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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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끄아아악!”
“으으으···.”
“막아! 방벽을 막아!”
“판자! 문짝 가져와!”
이미 반쯤 무너져 내린 건물의 벽에 달라붙어 화승총을 쏘아대던 병사들을 주먹만한 크기의 쇠 포탄이 덮쳤다.
한 명은 치명상을 입고 건물 반대편까지 날아가서는 움직이지 않고, 나머지도 사방으로 튀어 오른 나무조각이나 돌조각 따위에 맞아 혼비백산한다.
특히 바로 근처에서 쏟아지는 나무조각을 뒤집어 쓴 병사들은 피부에 십수 개의 조각이 꽂혀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의식이 멀쩡하고 경상인 자들은 장교의 지휘에 따라 황급히 방어선을 보강한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두툼한 참나무 문짝이 가로놓여 벽에 난 구멍을 절반쯤 가린다.
파팍! 팍! 따닥! 퍽!
두꺼운 나무 판에 탄이 박히는 둔탁한 소리가 소름끼친다.
현재 엘랑키아 군이 점거한 호펜로이테 마을의 가장 외곽을 지키는 폐건물인 이 곳을 얼마나 많은 그룬발트 사수들이 노리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방금처럼 포탄이 떨어진다면 참나무 문짝 따위는 별 의미 없이 두 쪽으로 쪼개질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적이 또다시 여기에 포탄을 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적 사격으로부터 수비군을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것만으로도 공격해오는 적에게 압박감을 줄 수 있고, 수비측으로서는 안정된 상황에서 재장전을 할 수 있다.
“포병! 포병을 저격할 수 있나?”
“위층에서 저격하려고 하고는 있습니다만, 틈을 잘 보여주지 않는 모양입니다!”
“이 건물만 보고 쏴대는 자식들이 천 명은 되는 것 같군! 숲 속의 바퀴벌레 같은 자식들!”
욕설을 내뱉은 엘랑키아 군 장교가 총구를 내밀어 비탈을 기어 오르러던 적병을 쏘았다.
타앙!
“끄허헉!”
은빛으로 빛나는 흉갑에 붉은 점 하나가 생겼나 싶더니, 마치 일어서려는 것 처럼 상체를 움찔거리던 적병이 그대로 굴러떨어진다.
새로 생긴 시체는 더 일찍 시체가 된 운 없는 동료들의 위로 밀려가 새로운 층을 만든다.
엘랑키아 군이 방어를 위해 마을 주변에 파 놓은, 경사는 완만하지만 폭이 넓은 구덩이는 이미 적병들의 시체로 빼곡해 시체를 밟지 않고는 넘어오지 못할 지경이었다.
적은 마치 아군 희생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저돌적으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첫 날의 전투도 격렬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양측은 동원할 수 있는 화력을 최대한 동원해 과시하듯 주고받았고, 엄청난 소모전이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덮어놓고 인해전술을 펼치지는 않았다.
그에 비해서 오늘은 치열함이라는 용어의 종류가 다르다.
적은 끊임없이 중대급 병력을 투입해왔고, 포탄에 계속 얻어맞아 반쯤 무너져버린 이 폐건물을 탈취하기 위해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피해가 누적되고, 비탈에서 버티던 적병들이 녹초가 되면 철수시키고 다음 중대가 투입된다.
때문에 우글거리며 비탈을 기어 오르는 적을 노리는 엘랑키아 군 입장에서는 사상자 비율을 월등하게 가져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키는 쪽인 엘랑키아 군은 교대를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연대 지휘부에서 빌려온 각종 백병전용 무기들도 대부분 창대가 부러지거나 적의 몸에 박힌 채 딸려가 버렸다.
타타타탕! 타탕!
따당! 탕탕! 탕탕탕!
“악! 맞았어!”
또다시 새하얀 화약 연기가 아군과 적군 사이의 좁은 공간을 채우자, 건물 안으로 적탄이 날아 들어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고, 두 명의 몸이 휘청인다.
한 명은 맞은 자리가 좋지 않았는지 비명도 없이 그대로 축 늘어져 버렸고, 다른 한 명은 어깨를 움켜쥐고 엉덩방아를 찧는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닌듯, 동료 병사의 도움을 받아 붕대를 감는다.
부하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부상을 입었어도 위중하지 않다면 쉬기도 힘들 정도로 상황이 안좋았다.
미칠 노릇이지만, 첫 날과 달리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져도 병력 지원은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은 호펜로이테 수비군의 지휘관인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은 주력군을 개활지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호펜로이테 마을에는 간신히 방어 거점들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인 최소한의 병력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당연하지만, 개활지에서 적과 마주하는 주 전선이 훨씬 중요했다.
그리고 아마 자신들처럼 몸을 숨기거나 총탄을 막아줄 엄폐물도 없이, 훨씬 많은 수의 적과 싸워야 하는 동료들이 훨씬 절박한 상황일 것이다.
