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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화약의 용병대장-476화 (517/556)

47-11.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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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 냄새가 매캐한 초원을 기병대가 달린다. 새로운 피 냄새를 찾아서.

“적이 온다! 멈추지 않아!”

“모두 사격 준비 됐나? 명령 전까지 기다린다!”

그들을 마주한 또 하나의 기병대는 느슨한 횡대 대형을 만들고 사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적이 생각보다 저돌적으로 나오는 군.”

“그만큼 우리를 위협적이라 생각한 게 아니겠습니까?”

“좋아, 우리가 밥값 할 차례다.”

“이미 배치는 끝났습니다, 연대장님.”

볼켄라스 용기병 연대를 지휘하는 가이어 도마르 폰 볼켄라스 남작은 망원경을 탁 소리가 나게 접었다.

지금 그들은, 함께 전장에 나선 동료 반츠베르크 보병 연대와 보조를 맞춰 엘랑키아 우익군의 측면을 공격하고 있었다.

대열을 넓게 벌린 보병들이 적 보병을 압박하는 사이, 볼켄라스 용기병 연대는 불쑥 튀어나와 적의 측면을 위협하는 위치를 선점했다.

이대로라면 적의 측면 방어 부대는 보병과 기병 양자에게 합동 공격을 받아 힘든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공격하려는 의도 따위는 없지만’ 말이다.

허나 후방에서 지켜보고 있던 엘랑키아 기병들 입장에서는 가만 둘 수 없었다. 그런 목적으로 ‘연기’한 것이니까.

적 우익군에 딸린 기병들은 지금까지는 병력 온존을 위해 중요한 국면이 아니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 그룬발트 측에서 대놓고 측면을 노리는 기병대가 나타났으니, 기다릴 수 없었는지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현재는 속보 정도의 속력으로 이쪽을 위협하는 느낌이지만, 이대로 접근해도 물러서지 않는다면 분명 돌격해올 것이다.

“아··· 좀 긴장되는군.”

“다행히 적 규모가 크지 않고, 중기병의 수도 적습니다.”

“그래. 제대로 싸우면 우리가 유리하겠지.”

“연대장님께서 전투 직전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처음 봅니다.”

“그야, 적이 엘랑키아 기병이잖아.”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부관과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화를 나눈다.

어차피 싸울 생각으로 온 것이기는 하다. 그래도 역시 말로만 듣던 엘랑키아 기병을 마주하니 걱정이 된다.

하지만 볼켄라스 용기병 연대는 ‘보병을 만나면 보병에 맞게 싸우고, 기병을 만나면 기병에 맞게 싸운다’ 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너무도 당연한 말이라 과연 칭찬인지 애매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남들이 그 당연한 말을 굳이 한다는 것은 볼켄라스만이 가진 메리트가 있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그걸 보여줘야 할 때였다.

무서운 기세로 엘랑키아 기병은 어중간한 거리에서 잠시 멈춘다.

그러더니 장교 몇 명이 대열에서 나오더니 이쪽을 가리키며 손가락질을 하며 뭔가 의논하는 모양이다.

아마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논의하고 있는 것이겠지.

이 정도의 거리라면, 적도 볼켄라스 연대의 무장이나 병력 배치, 그리고 숫자를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바람결에 뭔가 외침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장교들이 흩어지고 엘랑키아 기병들이 다시 전진을 시작한다.

돌격을 결심한 모양이다. 가까워서 그런지 아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느껴진다.

“돌격!”

“돌겨어어억!”

“돌격! 이야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낯선 억양의 외침과 함께, 일제히 무기를 치켜든 적이 말에 박차를 가하고 달려오기 시작한다. 잠시 사그라들었던 엄청난 압박감이 다시 느껴진다.

이제 때가 되었다. 연대장 가이어 남작이 손짓을 하자, 부관이 미리 예정되어 있던 명령을 외친다.

“전열, 말에서 내려!”

“말에서 내린다! 서둘러!”

“말에서 내린다앗!”

느슨한 횡대 대열을 갖추고 화승총을 겨누고 있던 용기병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린다. 적과 근접한 2개 대열 정도가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불필요한 움직임 없이, 너무 느리지도 않게. 명령이 전해지자마자 마치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기병대 선두가 사라진 느낌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제히 말에서 내렸을 뿐이다.

열 명 당 한 명 정도는 전투를 앞두고 흥분한 말을 진정시키며 고삐를 모아 엮는다. 미리 훈련받은 듯, 막힘없이 동료들로부터 말을 이어 받는다.

나머지는 화승의 불을 확인하고 능숙하게 다시 적을 겨눈다.

일부는 말의 사이에서, 일부는 말의 뒤편에서. 몇몇은 안장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안장에 총기를 올린 기괴한 자세로 조준한다.

