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4.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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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름스를 둘러싼 거대한 포위망을 건설한 엘랑키아 군과, 이 포위망을 뚫고 폴름스를 구원하고자 하는 그룬발트 군 사이에 거대한 대결이 벌어지고 있었다.
양측이 동원한 병력의 규모는 역사상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특히 단일 전장에 집결했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아마도 사상 최대 규모의 결전이 아닐까 하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다.
비슷한 규모의 대군 집결의 예를 찾으려면, 고대 아란 제국의 전성기 까지 가야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서로를 무찌르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그들이 어느새 잊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폴름스는 그 이름처럼, 폴름스의 선제후가 기거하는 본성이라는 것이다.
전쟁 초반, 미터스하임이나 로델베르크 등 어중간한 패배 이후 폴름스 선제후군은 교전을 피하고 오로지 본성을 지키는 것에만 집착했다.
그나마 포위망이 건설되기 전에는 소수 병력을 내보내 전초전을 벌이는 등 견제 작업도 진행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저도 멈추었다.
그 이유는 전과가 신통치 못했으며, 오히려 크고 작은 피해만 누적되어 수비군의 사기만 떨어졌기 때문이다.
차라리 명확하게 점령해야 할 거점이라거나, 물자 수송이나 정보 전달 등 목표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저 애매한 목적으로 성 밖으로 나와 위치나 병력도 불명확한 엘랑키아 군을 찾아다니다가 발생하는 교전은 대체로 주도권을 빼앗긴 채로 끌려다니듯 진행되었으니까.
때문에 성 밖으로 출격하는 임무 자체를 다들 꺼리기 시작했고, 주둔군 사이에 반항하는 분위기까지 생기자 더 이상의 출격은 없어졌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엘랑키아 군이 건설한 포위망이 견고해지고, 최종적으로 완성되면서 외부로 나갈 방도도 없어졌지만 말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부에서 디오보르크 공작이 이끄는 구원군이 도착하면서 도시 자체에 대한 공격은 끊어졌다.
지원군과의 싸움이 우선이라 생각한 엘랑키아 군은 포위망을 유지할 정도의 병력만 남겼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번 대격전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연리목 세계수의 도시, 폴름스는 문자 그대로 폭풍의 눈처럼 불안하지만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이 도시의 주인이자 폴름스의 선제후인 네프셀시엔의 심기를 무척 거슬렀다.
자존심이고 뭐고, 폴름스 선제후령의 힘 만으로 엘랑키아 국왕이 직접 이끄는 대군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홀로 싸웠다면 알량한 자존심을 챙길 수 있었을지 몰라도, 그 결과는 굴욕적인 패배였으리라.
그렇기에 카젤하겐의 선제후를 필두로 한, 여섯 선제후의 연합의 제안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폴름스는 디오보르크 공작을 다음 선제후 모임에서 지지하는 대신, 여섯 선제후들은 곤란에 빠진 폴름스를 구원한다.
이를 통해 디오보르크 공작은 숙적 엘랑키아 왕국을 격퇴한 영웅이 되며, 자연스럽게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이를 받아들인 덕에, 실제로 성 밖에는 10만 대군이 몰려와 엘랑키아 군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고 있다.
그 외의 어떤 방법이나 계획도, 이만한 대군을 움직여 위기에 처한 폴름스를 구하지는 못했으리라.
그것 자체가 선제후 네프셀시엔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아니다.
다만, 역사에 남을 대결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 그 원인이자 배경, 그리고 결과가 될 ‘폴름스’ 자체는 어떤 비중도 없다는 것이다.
마치 옛 전설 속 이야기처럼, 시련을 이겨낸 영웅의 트로피라도 되는 양, 이야기의 계기가 될 뿐 아무런 의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허나 폴름스는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도시가 아니다.
선제후의 거점이다, 연리목 세계수의 도시이다 이런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다.
최대한 전투를 피해 병력을 온존했고 미리 도착한 외부 용병 부대도 있었기 때문에, 폴름스 성벽 안에 주둔한 병력은 거의 2만에 달했다.
초반 성벽을 두고 벌인 공방전도 주로 성벽 자체를 부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서로 병력 피해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 병력은 포위 한 달이 지난 지금도 건재했다.
2만의 병력.
다소 병력의 질이 들쑥날쑥하고, 일부는 급히 소집되어 훈련과 장비가 부족한 병력이지만 그렇다 해도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다.
단독으로 엘랑키아 군을 상대한다면 물론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쓸려 나가겠지.
하지만 수적으로 압도적인 그룬발트 군과 싸우느라 정신 없는 엘랑키아 군의 뒤를 노린다면?