그러니 호펜로이테 수비군 입장에서 우는 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악착같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수 밖에.
“어어? 저 새끼들?”
“물러난다! 적이 물러납니다!”
“곧 다시 올 거다! 각자 탄약 보급하고 다른 모자란 것 있으면 채워라!”
“예엡!”
비탈 아래에서 악착같이 기어오르던 적들이 썰물 빠지듯 빠져나간다.
물러서는 적 장교의 공포와 분노, 분함이 뒤섞인 표정에 총탄을 한 발 박아주고 싶지만, 총탄은 이어서 몰려올 적병의 선두를 위해 남겨두어야 한다.
막연하게 오늘은 양군이 개활지에서 격돌하는 새로운 전장이 열렸으니, 호펜로이테 마을 거점을 노리는 공격은 잦아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실제로 전투 초기에는 그랬다. 적은 인근에서 공격 태세는 갖추었지만 무리한 진격은 꺼리는 눈치였고.
하지만 얼마 전부터 갑자기 병력이 보강되더니, 로테이션 방식으로 끝도 없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니다.
현재 프레니히 백작의 병력은 전군의 우측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호펜로이테 마을은 그 우익군의 우측을 지키는 셈이다.
또한 하필이면··· 이 용감한 보병들이 지키고 있는 폐건물은 그 호펜로이테 마을에서도 모퉁이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었고.
따라서 호펜로이테를 무너뜨리거나 우회한다면 엘랑키아 군 주력의 측후방을 타격할 수 있는 그룬발트 군이 탐을 내는 것도 당연했다.
‘우리 연대는 적을 끌어들이는 늪이 된다. 설령 최전방이 무너졌더라도, 미리 정해진 다음 방어선으로 이동해 적을 막는다.’
오늘 새벽, 마을 방어를 책임진 연대장이 그렇게 말했었지.
전투 첫 날에도 기어코 외곽 방어선을 뚫어낸 적 돌격대가 마을 중앙까지 침투해 들어오기도 했었다.
당연하지만 반격으로 모조리 섬멸했고,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식으로 하기 힘들 것이다. 예비대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 빼앗긴 마을의 일부는 다시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
‘건물 하나, 골목 하나 충분한 통행료를 받지 않고 내줘서는 안 된다. 그 통행료는 당연히 적의 시체로 받는다!’
그 말을 들을 때만 해도 각자 위치로 돌아가는 동료 장교들과 함께 농담을 하곤 했다.
‘시체를 돈으로 치면 얼마나 받아야 하지?’
‘뭐 대충 키 높이 만큼 쌓아주면 되지 않겠어?’
그런데 그 때만 해도 전투가 이렇게 치열하게 진행될 줄은 몰랐지. 빌어먹을···.
“소대장님! 지원이 왔습니다!”
“뭐? 지원? 정말이야?”
“옛!”
진짜 지원이 없을 줄 알았는데. 뒷문 쪽을 보니, 부사관 한명이 병사 셋을 이끌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인 병사들은 모두 각종 병장기를 한아름씩 안고 있었다.
어깨에는 가죽과 양철로 된 화약 가방도 잊지 않고 있었다. 지원군과 보급품이 함께 왔다!
병장기의 상당수는 망치, 도끼와 같은 작업용 공구들과, 부러진 창대 따위였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머리쪽이 무거운 작업용 공구는 투구를 쓰고 들이미는 적병의 머리통을 부수는 데 탁월하다.
그리고 부러진 창대는 야전에서 쓰기는 너무 짧겠지만, 엄폐물 사이를 비집고 드러난 적의 약점을 찌르기에는 딱 쓰기 좋은 길이였다.
연대 보급관들의 알뜰함에 쾌재를 부르며 지친 병사들이 무기를 나눠 가진다.
이 정도면 한동안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비록 네 명이지만, 이 손바닥만한 폐건물을 지키는 데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전력이었다.
“사령부에서 특별한 지시는 없었나? 전체적인 전황은?”
“아직 크게 밀린 곳은 없습니다. 이곳이 가장 치열하니 지원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오호, 그렇구만.”
다들 생각보다도 잘 싸워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여기도 좀 더 힘을 내서 싸우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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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각한다! 적이 퇴각합니다!”
“추격을 금지한다! 서둘러 기병을 후퇴시키고 보병으로 방어선을 새로 만든다!”
“옛, 백작 각하.”
“휴우··· 이겼군, 그래도.”
엘랑키아 군의 우익 지휘관,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은 명령을 내린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지휘하는 우익군은 적이 공세를 강화한 이후로 꾸준히 퇴각하고 있었다.
적에게 공간을 내주고 시간과 병력을 버는, 전형적인 불리한 쪽의 지연 전술이었다.