적도 분명 이변이 일어난 것을 확인했겠지.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반응하기는 늦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이제 와서 멈추기는 늦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혹은 아주 멈출 생각이 없는 것인지.

어쨌든 엘랑키아 군의 선두 대열은 속도를 유지하며 돌진해온다.

예상대로였다.

“최대한 끌어들여 사격하라!”

“옛, 이미 전달했습니다!”

볼켄라스 용기병 연대는 또한 ‘용기병이면서도 충격 기병을 잘 잡는’ 상성을 무시한다는 명성 또한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권총이 아니라 길고 무거운 소총을 들고 말에 오르는 용기병들은 백병전이 아니라 사격전에 치중했다는 인식이 있다.

그나마 볼켄라스 연대는 평범한 용기병들과 다르게, 투구와 갑옷을 든든하게 챙겨 입었다지만 그래도 길다란 쇠막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 해도 빠른 움직임에는 마이너스이다.

차라리 보병이라면 총기를 양손으로 휘두르며, 그 길이나 흉악한 무게를 이용해 습격해오는 적에게 대응할 수라도 있겠으나···.

기병의 경우는 말 위에서 한 손으로는 들기도 어려운 화승총을 둔기 대용으로 쓰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니까.

그렇다. 그런 통상적인 인식 또한, 볼켄라스 연대와 상대하는 적 기병대가 빠져들기 쉬운 ‘함정’이기도 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볼켄라스 연대가 꾸준히 근접 기병을 상대로 높은 승률을 유지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 특별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첫번째가 바로···.

“전열 사격 개시!”

“쏴라!”

타타타탕! 따다당!

타타탕! 타당! 타타타탓!

말에서 내려 조준자세를 취하고 있던 용기병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긴다.

대열에 따라서 엘랑키아 기병의 선두와는 거리가 30미터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근거리였다.

하얀 연기와 함께 총구로 튀어나온 납탄은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속도로 날아가 돌진해오는 엘랑키아 기병 대열 사이로 빨려 들어간다.

“후열 사격!”

“쏴!”

“쏴라아!”

타탕, 따다당! 타타탕!

타타타탕! 타탕!

다음으로 무시무시한 화력을 뿜어낸 것은 ‘말에 탄 채로 대기하던’ 후열의 용기병들이다.

선두 대열의 동료들이 말에서 내렸으므로 사선을 가리지 않는다.

그 너머의 적 기병은 여전히 말에 탄 상태이므로 얼마든지 노릴 수 있었다.

혹시라도 앞에서 방벽 역할을 하는 아군 말의 머리를 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뿌연 화약 연기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적병을 노려 발사한다.

두 차례에 걸쳐 쏟아진 총탄이 돌진해오던 적진에 파멸적인 납탄과 유혈의 폭풍을 일으켰다.

“크아아악!”

“허억, 맞았어!”

“끄윽!”

기세 좋게 돌격해오던 엘랑키아 기병대의 선두가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바로 이것이 볼켄라스 용기병 연대가 가진 대기병 필살 전술이다.

단순히 고삐가 묶인 말들의 무리가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것 뿐이 아니다.

두 다리를 고정된 땅에 딛은 ‘기마 보병’들이 집중된 탄막을 쏘아 보내고, 마상 사격에 이골이 난 후열의 베테랑들이 거기 화력을 보탠다.

이는 사격의 집중도나 명중률이나, ‘무기 상성에서 유리한 만만한 상대’로 생각하고 돌진해온 상대 기병대가 예상한 대응을 훨씬 상회한 화력을 보여주는 게 당연했다.

하물며 돌진해오는 기병대에 가해진 화력은 단순한 병력 피해 이상의 손해를 입히게 된다.

사격 피해를 최대한 회피하거나, 먼저 당해 낙마한 아군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대열을 느슨하게 한 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충격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첫 충돌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서는 최대한 집중해야 한다.

이런 이율배반적 상황에서, 주로 대열의 중앙과 양 끝에 용감한 장교와 정예병들을 배치해 격돌의 순간 충격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려 하게 마련인데···.

대열 전체에 걸쳐, 일순간에 심각하게 가해진 피해는 이런 움직임을 못하게 만든다.

마치 ‘기병대’라는 하나의 생물이 더 이상 생각을 하지 못하고 멈추게 만든다고도 할 수 있었다.

분명 이만한 화력이 쏟아졌으니, 비숙련병을 이끌어야 할 장교와 숙련병들도 다수 쓰러졌을 테고, 전열에 구멍이 많이 뚫려 응집력도 떨어진 게 분명하다.

대부분의 기병대는 이 시점에서 충격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다. 기세를 잃고 제자리를 맴돌거나, 공포에 질려 아얘 말머리를 돌려 도망칠 수도 있다.

