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74화 (515/556)

47-9. 폴름스 전투, 셋째 날

왕실군 원수, 프레니히 백작이 이끄는 우익군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현재 결전에 나선 엘랑키아 삼군 중 최약체는 분명하다.

계속 슬금슬금 후퇴하며 적의 충격력을 흘려 버리고, 측방에 요새화 된 호펜로이테 마을이라는 든든한 방벽이 없었다면 진작 위기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일부러 우익이 가장 앞서 나온 사선 형태 배치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후퇴할 수 있는 공간도 없었을지도 모르고.

이는 심각한 전력 불균형이고, 지휘관으로서 휘하 병력을 빼간다는데 좋아할 인간이 누가 있겠냐마는 어쩔 수 없었다.

가용한 기병 전력의 상당수는 좌익, 또 다른 왕실군 원수 아르밀 공작에게 몰아주었다.

그리고 국왕 폐하게 직접 이끄는 중앙군을 지켜야 할 전위부대가 필요했으니 왕실군 핵심 연대 몇 개를 양도했다.

그 결과가 현재의 위태위태한 우익군이었다.

한계까지 전선을 축소시키고, 얼마 안되는 예비대로 돌려막기를 해가면서 최대한 시간을 끄는.

“돌아왔습니다, 원수 각하.”

“아, 수고했네.”

왕실군 부원수, 조뤼크 드 브라셀노 자작이 사령부로 돌아왔다.

그는 방금까지 측방 방어선과 보급물자들을 재확인하고 돌아오는 참이었다.

“마을 쪽은, 호펜로이테 쪽은 좀 어떤가?”

“여전히 잘 싸우고 있는 모양입니다, 백작님.”

“허허헛, 금방 우는 소리를 할 줄 알았더니 훌륭하구먼!”

“하하, 누가 키운 연대인데 이 정도로 우는 소리를 하겠습니까?”

오랫동안 최전선에서 함께 싸우기로는, 프레니히 원수도, 조뤼크 부원수도, 그 휘하의 왕실군 연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사이에 생긴 묘한 유대와 신뢰는 평범한 지휘관과 참모장, 그리고 전투부대 사이에 생기는 것 이상의 무언가였다.

어쨌거나··· 지휘관 입장에서는 부하들에게 죽을 고생을 시키고 있는 와중이라 미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대책없이 열세에 팽개쳐진 것이 아니다.

‘한 번은 분명히 통할 겁니다’

최근 사령부에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던 젊은 참모, 트랑카벨의 에트 경이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했던 그 한마디가 여전히 기억난다.

분명 도전적이었고, 위험한 전술이었다.

게다가 프레니히 백작이 맡을 우익군이 당할 압박은 말하지 않아도 명확했다.

하지만 그래야만 했다. 상대의 절반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적군의 한 가운데 뛰어들 때 이미 각오한 바가 아니었던가.

“앞으로도 호펜로이테 쪽을 계속 주시해주게, 혹시라도 방어가 무너지면 즉각 대처해야 할 테니.”

“맡겨주십시오, 원수 각하. 각하의 병사들은 철벽처럼 마을을 수비하고 있습니다.”

“그래, 믿겠소! 나는 개활지 쪽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킬테니.”

비록 공간을 주면서 시간을 버는 수세에 몰린 상황이었으나,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은 아직 휘하의 모든 카드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병력을 아끼고 쪼개 어떻게든 만들어낸 예비대가 아직도 건재했다.

아까 활약했던 기병 연대를 포함해서, 각 연대에서 일부 중대를 차출해 만든 약 2개 보병 연대 규모의 보병 후위대가 있었다.

위태로운 전열을 지원하기 위한 예비대가 아니라, 순수하게 적의 새로운 시도를 무너뜨리고 반격하기 위해 준비한 회심의 전력이었다.

적이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하고 선택지를 던지며 자신을 시험해 보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허나 만약 엘랑키아 우익군이 한계에 도달했다 판단하고 무모하게 공격해 온다면, 반격에 호되게 당할 것이다.

조금만 버티면, 에트 경이 말한 ‘결정적 순간’이 찾아오리라.

“조금만 버텨라, 내 새끼들아···! 조금만 기다리면···.”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오려는 적을 훌륭하게 차단하는 밀집 대형의 부하들을 보며, 엘랑키아 제일의 노장은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자신이 생각보다 에트 경과 그가 내놓은 작전안을 무척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예상대로 되지 않으면 어떡하지? 따위의 생각은 언제부턴가 하지도 않고 있었다.

