 숙련병들이 거기를 집중적으로 노린다.
그럼 긍지 높은 엘랑키아 장교를 포함해 ‘가장 용맹한’ 자들이 그 약점을 채우기 위해 부하들을 지휘하며 헐레벌떡 자신의 역할을 다 한다.
그렇게 오히려 약점이 아니라 강점부터 노려간다. 설령 쓰러뜨리지는 못할지라도 주변을 이끌어야 할 이들이 백병전에 급급하게 만드는 것만 해도 이미 성과였다.
비슷한 교환비가 나올지라도, 대열을 이끌어야 할 장교와 숙련병들이 빠져버린 엘랑키아 군의 밀집 대열은 점점 약해져 간다.
마치 천천히 작용하는 마비독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
“적을 무너뜨리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1시간, 아니 40분 정도면 전선 몇 군데는 뚫고 들어갈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래도 버틸 놈들이긴 하지만요.”
“그쯤 되겠지··· 우리가 끝장을 낼 건 아니니, 다른 아군이 돌파할 공간을 만드는 게 중요하겠군.”
에카트는 연대장으로서 아쉬운 게 있었다.
원래 이번 전투에는 또 하나의 그로이엔펠트 연대가 참전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도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