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6.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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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망 너머 멀리서는 여전히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폴름스 세 곳의 성문을 통해 뛰쳐나온 출성 돌격대에 의해 벌어졌던 전장에서는 이미 총성이 끝난 상황이었다.
“흐윽··· 커허억!”
“으으으··· 으아··· 살려줘···.”
“커헉, 쿨럭!”
마차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는 거대한 성문은 활짝 열린 채로 여전히 닫히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처음에야 가능한 많은 병력을 일제히 출성시키기 위해서 활짝 연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간신히 목숨은 건진 부상병들이 좀 더 운이 좋은 동료들의 부축을 받거나, 스스로 비틀거리거나, 그도 안되면 기어서 라도 성내로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문 안팎은 부상자들과 그들이 내는 비명과 신음으로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서··· 성문을 닫아야 하는데···.”
“그럼 부상자들을 옮기는 것을 도우시오!”
“하지만··· 며, 명령이··· 제기랄, 알겠소이다.”
성문의 수비와 열고 닫음을 책임지는 수문장 입장에서야, 출성 공격이 실패로 끝났고 철수가 마무리 되었으니 문을 닫아야 하는 게 맞는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성문 안쪽으로 돌아가려는 부상병들로 가득한 와중 문을 닫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할 뿐더러, 만약 그런 짓을 했다가는 초조하게 성 밖을 지켜보고 있던 귀환병들에게 맞아 죽을 것이다.
그 정도로 분위기는 흉흉했다.
다행히 성 밖의 엘랑키아 군이 공격을 준비하는 낌새는 없었다.
그들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싶을 정도로 쌓아 놓은 바리케이드는 폴름스 수비군이 나가는 것도 방해했지만, 성 안으로 들어오려는 그들 역시도 방해할 것이고 말이다.
몇몇 병사들이 눈치를 보다가 성문으로 다가가 생존자들에게 손을 내민다.
상처 부위가 당겨서인지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부상병들은 아군의 도움을 받아 성문 안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다행히 엘랑키아 군은 움직이지 않는다.
성문 돌파를 시도할 낌새가 없을 뿐 아니라, 장거리 저격이나 포격으로 공격하지도 않는다.
‘나오는 것은 마음대로가 아니지만, 돌아가는 것은 마음대로 해라’
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듯.
그렇게 많은 생존자들이 성문 안으로 옮겨진다.
수문장은 마지막으로 성문 밖을 내다본다.
한때 폴름스의 자랑이었던 남동쪽 정문 앞은 버려진 무기와, 돌아오지 못하고 숨이 끊어진 시체들로 가득했다.
성문을 나가자마자 쓰러진 것인지, 숨이 붙어 있는 채로 돌아오려다 사망한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서, 성문을 닫아라!”
“성문을 닫아라아!”
명백하게도, 성문 밖에는 아직 생존자들이 잔뜩 남아있었다.
별로 넓지도 않은 전장에 빼곡하게 깔린 불운한 수비군들의 시체 더미에서는 누가 내는지도 모를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대체 3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몇 명이나 죽은 거야··· 성문에서 포위망 방벽까지 이르는 200미터 정도 되는 좁은 공간은 출성했던 수비군의 시체로 빼곡하게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구하러 갈 수 없다.
성문 부근의 부상병들을 공격하지 않은 엘랑키아 군이라고는 해도, 전장 한가운데까지 나아가도 못본 척 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애초에 생존자를 구하러 오는지, 방벽을 공격하러 오는지 구분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일 테니까.
···그리고 자력으로 성문 근처까지도 오지 못하는 큰 상처라면···.
수문장은 고개를 돌려 성문 안쪽에 깔개도 없이 방치되어 바글거리는 부상병들을 바라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문을 닫는다! 하나, 둘!”
“하나 둘!”
거의 한달 동안 닫혀있다가 출성 공격을 위해 잠시 열렸던 문이 바닥 긁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닫힌다.
공포에 질려 성문 밖을 바라보던 생존자들의 눈 앞에서, 마침내 육중한 문이 완전히 닫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겼다! 이겼어!”
“이겼다아아! 엘랑키아 만세!”
“트랑카벨을 위하여어!”
그제서야 비로소, 짧지만 치열했던 화력전의 승리자들이 지르는 승리의 환성이 들린다.
익숙하지 않은 엘랑키아 억양에, 낯선 지명까지 섞여 뭐라고 외치는지 수비군 병사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성문이 닫히고 전투가 끝났다고는 해도,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다.
무사히 돌아온 이들은 엉망으로 뒤섞인 상태로 자기 부대를 찾고 점호를 한다.
부하들의 숫자를 점검하던 장교들의 얼굴이 썩어 들어간다.
얼마나 많은 숫자가 돌아오지 못했는지 구체적으로는 몰라도, 그 표정만 봐도 대충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게다가 가장 비참한 것은, 성문 안쪽을 가득 채우다 시피한 부상병들이다.