아마 경애하는 다고베르 2세 폐하도 마찬가지겠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을까. 2년 전까지만 해도 전장에서 적으로 맞섰던 사이인데.

아니, 전장에서 호되게 패배를 맛 보았다는 경험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매번 폐하의 막사에 머물며 밤 늦게까지 전술을 강의하고 토론했던 때를 기억해본다.

너무 열중해서 늦게까지 이야기를 한 나머지, 아침만 되면 눈이 빨갛게 되어 나타나곤 했었다.

걱정되어 한 마디 했더니 ‘내가 보기에는 우리 큰 어르신 프레니히 원수가 더 걱정이오’ 라고 농담으로 받아친 것을 보면, 자신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은 명목상 자신의 직속 참모로 되어있는 에트 경의 조언 없는 사령부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왔는지···.

“원수 각하! 적이 측면에 새로운 보병 연대를 진출시켰습니다!”

“으음! 드디어 전선을 연장시키는 건가!”

적의 압박은 거듭된다.

엘랑키아 우익군의 기조는, 천천히 후퇴하면서 적에게 공간을 내주는 대신, 압박을 줄이고 병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대의 오른편을 지키고 있는 호펜로이테 마을은 움직일 수 없기에, 필연적으로 부대의 좌측만 조금씩 문이 열리듯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다고베르 2세의 중앙군과의 사이에 이격이 생겼고, 적은 이 부분을 노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예상했던 바이다. 그리고 계획되었던 바이다.

“병력은 얼마지?”

“보병 2개 연대입니다! 후속 병력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좋아, 적도 병력이 무한은 아니겠지! 예비대가 움직일 때가 되었다!”

약간은 불안했지만 프레니히 백작은 일부러 하얀 수염이 떨릴 정도로 우렁차게 말했다.

적은 함정에 빠졌다! 라고 자신부터 믿지 않으면 곤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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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에르니히 빌팍스 폰 자이트리츠는 자기가 인생 최대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현재, 존경하는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선배이자 총참모장인 만프레트 경의 지휘를 받는 대군의 좌익을 보좌하는 주임 참모 대리였다.

뮤에르니히는 전쟁관 출신의 정규 참모들 중 나이가 가장 어리고, 가장 최근에 정규 참모 자리를 얻었다.

덕택에 항상 주변에서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으며, 현재도 듣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아직 자신의 실력과 경험이 만프레트 경을 포함한 기라성과도 같은 전쟁관 선배들에게는 아직 못 미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정규 참모이면서도, 외부로 파견나가 전선 지휘관의 보좌를 담당하는 대신 만프레트 휘하에서 그를 보좌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개활지에서 대규모 전단이 열리면서, 만프레트는 총사령관 디오보르크 공작을 보좌해 중앙군을 이끌어야만 했다.

덕분에 뮤에르니히는 처음으로, 일개 야전군의 사령관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물론, 명목상 디오보르크 공작의 지휘권 아래의 좌익군이었지만, 유난히 넓은 전장 특성상 2만에 가까운 병력을 보유한 독립적인 야전군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이는 이제 막 약관의 나이가 된 뮤에르니히에게 흥분이 되는 일이었다.

‘후작 각하, 만프레트 경에게 지원 받은 정예 연대 하나를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기필코 적의 측방을 돌파해 보이겠습니다!’

뮤에르니히는 방금 좌익 지휘관 레트폴레 아티오크 폰 벤셀샤프 후작에게 건의했고, 허락을 받은 참이었다.

레트폴레 후작은 전투 첫날부터 호펜로이테 공격을 명령받아 지휘하고 있었던 인물로, 대단히 신중한 인물이었다.

다른 요새화 마을을 공격한 지휘관들이 크고 작은 패배를 겪었던 것에 비해, 레트폴레 후작은 특별한 전과도 없었지만 패배도 없었다.

혹자는 아무런 시도를 하지 않은 소극적인 성향 때문에 그랬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아직 모든게 불명확한 ‘장기전의 첫 날’ 무리하지 않고 현상을 유지하는 것은 훌륭한 전술적 판단이다.

적어도 뮤에르니히는 그렇게 생각했고, 총참모장 만프레트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이는 두 배 이상 차이가 나지만, 이 화강암과도 같은 단단한 사나이는 전쟁관의 가장 젊은 정규 참모를 존중했고, 그의 조언을 진지하게 들었다.

그래서 뮤에르니히 역시, 위험과 변수를 최소화 하며 ‘대군의 본질’을 최대한 활용해 적을 내리 누르듯 차근차근 우위를 적립해 가는 상관 레트폴레의 방식을 존중했다.

