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2.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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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대를 중앙으로 보내라. 적이 생각보다는 저항이 거세군.”
“알겠습니다.”
“자아, 몰아 붙여라! 무서운 것은 엘랑키아 기병이지 보병이 아니니까!”
현재 그룬발트 군의 측면 공격을 맡아 공격을 이어가고 있는 반츠베르크 연대장 쇠렌 마이켈러는 호기롭게 외쳤으나 다소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이유는 금방 몰아붙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엘랑키아 군 연대가 생각보다 질기게 저항했기 때문이다.
엘랑키아 군 우익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투입된 지원군인 반츠베르크 연대가 뮤에르니히라는 전쟁관의 참모로부터 받은 임무는 명쾌했다.
‘적의 측방을 지키는 보병 연대를 밀어내 전선에 균열을 만들 것.’
적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입히거나 완전히 붕괴시켜 퇴각을 강요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적을 수세로 몰아넣어, 측방 수비 역할을 못하도록 막기만 하면 충분했다.
그래서 공격적으로 병력을 좌우로 벌려 압도하고자 했고, 놀란 듯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적을 보았을 때만 해도 쉽게 마무리되리라 생각했다.
방금 그가 선언하듯 말했듯, 엘랑키아는 귀족 기사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병이 무서웠지, 보병이 무서운 군대는 아니었다.
반츠베르크 연대가 엘랑키아 군을 상대로 전투에 참여한 경험은 없지만, 휘하 용병들 중에는 지난 나우데사 전쟁에 참전했던 이들이 많았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엘랑키아 보병은 실속이 없다는 것이다.
개개인이 용맹하고 부대는 사기가 높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전장에서조차 으스대는 기질이 있었다.
부대 규모는 크지만, 덩치값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발에 쉽게 넘어오고, 진형을 형성하거나 변경하는 데 서툴러 전투가 격화되면 전열이 금방 무너지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으니, 명성 높은 엘랑키아 기사들이 즉각 지원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전술적으로 패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질서하게 붕괴되어 도망치는 꼴사나움은 아니더라도, 열심히 싸웠는데 계속 밀려나서 거점을 내주는 어리석은 패배가 많았다는 말이다.
쇠렌이 지휘하는 반츠베르크 연대 역시 그로이엔펠트 등 다른 유명 용병 연대처럼 철저한 정예군은 아니다.
강철과 같은 군기를 갖추는 강도 높은 훈련도 없었고, 최근에 입대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손발이 철저하게 맞는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 모든 숙련병들은 뇌리에 여러가지 전투 방식을 숙지하고 있으며 진형 변경 훈련 역시 확실하게 시켰다.
이 점이 일개 무명 용병이었고 역사도 짧은 이 연대를 짧은 기간 동안 여러번 활약하게 만들었으며, 나름의 명성을 떨치도록 도왔다.
지금이야 규모나 활약에 비해서 용병료가 낮다··· 라는 식으로 가격대 성능비가 좋다는 평가를 받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쇠렌은 오래지 않아 자신의 연대가 다른 유명 용병단처럼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이번 공격에서도 자진해서 선봉을 맡았던 것인데!
엘랑키아 보병들이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우직하다··· 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엘랑키아 보병들은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초반, 전방에 더 많은 총병을 투입해 집중사격으로 이득을 봤던 것도, 시간이 흐르고 결국 교대 사격으로 수렴하면서 유리하다고는 할 수 없어졌다.
창병간의 교전에서는 오히려 어중간한 규모로 공격하다 손해를 본 느낌이다.
적보다 전선을 넓게 배치해 측면에 힘을 집중한 것은 좋았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얕은 종심을 가진 창병을 진출시키다 힘이 부족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몇몇 베테랑 창병의 ‘손기술’ 따위로 무너뜨리는 물렁물렁한 얼치기들이 아니었다.
적을 얕보았다. 그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빌어먹을! 엘랑키아 장교 놈들 정말 지독합니다! 마치 목숨이 두 개인 놈들처럼 설쳐대고 있습니다!”
얼굴에 큰 상처를 입고, 피가 배어나온 붕대를 누르고 있던 쇠렌 휘하의 중대장이 고통을 참으며 보고한다.
“몸이 창에 찔려도, 총알을 맞아도 움직입니다! 세상에 목이 찔렸는데 악을 쓰며 맞찔러 올 줄은 몰랐습니다··· 으으윽··· 젠장!”
“...아프겠군.”
하긴 총에 맞아도 목숨이 끊어질 때 까지 고삐를 부여잡으며 창을 놓치 않는 엘랑키아 기사들의 악명은 자신도 들어보았다.