군의관은 물론, 도시의 민간 의사들까지 불려나와 환자들을 보고 있었으나, 경상자를 포함하면 갑자기 천 명 단위로 늘어난 환자를 보는 건 큰일이었다.
“으으으··· 아악!”
“살려줘··· 살려주세요 제발···.”
특히나 끔찍한 것은 엘랑키아 군이 막 성문에서 뛰쳐 나오는 밀집한 상황에 쏘아댄 구포탄 폭발에 휘말린 부상병이었다.
도화선을 박은 사람 머리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구형 포탄은 마치 절구처럼 생긴 뭉툭한 구포에서 발사되어 곡사로 날아간다.
그리고 도화선이 다 타들어가면, 내부의 화약이 폭발하면서 금속으로 된 탄체를 찢어 사방으로 비산시킨다.
사거리와 명중률 때문에 잘 사용되는 무기는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절대적으로 위력을 발휘했다.
“끄으윽, 그윽···.”
고통스러운지 온 몸을 비틀며 신음하는 수비군 병사는 얼굴에 크고 작은 금속 파편이 수도 없이 많이 박혀있었다.
흉갑도 파편에 맞은 흔적으로 엉망으로 우그러져 있었다.
그나마 갑주로 보호받는 가슴이나 이마는 괜찮았지만, 노출된 얼굴은 파편과 화상으로 엉망진창이다.
몇 번이나 군의관들이 그 주변을 스쳐 지나가지만 섣부르게 손을 대지 못한다.
저런 상처로는 어차피 죽을 것이다.
손을 대더라도 살릴 자신이 없다.
이런 이유도 있겠지만, 결국은 소름끼치게 깊이 파고든 파편을 일일이 제거할 시간이 없었다.
냉혹한 현실이지만 비교적 시간이 덜 걸리는 상처를 여러 명 치료하는 선택을하게 되는 것이다.
보다 덜 끔찍할 뿐이지, 방치하면 죽음에 이를 심한 상처를 입은 병사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포위망의 엘랑키아 군이 쏟아 부었던 화력은 구포만 있던 게 아니었기에 팔이나 다리를 잃은 병사도 적지 않았다.
좋지 않은 부위에 총탄을 맞아 출혈이 극심한 병사는 말 할 것도 없었다.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이든, 단순히 운이 나빴기 때문이든, 피웅덩이를 남기고 숨이 끊어지는 부상병이 점점 늘어난다.
동료들이 죽어가는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병사들의 얼굴은 혼이 나간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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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성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 지휘용의 망루에서는 폴름스의 선제후 네프셀시엔이 이마에 손을 짚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섬세하게 길고 가는 하얀 손가락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충격으로, 또 분노로.
“송구하오나··· 세 곳 모두의 출성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고 합니다, 전하.”
애초에 남동쪽 방면의 공세가 주공이었고, 나머지는 의도를 숨기고 적 병력의 집결을 막기 위한 조공이었다.
애초에 투입된 병력의 질과 규모 자체가 달랐으니까.
주공이 이렇게 끝난 이상, 나머지 방면이 어떨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피해는? 피해는 얼마나 되나?”
“확실한 것은 더 알아보아야 하지만··· 남동 방면에서는 피해가 2천 명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으으윽···.”
“다, 다른 방면은 다행히 피해가 그렇게 크지는 않다고···.”
“투입된 병력이 적으니 그렇겠지!”
홧김에 말한 선제후 네프셀시엔이 이를 부드득 간다. 보고를 올리던 중신들이 어쩔줄 몰라하며 고개를 조아린다.
남동 방면의 성문에 집결한 출성 돌격대의 숫자는 5개 연대로 6천 명을 조금 넘었다.
30분 정도의 교전 시간 동안, 돌격대는 세 차례에 걸쳐 파상 공세를 퍼부었고···.
그 삼 분의 일이 시체가 되어 폴름스로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어느정도 적도 준비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했고, 막대한 사상자를 감수해야 한다는 각오도 했다.
나름 이쪽도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주공을 숨기기 위해 세 방향에서 공격을 개시했으며, 또한 세 차례에 걸친 파상 공세를 계획한 것이다.
또한 이 좁은 전장에 무려 5개 연대를 송곳처럼 집결시킨 것이다.
전과나 시간이 문제이지, 어떤 형태로든 성공은 할 것이라 확신하고 시작한 공세였다.
···그런데 그 결과는···.
“다음 공격은?”
“저, 전하? 다음 공격이라 하심은···.”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않은가? 같은 위치를 공격하든, 다른 성문을 통해서 공격하든 재공격을 준비하란 말이다!”
“그··· 그게··· 전하, 이제 병력이···.”
“폴름스에는 여전히 2만에 가까운 병력이 남아있다! 무도한 엘랑크 족이 감히 연리목 세계수의 그림자를 침입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는 법이니!”
네프셀시엔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중신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다.
“선제후 전하, 외람되오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뭔가!”
