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0. 폴름스 전투, 셋째 날
###
“쏴라!”
타타타타탕! 타타타탕!
따다다당! 따당!
적의 접근을 마지막까지 기다리던 엘랑키아 총병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기자, 뜨거운 화약 연기가 화악 피어오르며 총탄이 적진을 향해 날아갔다.
연기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적진의 실루엣은 확실치 않았으나, 일제사격을 받고 흔들리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타타타탕! 타타탓!
퍼퍽, 팍! 타탁! 퍽!
“우으윽!”
“크흑!”
몇 초 지나지 않아 반격이 쏟아진다. 운 없게 피격당한 이들이 쓰러지고, 상처가 크지 않은 병사들은 상처를 움켜쥐고 대열 후방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이 정도로 충격받을 정도로 엘랑키아 보병 연대가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어차피 평범한 보병 연대끼리의 교전 첫 단계였다. 앞으로 더더욱 오가는 화력의 밀도가 높아지고, 참혹한 백병전도 시작되리라.
“서둘러! 그룬발트 놈들이 온다!”
“창병 앞으로!”
“한 놈도 넘어가게 두지 마라!”
바쁜 손으로 재장전하는 총병들이나, 앞으로 이어질 백병전에 대비하는 창병들이나 긴장한 얼굴로 오로지 적진을 바라보며 다가올 전투를 준비할 뿐이다.
“원수 각하께 보고드려라! 라글랑 연대 교전을 준비한다고!”
“옛, 연대장님!”
“좌측방은 안심하시라고 전달드려라!”
“알겠습니다!”
제르티에 드 라글랑 연대장은 전령에게 보고를 맡기고 다시 전방을 바라본다.
의연하게 전투를 준비하는 휘하 연대 병사들의 등과 어깨 너머로 적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연대는, 오늘은 처음으로 적을 마주하는 것이다. 전투가 한창인 지금까지 측방을 지키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대체 몇 개 연대인 것인가?”
“규모나 편제로 보면 평범한 2천명 규모의 연대로 보입니다. 그냥 화려한 깃발을 여러개 들고 있는 게 아닐지···.”
“어처구니가 없군! 여기가 전쟁터가 아니라 파티장이라도 된단 말인가?”
각종 화려한 문양이 그려진 ‘연대기’가 대여섯개는 되어 보인다.
그룬발트 용병들 중에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연대의 상징을 이렇게 경박하게 취급하는 자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고보니, 날개를 펼친 맹금처럼 공격적인 기세로 접근하는 적 연대는 대열도 이상했다.
폭이 얕고 좌우로 펼쳐놓은 병력은, 원래 규모가 조금 더 많다고는 해도 너무 범위가 넓었다.
부대의 측방을 지키기 위해 전통적이고도 단단한 밀집 대형을 취한 제르티에의 연대를 생각하면··· 그 배치 또한 경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주도권은 자기쪽이 가지고 있다고 과시하는 것 같군.”
“반격이 두렵지 않은 모양입니다.”
보병 연대가 전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인 적의 충격력을 흡수할 깊은 종심이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얇은 종이 한 장으로는 쏟아지는 물을 막지 못해 찢어지겠지만, 여러 겹을 겹쳐 놓으면 물을 흡수하며 버텨내는 것과 같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충격력만 믿고 돌파를 시도한 적을 일단 붙잡아 멈추게 되면 전열을 재정돈한 선두 부대 또한 협력해서 오히려 적을 포위하고 섬멸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총병이나 창병 대열끼리의 교전에서도 종심은 중요하다.
사상자가 바로바로 후위 병력으로 대체되어 전투력을 유지하는 것도 물론이지만, 특히 창병 끼리의 대결에서는 부대 규모가 가져오는 질량 싸움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무식하게 힘만 가지고 밀어 붙이는 것은 아니지만 규모를 무시할 수 있는 지휘관은 없다.
보병 전술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뛰어난 일당백의 용사 한 명이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전설 시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적군은 여기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배치를 하고 있었다.
대열은 얕은 하나의 긴 횡대를 하고 있었으며, 양 측면에는 중대급 이상으로 강화된 밀집 대형이 존재할 뿐이다.
이래서는 이쪽에서 깊은 종심 부대로 역습을 가하거나, 일정 규모 이상의 충격력을 가진 기병대가 돌입하면 단숨에 돌파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적장은 알고 있는 모양이다.