그랬기 때문에, 이번에 레트폴레 후작에게 올린 건의는 가장 도전적이고도 도박적인 수라고 할 수 있었다.

건의를 들은 레트폴레 후작은 한참동안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판단을 금방 내리는 편이었던 상관이 고민하는 모습에, 뮤에르니히는 거절당하리라 생각했다.

허나 한동안 고민이 이어진 끝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전황이 불리하지 않은 현재, 총사령부에서 새롭게 병력을 증강했다는 것은, 새롭게 변수를 만들라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화강암처럼 단단한 남자는 평소처럼 신중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뮤에르니히 경, 귀관이 바란다면 새롭게 증강된 병력을 전부 맡기겠다. 훌륭하게 귀관의 역할을 증명해 보도록.’

심지어 자신이 원했던 것은 정예 보병 연대 하나인데, 기병을 포함해 3개 연대를 전부 맡겼다!

이 정도라면 측익의 전황을 바꿀 뿐 아니라, 회전 전체의 승패를 뒤집을 수도 있는 막강한 연대였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로이엔펠트의 연대장, 에카트 브리첼른입니다.”

“볼켄라스 용기병 연대를 이끄는 가이어 도마르 폰 볼켄라스 남작이오.”

“반츠베르크 연대의 쇠렌이라 불러주시오.”

지금 사령부에서 지원 온 3개 연대는 ‘그냥 3개 연대’ 전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로이엔펠트는 ‘일개 촌민부터 선제후까지 용병업에 뛰어 든다’라고 할 정도로 여러 용병단이 난립하는 신성 그룬발트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용병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상적으로 규모가 크다고 해도 확장 연대 규모의 1개 연대로 그치거나, 정말 크다고 해도 후계 연대를 포함해 2개 정도에 그치는 다른 용병단과 달리 항시 6개 이상의 연대를 유지하는 전문적인 대규모 용병단이다.

그 중 그로이엔펠트 브리첼른 연대의 경우, 최근 10여년 간 꾸준히 전장에서 전공을 세워온 유명 연대였다.

다음으로 볼켄라스 용기병 연대는 주로 검이나 권총, 혹은 기병창을 활용하는 그룬발트의 기마 용병들 가운데 특이하게 긴 총열을 가진 기병총으로 무장한 부대였다.

용기병 답게 중장거리 사격전이나 유격전에도 능했으며, 필요에 따라 말에서 내려 활동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들을 무엇보다 유명하게 한 것은, 상당히 높은 마상 사격 명중률과 무게 중심이 칼 끝에 쏠린 예리한 기병도였다.

그룬발트 동부 이민족의 영향으로 종종 사용되는 무기이기는 했지만, 부대 전체가 이 무기로 무장한 케이스는 볼켄라스 용기병 연대가 유일했다.

원거리 유격전으로 이미 약화된 보병 부대를 표적으로 중거리 일제사격 직후, 기병도를 일제히 뽑아들고 돌진해오는 볼켄라스 용기병 특유의 돌진은 전설적이다.

전술 자체가 가지는 특이성도 그렇겠지만, 이 돌격이 전투를 끝내는 결정타가 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더더욱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반츠베르크 연대는 나머지 둘에 비하면 역사나 전통은 떨어지는 신흥 용병단이다.

게다가 정원이 거의 2천명 정도로 규모도 가장 컸다.

원래는 반츠베르크라는 어느 강변 요새에 주둔하던 부대가 주군을 잃어버린 후 용병화 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들은 아직 명성을 쌓아가는 단계였으나, 그래도 최근 몇년 간 굵직한 전투에 참여해 많은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다만 신흥 용병단 특유의 이런 저런 구설수가 있기는 했으나, 이번 전장에서는 믿어도 될 것이다··· 라는 전쟁관 선배 플로리안의 코멘트가 있었다.

짧은 시간에 대규모 연합군에 소속된 여러 영주들과 지휘관, 그리고 그 휘하 병력들의 특성에 대해 정리해준 선배 플로리안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

원래 참모 역할을 대리하는 전쟁관 참모 특성상, 자신이 맡은 병력을 파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플로리안의 정리는 깊이 면에서 다른 사람이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다.

아무리 정예 연대라 할지라도 단순한 소모전에 투입되면, 평범한 보병이나 기병의 역할을 하다가 녹아내리기 쉬웠다.

하지만 뮤에르니히는 어려도 전쟁관의 참모이다!

문자 그대로의 정예군이 뛰어난 전술가의 손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작전 계획을 설명하겠습니다.”

이 전장은, 조만간 뮤에르니히 자신이 지배하는 전장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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