그런 지독한 놈들이 보병 장교가 되어 부하들을 이끈다면, 말 위에서가 아니더라도 까다로운 적이 되는 것은 당연하겠다.
이는 이 중상을 입은 장교의 개인 경험이 아니라, 전선 전체에서 보이는 경향이었다.
약점이 되기 쉬운 모서리나 측면에 배치된 전열 장교와 부사관들이 도무지 겁을 먹지 않으니, 서로 피해만 주고 받을 뿐 전진도 후퇴도 못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지금, 이번 전투에서 그런 꼴을 보이는 것인가!
갑자기 엘랑키아 보병이 예상보다 강해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들에 대한 평가절하 자체가 과장된 헛소문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답답하지만, 헛소문보다는 당면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했다.
하다못해 적이 느슨한 대열을 보고 무모하게 반격을 시도해 주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적은 절대로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룬발트 군 입장에서는 가장 까다로운 선택지를 골랐다고 할 수 있었다.
“도대체 뭐가 저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
솔직히 부러웠다.
연대장으로서 쇠렌은 하늘이 무너져도 부하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자신도 용병으로서 고용주를 위해 그렇게 행동할 생각이 없었고 부하들에게도 강요할 생각이 전혀 없다.
돈을 매개로 엮인 용병 계약과, 주군과 신하 사이에 엮인 충성 서약 사이의 차이일까.
용병들 끼리 ‘네가 목숨을 바쳐서 내 돈을 벌어 주거라!’ 라고 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충성 서약도 마찬가지 아닌가?
저들이 저렇게 목숨을 버려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영지? 작위? 가문의 영광?
쇠렌 자신도 일개 보병으로 장창을 들고 최전선에 선 경험이 있었다.
날카로운 창 끝이 얼굴을 향해 다가오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피하게 된다.
그러니 베테랑들은, 오히려 사람의 그런 어쩔 수 없는 성향을 이용한다.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거리에서 위협적으로 얼굴을 노리고, 적이 위축된 사이 거리를 벌거나 다음 공격을 위한 발판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 베테랑 중의 베테랑들은 이걸 또 역이용한다.
아슬아슬하게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거나, 치명상이 아니라면 상처를 받아들인다.
그럼 오히려 차례는 ‘상대의 속임수 공격에 넘어가지 않은’ 이쪽으로 넘어온다.
공격 직후 무방비 상태에 빠진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런다고 치명상을 입히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상대를 위축되게는 할 수 있다.
이런 게 거듭되면 결국 상호간의 유불리가 쌓이게 되고, 한계에 이르면 대열이 붕괴되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강철과도 같은 심장인지···. 쇠렌은 지휘관으로 진급하면서도 그 정도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인한다.
그런데 그런 미묘한 눈치나 기술이 아니라, 찔렸는데도 물러서지 않고 맞찔러 온다고?
이건 아마 선공을 한 쪽이 가장 놀랐을 것이다.
통증 때문이든 본능 때문이든, 당연히 위축되고 뒤로 물러섰어야 할 인간이다.
그런데 오히려 찔린 김에 고정된 상대를 반격하다니··· 전장에서 보병들에게 환각제를 먹인다는 저 북쪽의 드라멜른 기사단도 아니고 말이다.
아무튼 빌어먹을 놈들이다. 이대로는 몇 시간을 싸워도 서로 피해만 누적될 뿐, 적을 밀어내고 임무를 수행할 가능성은 없었다.
초조해하는 쇠렌에게, 참모 장교 하나가 다가와 보고한다.
“엘랑키아 기병들이··· 도망칩니다. 볼켄라스 연대가 성공한 모양입니다.”
“...과연 명성대로로군.”
비참한 심정이었다.
볼켄라스 용기병 연대는 강군으로 유명한 엘랑키아 기병 연대와 교전하여 적을 후퇴하게 만들었다.
“기병간의 전투를 지켜보았나? 전투 양상이 어떻게 흘러갔지?”
“예, 지켜보았습니다. 초전에서는 볼켄라스가 적을 완전히 제압하는 것 같았습니다. 초반에 이어진 두어 차례의 전투에서 엘랑키아 기병 거의 삼 분의 일이 쓰러진 것 같습니다.”
그거 엄청난 전과였다. 순수하게 화력 집중만으로 보병 연대의 일각을 무너뜨린 경우가 있을 정도로 볼켄라스 연대의 사격 능력은 정평이 나 있기는 했지만···.