“후열 전진! 적을 격퇴한다!”

“전열은 계속 장전해!”

“장전을 마치고 합류한다. 서둘러!”

“알겠습니다!”

다음으로 볼켄라스 용기병들이 근접 기병 상대로 강한 두번째 이유는 빠른 공수 전환이다.

통상 용기병의 약점으로 꼽히는 것은, 기병 대 기병으로 맞상대 할때 사격 기회를 잡기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근거리에서 발사하더라도 한 손으로 쓸 수 있으며, 여차하면 보조 근접 무기로 활용할 수 있는 권총과는 다르다.

보병에게 적합한 묵직한 화승총은 사격 이후 아무리 빠르게 다른 무기로 전환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결국 사격을 무릅쓰고 접근해온 근접 기병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최악의 경우 무력하게 쓸려나가는 경우까지도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후열에서 마상 사격을 담당한 볼켄라스 숙련병들은 무기 전환의 전문가였다.

누구보다도 빨리 총을 안장으로 되돌리고 예리한 기병도를 뽑아 드는 전문가들이며, 필요한 경우 거리낌없이 총을 던져버리는 과감함도 갖추고 있다.

이미 예상하지 못한 강력한 사격에 당한 적이 정신을 차리고 전열에 도달하기 전에, 무기를 뽑아든 숙련병들이 오히려 적을 요격한다.

···라는 상황이 되었어야 했는데···.

“이야아아아아!”

“뭐, 무슨··· 크악!”

“뭐가 이리 빨라!”

빌어먹을 엘랑키아 기병들은 그 상식이 통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두 차례 쏟아진 일제사격이 만들어낸 뿌연 화약 연기속을 뚫고, 마치 사신처럼 살아남은 엘랑키아 기병들이 속속 도착한다.

“막아! 막으라고!”

“자, 장전이···.”

“흐이얍!”

“크헉!”

흉갑에 총알 구멍이 뚫려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악착같이 적진에 도착한 엘랑키아 기병이 창을 내질러 재장전 중이던 하마 용기병을 찌르자 2미터나 나가 떨어진다.

어느새 고삐가 엮인 말로 이루어진 바리케이드를 뚫고 들어와 백병전이 벌어진다.

일부는 일시적으로 용기병들이 말에서 내렸음을 깨닫고, 말에게 상처를 입혀 날뛰게 만들기도 한다.

방금까지 예정대로 잘 진행되던 전열에 갑작스럽게 혼란과 함께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뭐야, 왜 이렇게 빨라! 정예들을 다 빼가서 쭉정이들만 남았을 것이라며···.”

후방에서 지켜보던 연대장 가이어 남작이 기겁을 하며 외쳤다.

‘엘랑키아 국왕은 좌익군에 중기병을 중심으로 8천 기나 집결시켰습니다. 그런 만큼, 우익군에 배치된 기병대는 알맹이가 빠진 쭉정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뮤에르니히라고 했었나, 그 폰 자이트리츠의 애송이 책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게 아니었다.

“진정하십시오, 연대장님! 접근해온 적의 수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크윽···!”

그 말대로였다.

화약 연기가 잦아들며 전장이 드러나자, 볼켄라스 연대의 기습 일제사격이 이룬 ‘위업’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근거리에서 일부는 말에서 내려서, 일부는 말 위에서 뿜어낸 일제사격은 상상 이상으로 파멸적이었다.

초원에는 엘랑키아 기수들과 그들이 탔던 말의 시체가 띠 형태로 빼곡했으며, 그들이 흘린 피로 젖어들고 있었다.

시체에 발이 묶여 제자리에서 맴도는 말도 보였으며, 말을 잃은 채 절둑거리며 전진을 계속하려는 기병도 있었다.

이를 극복하고 요행히 적진 돌입에 성공한 엘랑키아 기병도 물론 있다.

허나 극소수일 뿐, 초기 충격 효과가 사라지고 볼켄라스 용기병들이 숫자로 대응하자 빠르게 쓰러져갔다.

“빌어먹을, 다행이군!”

“아군 용기병들을 믿으실 때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시끄럽다! 적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가이어 연대장이 소심하다는 것은 연대 전원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랑받았다.

소심하니, 가능한 안전하고 유리한 상황에서 싸우기 위해 노력한다. 평소에 투자를 아끼지 않아 최선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한다.

그게 이 독특한 기마 용병대가 살아남도록 하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투지를 잃지 않은 엘랑키아 기병의 잔존 병력이 접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주도권은 그룬발트 쪽으로 넘어와 버렸으며, 숫자 차이는 상당히 벌어져 버렸다.

아마도 ‘그 엘랑키아 기사’들 조차도 대응하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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