그런데 방금은 일부 연대 사이에 보조가 잘 맞지 않았는지, 빈틈이 생겨버렸고 거기 적군의 침입을 허용해 버렸다.
마치 송곳처럼 약점을 치고 들어온 적 기병에 맞서 이쪽의 금쪽같은 기병대를 출격시켜 반격했다.
기병전은 짧았지만, 양측 합쳐서 200기 가까이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치열했다.
그나마 다행하게도 그 상당수가 적군이라는 사실은 위안이 된다.
측면에서 아군 총병들이 지원 사격을 해 준것도 있지만, 다시 한번 적에게 엘랑키아 기병의 강함을 각인시켜 주었다 생각하니 어깨가 으쓱해진다.
통상 그룬발트 인들은 ‘엘랑키아 기사’와 ‘파도와 같은 중장기병의 돌격’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프레니히는 이해하고 있다. 실제 실세는 이런 중소규모 기병전의 우위라는 것을 말이다.
상대적으로 정적인 보병 전술에 비해서, 속도를 살린 기병의 돌격은 심리적 타격을 심하게 입힌다.
이건 기병이 보병에 돌격했을 뿐 아니라, 기병과 기병이 충돌했을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보병간의 싸움에 비해 접근하는 속도가 빠르고, 아주 작은 충돌에도 치명상을 입거나 낙마할 수 있는 기병전에서는 사기가 요동치기 더 쉽다는 말이다.
또한 일단 접전이 시작되면 선두 대열이 뒤섞이게 되는데, 결정적인 차이는 여기서 발생한다.
아무리 가지런하게 대열을 짰다고 해도, 격돌시의 빠른 속도, 사격이나 첫 일격에 의한 사상자 발생, 양측의 충돌과 밀어내기 등의 이유로 뒤섞이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특히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 이렇게 대열이 뒤섞인 부분이다.
당연히 적과 부딪치는 면적이 넓어지고 기병 입장에서 정면의 적 보다는 측면의 적이 상대하기 쉽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면과 측면 두 방향이 적에게 노출된 상태에서도 능숙하게 평소 실력을 발휘할 만큼, 노련함과 용기를 갖춘 인간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서로 뒤섞인 기병들은 어느정도는 위축되기 마련인데, 여기서 대담하게 적을 밀어내는 쪽과 물러나 전투를 회피하는 쪽이 갈리게 된다.
하지만 프레니히가 평생을 전장에서 지켜본 경험으로, 엘랑키아 기병들은 중기병이든 경기병이든, 귀족 가문 출신이든 자유민 출신이든 최고였다.
이런 과감함이 가져온 승리와, 설령 패배했더라도 끈질기게 적을 괴롭힌 기사들의 명성 덕택인지, 엘랑키아 기병을 상대하는 적은 더더욱 소극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방금의 전투도, 적의 선두가 요격당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일제히 소극적으로 전투를 회피하는 바람에 수월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다.
진격이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밀집도가 높아진 적이 집중사격을 받고, 짧은 추격을 통해 약간의 포로를 잡은 것도 덤이었고.
불리한 여건에서도 잘 싸우고 있는 부하들이 자랑스러웠지만, 아무래도 적이 아군을 시험해 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부사관으로 군 경력을 시작해, 어느새 왕실군의 정점인 원수 자리에 까지 오른 프레니히는 스스로 전술이나 군사학에 박식하다는 착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물론 연대장으로, 군 사령관으로 승진하면서 나름의 공부를 하긴 했지만 자신이 군사이론에 취약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는 남쪽에서 파견온 트랑카벨의 에트 경을 만나면서 더더욱 느낀 점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금 적은 어떤 ‘이론’에 따라서 자신의 우익군을 압박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렇게 나서면 너는 어떻게 할 거지?
이만한 공격에 반격은 어느 수준까지?
마치 적장이 이런 식의 질문을 던져오는 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수십년을 전장에서 보냈고, 지금보다 큰 병력으로 적과 대치한 적도 많았지만 이런 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다!
자신이 이런 저런 뛰어난 전술가들과 접하면서 경험으로 알고 있던 전술안이 생긴 것인지··· 적장이 특별한 것인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좋아, 상대해주겠다, 애송이!”
프레니히는 오랜만에 호승심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며, 손바닥과 주먹을 부딪쳤다.
어쩐지 자신보다 군사 경험이 훨씬 적은 ‘애송이’가 자기 복심을 들여다 보려고 한다··· 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백작님?”
“아, 그냥 혼잣말이었네.”
의미 없는 헛소리였건만, 참모가 듣고 물어오는 바람에 멋쩍게 웃는다.
“그보다, 현재 아르밀 공작 쪽은, 좌익 쪽은 상황이 어떤가?”
“특별한 보고는 없습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직 주력 기병은 움직임이 없습니다.”
“호오··· 그렇다는 말이지.”
그 말은, 그룬발트 군의 주력이 확실히 자신에게 쏠리고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