오히려 이 대격전의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폴름스의 깃발을 앞세운 선제후군이 맡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마치, 향후 디오보르크 공작을 황위에 올리는 마지막 한 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예정이듯 말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회색의 마녀 네프셀시엔은 오히려 기쁨까지도 느꼈다.
그리하여 폴름스 주둔군은 출성 돌격 준비를 해야 했다.
성벽을 돌며 포위망을 유지하고 있는 엘랑키아 군의 상황을 살피고, 성 밖에 설치된 장애물을 살핀다.
그리고 출성 돌격의 때는 네프셀시엔이 직접 정할 것이다.
그룬발트와 엘랑키아의 격전이 극에 달했을 때, 그 균형을 부수는 승리의 선언자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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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가 5미터를 넘는 거대한 성문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후우··· 후우우···.”
대열의 맨 앞에 있는 장교들이 심호흡을 하며 초조함을 숨기고 있었다.
몇명은 몸이 떨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지, 무기를 쥔 손에 힘을 꽉 쥐고 있었다. 힘을 빼면 쇠장갑과 무기가 부딪쳐 소음을 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 출성 돌격을 앞둔 폴름스 수비군의 선봉이다.
대부분이 이 고대 도시 혹은 그 주변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이며, 귀족이나 부유한 평민 집안에서 자란 재원들이다.
주군에게 충성을 보이고 고향을 지키기 위해 소집에 응했고 전선으로 나온 이들이다.
언젠가 강적인 엘랑키아 군과 전장에서 마주할 것이라 예상했으며, 나름의 각오까지 마쳤었다.
하지만 오랜 농성기간이 그 결심을 무디게 했기 때문인지, 유독 불안해 하는 이들이 많았다.
전투를 앞두고 긴장하는 것이 뭐 이상한 일이겠냐 싶으나, 얼굴이 푸석하고 안구에 핏발이 선 것을 보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모양이다.
게다가 전투를 앞두고 이른 아침을 든든하게 먹은 것은 좋았으나, 출격 시간이 계속 늦춰져 대기만 하는 바람에 더욱 초조한 것이다.
장교들의 뒤에 대열을 이룬 채, 흙바닥에 앉아 쉬고 있는 병사들 또한 무료함과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중천이 떴다.
비록 안전한 성곽 안쪽에 머물고는 있으나, 그들과 전쟁터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고대 엘프 장인이 만들었다는 육중한 성문 뿐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닳아버렸음에도 두터운 성문에 음각으로 은을 박아 넣었던 흔적은 아름다웠다.
솜씨 좋은 엘리멘탈리들이 이 공예품이나 다름없는 성문에 남겨둔 고대의 기프트 덕에, 강철보다도 단단하다는 성문이다.
허나 그 성문이 격리와 보호라는 기능을 포기하고 활짝 열리는 순간,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무엇이 기다릴지 모르는 엘랑키아 군의 포위망을 향해서 말이다.
“새벽에 성문 밖의 장애물은 좀 치워 두었나?”
“예, 제가 직접 감독했습니다. 그래도 각도를 조금 틀어 통로를 넓힌 정도지만요···.”
“그래··· 수고했네. 성문이 무사히 열리는지도 확인했다네.”
일부 장교들이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조심조심, 엘랑키아 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들을 살짝 옮겨 두었던 것이다.
다만 너무 티 나게 옮기면 적이 눈치를 챌 것이다. 또한 어둠 속이라도 소음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너무 멀리 있는 장애물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나마 그것이 유일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다.
“차라리 새벽에 공격을 시작했다면··· 좋았을 텐데.”
“위에서는 엘랑키아 놈들의 시선이 밖으로 쏠린 타이밍을 노려야 한다고 하시니···.”
선제후 전하의 사령부에서는 기습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출성 돌격인 만큼, 해가 뜨기 시작하는 시기를 노리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각하되었다.
물론 기습의 효과는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겠지만, 외부의 아군과 시너지를 내지 못한다면 별다른 성과를 낼 수 없다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유이긴 하다.
만약에라도 성 주변을 둘러친 포위선을 뚫고 나갔는데, 하필 거기가 전장으로 나갈 준비를 하던 엘랑키아 군의 주둔지라거나··· 한다면.
폴름스 성 안쪽의 아군이 출성했다는 것을 성 밖의 아군이 알기도 전에 완전히 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엘랑키아 군의 철통과도 같은 포위망 때문에, 외부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소통이 되지 않는 이상, 일관된 계획을 짜서 시너지를 낸다는 것은 뜬구름 잡는 소리였으니까.
실제로 폴름스 수비군은 벌써 여러차례, 외부로 비밀리에 전령들을 내보내고 있었다.