옆에서 지켜보던 용병단장 하나가 의견을 말한다. 그의 연대는 오늘 공격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네프셀시엔이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훽 돌리자, 그 기세에 눌렸는지 움찔했으나 침착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그의 고용주는 카젤하겐의 선제후로, 폴름스의 선제후인 네프셀시엔과는 협력 관계이지 주종관계는 아니다.
그렇기에 비록 조심스럽기는 했으나 할 말을 하고 있었다.
“오늘 공격으로 모두 9개 연대가 작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병력 피해야 크든 작든, 생존자들도 탈진 상태가 되어 반드시 휴식과 재편성이 필요합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병력이 있지 않은가? 가령 귀경의 연대를 포함해서···.”
“그렇게 하시면 폴름스 성벽은 누가 지키겠습니까!”
홧김에 자기 부하들까지 재앙이나 다름 없는 자살 공격에 쓸려 들어갈 분위기가 되자, 용병단장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다.
연리목 세계수의 도시 폴름스는 그룬발트 제국 전체에서, 그리고 아마 대륙 전체로 따져도 손꼽히게 면적이 넓은 도시이다.
그만큼 도시를 둘러싼 성벽도 길었고, 수비군의 숫자도 많이 필요했다.
단순히 성벽을 지킬 뿐 아니라 혹시라도 적이 성벽 안으로 침투할 때를 대비한 예비 병력도 반드시 필요했다.
자칫하다가는 억지로 비집고 들어온 수백 명, 어쩌면 수십 명의 병력도 대응 못해서 질질 끌려다니다 병력과 자산을 소모해 패배로 직결되는 수도 있으니 말이다.
“...만에 하나라도 성벽을 비웠다가, 엘랑키아 군의 역공에 침입을 허용하면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선제후 전하.”
“....”
“만약 아까 3차 공세를 하지 않고 멈추었다면 그래도 예비 연대들은 병력을 온존해서···.”
“그만 됐소, 물러가시오!”
네프셀시엔은 분노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용병대장의 말은 분명히 옳았다.
자신들이 해야 했으나, 차마 못하고 눈치만 보던 중신들은 불안해 하면서도 뜻하지 않은 지원 사격에 안심하는 모습이었다.
‘공격은 이미 망했으니 그나마 멀쩡한 성벽이나 잘 지켜라’
요약하자면 이런 말이었다.
실제로도, 두 차례에 걸친 공세가 적의 강력한 방어에 막힌 상황에서 주변의 만류에도 3차 공세를 강행한 것은 네프셀시엔 자신의 판단이었다.
···그 결과는 물론 지금과 같은 재앙이었지만.
허나 네프셀시엔도 할 말은 있었다. 당시에 보기에는, 피해가 크긴 했으나 출성 돌격대는 방벽에 바짝 다가가 대등하게 사격전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아직 체력이 충분한 3차 병력이 투입된다면 반드시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라 생각한 것이 네프셀시엔 혼자만은 아니었으리라.
그렇기에, 병력 교대도 아닌, 이미 아군으로 가득한 전장에 마지막 병력을 밀어 넣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직후, 역겨운 엘랑크 놈들은 본색을 드러냈다.
갑자기 저항이 거세졌고, 화력이 강해졌다. 떨어지는 포탄의 빈도가 늘어났다.
설마··· 설마 힘을 숨기고 함정을 파고 기다리던 것은 아니었겠지. 네프셀시엔은 애써 그런 가능성을 부정했다.
열등한 엘랑크의 유인원들이 그런 고도의 작전을 준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쪽의 계획을 읽고 대비하다니, 질 나쁜 농담이다.
아마도 때마침 다른 지역에서 지원군이 도착한 것일 테지.
그러니 네프셀시엔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만 일찍 병력을 투입했다면, 적의 화력이 강해지기 전에 돌파를 성공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결과는 결과였다.
방벽에 다가가던 마지막 돌격 부대는 근처에 가기도 전에 십자포화에 갈갈이 찢겼으며, 그 머리 위나 등 뒤에서 포탄이 폭발했다.
병력 밀도가 너무 높아 별 것 아닌 사격에도 피해가 막심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네프셀시엔은 가지고 있는 카드를 몽땅 털어 넣고 있었고···.
그러고도 상대의 패조차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그녀는, 그리고 그녀가 자부심을 가진 아름다운 연리목의 도시는 전장에 주도적으로 개입할 힘을 잃어 버렸다.
그냥 2천 명의 피해가 아니었다. 그 피해는 2만에 이르는 폴름스 수비군 전체가 묶이는 심각한 상처였던 것이다.
“...궁으로 돌아가겠다.”
“저, 전하!”
몸을 돌린 네프셀시엔은 말도 없이 망루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이제 그녀와 도시의 운명은 성벽 밖에서 싸우는 디오보르크 공작의 군세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당장 확인할 방법이 없겠지만, 치열한 북부 전선 역시 새로운 국면으로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