라글랑 연대는, 제르티에 연대장은 병력이 부족한 가운데 측면을 지켜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가 경애하는 프레니히 드 루블랭 원수의 우익군은 열세이다. 연대장으로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우측은 호펜로이테 마을에 의해 보호받고 있으나, 좌측은 개활지에 노출된 상태이다.
지금까지는 계속 대열을 후퇴시키고 돌파를 시도하는 적을 견제하면서 잘 피해왔지만, 필경에는 적의 측면 공세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라글랑 연대는 지금까지는 아군이 만들어주는 전방 방어선의 후방에서 조용히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차례가 온 것이다.
“적 후방에 기병의 움직임이 보입니다!”
“그건 우리 기병에게 맡기도록 하지. 저 오만방자한 그룬발트 연대가 울면서 도망치는 모습을 보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타타타타탕! 타타타탕!
아직 창병간의 교전은 시작되지 않았으나, 총격전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었다.
양 측면에 여유를 둔 적이 한번에 전투에 나서는 총병의 수가 많을테니, 화력은 다소 열세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단단한 대열을 이룬 채 교대로 일제사격을 퍼붓는 아군이 반드시 불리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총은 위협적인 무기이지만, 이 정도의 중장거리 교전에서 사격만으로 승패가 갈리는 경우는 어지간하면 잘 없었다.
결국은 창병끼리의 백병전이 승패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리라.
“모셸은 잘 싸우고 있으려나.”
“모셸 경도 잘 해나가고 있을 겁니다! 그 증거로 호펜로이테 방어선이 건재하지 않습니까?”
“으음, 다행이군.”
모셸 드 라글랑은 제르티에와 터울 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 동생이다.
참모가 연대장의 형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라글랑 연대는 사실상 라글랑 후작가의 가병들로 이루어진 부대이다.
드 라글랑 후작은 자식들의 출세를 위해 아낌없이 투자를 하는 인물이었고, 왕실과의 사이를 개선하는 데도 관심이 많았다.
다만, 기왕 가문에서 온전히 연대를 편성하여 출전시키는데 모셸도 함께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때문에 연대 참모나 중대장 직위를 제안했었으나, 이제 열여섯 살인 모셸은 강하게 거절하며 다른 부대에서 경험을 쌓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샹다메리에서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의 종자이자 부관으로 근무했던 동생이니 다른 자리를 원하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테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걱정스런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린 동생은 꿋꿋하게 야전 부대 장교가 되기를 원했다.
아마도 형인 제르티에와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것이겠지.
20대 까지 어영부영 보냈던 자신을 생각하면 어린 동생이 대견스러웠다.
뭐, 프레니히 백작 직할 원수부에서 근무하는 게 안전함으로 보나 커리어로 보나 더 나을지도 모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형으로서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적이 접근합니다!”
“좋아, 라글랑 연대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이겨내라! 모든 장병들에게 포상을 약속하겠다!”
“옛! 드 라글랑을 위하여!”
“드 라글랑을 위하여어!”
병사들이 힘차게 함성을 지른다. 그게 포상을 약속해서인지, 정말로 사기가 충천했기 때문인지, 둘 다 때문인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현재 라글랑 연대의 컨디션은 최고였다.
엘랑키아 군사 귀족이자 후작가의 계승자로서, 평범하게 기사로 훈련을 받던 제르티에는 보병 지휘관의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블랑독에서 발호한 정순파 이단을 처벌한다는 토벌 전쟁에서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의 휘하로 참전했을 때만 해도 보병 연대장이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어차피 아버지는 현 드 라글랑 후작의 인맥으로 얻어낸 자리였고, 군사 귀족으로 겪을 많은 경험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의 샹다메리 전투가 그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세한 병력이었고, 이길 것이라 믿어 마지 않았던 전투였다.
보병 전력으로 적을 압박하면, 압도적인 기병 전력으로 적을 박살내 승리하리라 확신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훨씬 빈약해 보였던, ‘남부 촌놈’들의 보병 연대는 야트막한 돌담에 의지한 채 몇 배나 되는 아군의 공격을 하루 종일 막아냈다.
위풍당당하게 공세에 나섰던 ‘엘랑키아 기사’들은 일단 적 후방에 침투하는 것 자체는 성공했지만, 차례차례 박살나서 간신히 돌아왔다.