결사의 각오로 밀서조차 지니지 않은 이들이 밤을 틈타 포위망 돌파에 도전했으나, 아직 외부에서 성 안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 경우는 없었다.
밀서를 지니지 않은 것은, 적에게 사로잡히거나 최악의 경우 죽어서 소지품을 검사당할 것을 각오했기 때문이다.
아마 성 밖으로 나가는데 성공한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나 포위망을 지키는 인력이 확 줄어든 최근에는 말이다.
뭐 대부분은 포위망에 도달하기도 전에 파수병에게 발각당해, 포위망 안쪽에 시체를 하나 늘릴 뿐이었지만.
어쨌든 무사히 돌아오는 경우가 없으니··· 유기적인 작전 계획을 수립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래서 외부의 전투 상황에 내부가 맞추는 수 밖에 없다··· 가 결론이었다.
결정적인 순간, 일제히 성문 밖으로 돌격해 포위망을 돌파한다.
엘랑키아 군도 전혀 대비를 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국은 더 중요한 전선에 시선을 빼앗겼을 것이다.
일단 포위망을 일부라도 돌파할 수 있다면, 배후를 공격당할 수 있는 엘랑키아 본대의 움직임은 소극적이 될 수 밖에 없으리라.
그렇게 디오보르크 공작의 구원군과 적을 협격, 최종적으로 격퇴하는 것이 큰 그림이었다.
전방 장교들 역시 그런 점을 들어 알고는 있었다.
다만 문제는, 외부의 전투 상황에 맞춰야 된다는 특성 상, 해가 중천에 뜬 대낮에 성문을 열고 뛰쳐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멀리서 들리는 포성은 아까부터 끊이지 않고, 가끔은 은은하게 바람에 섞여 함성소리도 들린다.
이 거대한 성문 밖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안전한 성 안을 벗어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현실’이 무엇일지 걱정이 되어 미칠 것 같았다.
“전령이 옵니다···!”
“으음.”
그 때, 멀리서 키가 작은 말을 탄 전령이 달려와 구르듯 말에서 내리고, 후방에서 함께 대기중이던 연대장에게 명령서를 전한다.
비교적 자유롭게 쉬고 있었으나, 소리를 내는 것만은 엄격히 금지되던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리 몰린다.
잠시 명령서를 읽은 연대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수에게 뭔가 신호하는 것이 보였다.
화려한 군기를 조심스럽게 말아 보관하고 있던 기수가 조심스럽게 줄을 풀고 깃발을 펼친다. 이를 지켜보던 모두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시작이다.
공격명령이 내려왔다.
“모두 일어나라. 서두르지 말고, 조용히.”
쉬고 있던 병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를 점검한다. 다소 흐트러져 있던 대열이 맞춰지고, 느슨하던 공기에 긴장감과 쇠 냄새가 충만해진다.
모두 800명으로 이루어진 돌격대가, 이번 공격의 선두였다.
가장 앞에는 총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빠르게 포위망 방벽에 접근해 적을 향해 총탄을 퍼부을 것이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이번에는 대열 유지나 장교의 구령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때문에 나름 숙련병들을 선발한 것이고 각자 판단에 따라 사격할 것이다.
그 뒤로는 주로 짧은 백병전 무기로 무장한 돌격대 본대가 나아간다.
대부분이 검과 도끼 등, 근접 전투를 상정한 무기이지만 화승총이나 권총 등 소수의 화기와 장창도 포함되어 있었다.
밀집 장창 대열을 이루어 싸울 일은 없겠으나, 방벽 위의 적을 공격하거나 좁은 통로를 틀어 막은 적을 공격할 때 활용될 예정이다.
이들은 선두 총병들이 개척한 진격로를 통해, 그들이 번 소중한 시간을 이용해 돌격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멈추지 않는다. 울타리를 부수거나 뛰어 넘고, 완만한 방벽을 타고 올라 돌파구를 연다.
물론 이 800명이 공격의 전부는 아니다. 이번 출성 돌격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 병력은 모두 6천 명에 달한다.
어디까지나 그들은 선봉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출성 돌격은 실패할 것이다. 그렇기에 임무는 막중하다.
“자, 성문을 연다.”
“성문을 열어라!”
쥐죽은 듯 조용하던 성문 안쪽에 처음으로 큰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쿠구궁.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성문 안쪽에, 한 줄기 햇빛이 들어오더니 점점 넓어진다. 병사들이 눈이 부신지 눈을 가린다.
“가자!”
검과 권총을 양손에 쥔 선봉 장교가 반쯤 열린 성문을 통해 뛰쳐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