그게 빠른 속도로 돌격해오는 엘랑키아 기병들에게도 통할 줄이야.
“하지만 그 직후, 엘랑키아 기병의 후위 병력이 볼켄라스를 덮치면서 오히려 역전되는 분위기였습니다. 확실히··· 대단했습니다.”
젊은 참모 장교는 적을 칭찬하려다가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감탄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결국 잘 싸우기는 했지만 초반에 입은 피해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진 모양이군.”
“정확합니다, 연대장님.”
‘총에 맞아도 숨이 끊어질 때까지 창을 놓치지 않는’ 정신나간 엘랑키아 기사들이라고 해도, 결국 화력 앞에서 장사는 없었던 모양이다.
비슷하게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격돌하여, 볼켄라스는 승리했고 반츠베르크는 지지부진하다.
이번 측면 공격은 속도가 생명이었다. 아무리 보병 연대 끼리의 교전이 오래 걸린다고 할지라도, 할 수 있다며 선봉을 맡은 것은 자신이었다.
“...그로이엔펠트에 전령을 보낸다.”
“옛, 무슨 내용으로 보냅니까?”
“우리로서는 역부족이다. 그로이엔펠트의 지원을 요청한다. 이상이다.”
“그···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하지만 조금 기다려 보시는 것도···.”
주변에서 만류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예비대를 투입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시종일관 공세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절대로 반츠베르크가 불리한 전황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시바삐 적을 뚫어내는 것이 그들의 임무, 괜히 고집부리다 시간이 늘어지면 망신만 당할 뿐이다.
“아니, 지금 바로 전령을 보내도록. 아무래도 오늘은 우리가 주인공이 아닌 모양이니.”
“아, 알겠습니다!”
쇠렌은 씁쓸한 표정으로 서둘러 달려가는 부하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제 주도권은 그로이엔펠트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성공할 것이다. 아마도.
타타타탕! 타타탕!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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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물러난다!”
“이겼어! 이겼다!”
“와아아아아아!”
짧지만 격렬했던 전투였다.
전방에서 적과 맞섰던 엘랑키아 보병들이 입은 크고 작은 상처, 그리고 그들 앞으로 쌓인 아군과 적군의 시체 숫자만 봐도 명확했다.
그렇더라도 승리는 승리, 라글랑 연대의 기쁨에 젖은 병사들이 함성을 질러댄다.
하지만 주변 전장을 파악해야 하는 연대 지휘부는 마냥 첫 승리의 기쁨에 빠져있기만 할 수는 없었다.
정면의 공격해온 보병은 무너뜨렸으나, 측면을 지켜주던 아군 기병이 밀려나고 말았다. 그것도 심각한 피해를 입고 말이다.
기병은 언제나 이긴다고 생각해온 엘랑키아 군에게 충격적인 결과였다.
물론 숫자가 많이 줄었음에도 완전히 와해된 것은 아니로, 측후방에서 적을 견제해주고는 있지만, 라글랑 연대는 이제 측면을 지켜가며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물러난 적 또한 전열이 붕괴되어 도망친 것이 아니다. 분명 전열을 정비해 다시 공격할 것이다.
“측면은 대기병 대열로 전환한다. 예비대를 포함해 2개 중대, 서둘러!”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연대장 제르티에 드 라글랑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보병과 기병 양쪽에게 공격당하는 것은 보병 연대에게 악몽과도 같은 일이다.
당장 기동성을 포기하고 사방으로 창을 세워 버텨낼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 한 자리에 묶인 이상 외부 지원 없이 상황을 극복해낼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하물며 이번처럼 적 숫자가 더 많다면 말이다.
“저, 적이 또 옵니다, 연대장니!”
“뭐? 벌써?”
“보십시오! 물러난 적 너머에서 새로운 연대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미치겠군. 3개 연대를 상대로 싸워야 하나?”
절망적인 상황이었고, 겁이 났다. 하지만 그럴수록 묘하게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우리가 잘 싸우니까, 네놈들이 숨겨 두었던 병력을 내놓는구나!’
라는 기묘한 고양감. 특히 장교로부터 일개 병사까지 전원이 드 라글랑 후작령 출신인 연대이기 때문인지, 그런 분위기는 더욱 강했다.
“좋아, 재장전을 서두르고 탄환을 보급한다. 서둘러!”
“알겠습니다.”
전투가 끝날 때가지 쉴 수는 없다. 그래도 첫 승리의 흥분감으로 몸이 풀린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휘부의 몇몇 장교들은, 이번에 새롭게 접근해오는 적 연대가 묘하게 ‘절도있는’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