그 와중에 적은 반격을 가했으며, 대열을 뚫고 들어온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남부 촌놈’들이 승패를 갈랐다.
위풍당당했던 국왕군 우익을 박살내 버렸으며, 후방을 교란하는 바람에 프레니히 백작 휘하의 본대도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제르티에의 롤모델이자, 먼 친척 관계였던 왕실 근위기병대장, 베리브 드 퐁투베 자작의 막강한 기사들이 투입되었지만 기울어가는 전황을 뒤집지는 못했다.
당시 부대의 후방을 맡으며 이 광경을 똑똑히 눈에 새긴 제르티에였다.
토벌군의 후방을 교란했으며, 베리브 자작에게 중상을 입히고 기병대를 무너뜨렸으면서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던 적 보병 연대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들이 제르티에의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연대장으로서 그런 부대를 이끌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것이다.
나중에 부대 이름을 들었었는데, 그룬발트 발음으로 뭐라고 했더라.
아무튼 이상한 이름이었는데.
타타탕! 타탕!
타타타타탕!
“침착하게 자리를 지켜라! 적은 난리법석을 떨 뿐 이다!”
“혹시 모르니 후방 대응을 준비할까요?”
“그렇게 해주게. 허나 여차하면···.”
“하핫,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적의 약점이 보이면 돌격대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주게, 고맙네.”
부대 전체가 전부 드 라글랑 후작가의 가신들이고, 동료이자 이웃으로 알고지냈던 인물드리다보니 손발이 척척 맞는다.
상관인 프레니히 백작이 중요한 위치에 그들을 배치한 것도 이런 점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겠지.
물론 아직은 미진한 부분이 많다. 현재로서는 특별히 약점을 보이지 않도록 건실하게 운용할 뿐이다.
당장은 목표처럼 강맹한 연대로 싸울 수는 없겠지.
···허나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이다. 모자라면 모자란대로,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다행히도 샹다메리에서의 패전 후, 제르티에의 선택은 보상받았다.
국왕 다고베르 2세 폐하는 보병 전력의 증강을 준비하고 있었고, 덕택에 제르티에는 초반부터 여기 참여해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다.
많으면 3천 명도 넘던 비대한 규모의 보병 연대 조직을 1천 5백 명에서 2천 명 정도로 적정하게 줄인다.
중대를 출신이나 소속이 아니라 균일한 전투력을 기준으로 나눈다.
중대, 연대 단위로 철저하게 훈련하여 하나의 부대라는 인식을 명확하게 심는다.
강도 높은 기동훈련을 거듭해, 대열을 형성하거나 변경하는 시간을 대폭 줄인다.
아무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샹다메리에서 상대했던 ‘남부 촌놈’들을 모델로 하여, 거기 필적하는 보병 부대를 양성하는 행동이었다.
제르티에를 비롯해서, 샹다메리 패전을 겪은 귀족 장교들이 ‘신생 왕실군 보병 연대’에 다수 편성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제 다시 태어난 왕실군 보병들은 그 위력을 이번 원정에서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결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기사들이 승리에 쐐기를 박을 때까지 전선을 유지하며 기다리는’ 미력한 존재가 아니었다.
독자적으로 전선을 돌파하고 적을 섬멸하여 승리를 쟁취할 능력이 있는, 그리고 자격이 있는 존재였다.
실제로 첫 날의 전투에서 좌익군을 맡은 또 한명의 왕실군 원수, 아르밀 드 브라뇰 공작이 보병만으로 적진을 무너뜨렸다고 하지 않는가!
실로 자랑스러운 활약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눈만 높다··· 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샹다메리에서 보았던 그 괴상한 연대의 활약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기 도달하는 것은 자신의 부대가 될 것이다··· 라고 몇 번이나 기도하듯 되뇌인다.
“연대장님, 적 기병이 측방으로 돌아옵니다!”
“아군 기병은?”
“전방으로 이동했습니다! 요격할 모양입니다!”
“좋아! 그룬발트 녀석들이 말하지 않았나? 엘랑키아의 기병은 최강이다! 아군 기병을 믿고, 우리 싸움을 계속하자.”
“옛! 알겠습니다.”
“기병전의 전황은 계속 확인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만약 기병전이 조기에 끝나고 적을 무너뜨려 추격한다면, 거기 맞춰 예비대로 적진 돌파를 시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제르티에 소후작은 다시 부대 전방으로 시선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