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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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남동부는 변경으로 통한다.
상대적으로 발전된 제국의 중앙이나, 발전도만 따지면 대륙 제일이 아닐까 싶을 때도 있는 주디칼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남쪽과 동쪽으로 걍팍하고도 포악한 타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그만큼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시달리기 쉬웠고, 그 대신 고만고만한 지방 영주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 잘 뭉치는 편이었다.
남자들 또한 수시로 국경을 넘는 침입자들에 맞서기 위해 쟁기 만큼이나 각종 무기에 익숙한 거친 사내들이었다.
그리고··· 고향과 주군, 그리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상황에 ‘익숙’한 편이었다.
‘그룬발트 제국을 위하여!’
‘세계수의 가호가 함께하길! 그룬발트 제국 만세!’
‘비덴누벨을 지키자!’
서서히 다가오는 엘랑키아 기사들을 바라보는 남동부 병사들은 공포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두려워했다.
바로 이틀 전, 1개 연대 정도 규모의 엘랑키아 기병대의 급습에 대열이 깨지고 패주를 경험했던 이들이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전투 함성을 지르며 결전을 준비했다.
특히 최전선에 위치한 전열 장교와 부사관들은, 전투가 시작되면 그들의 목숨이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기병의 대군이 돌격해 왔을 때, 사각 대형을 갖춘 연대가 버틸 수 있는 것은 최전방에서 목숨을 버려가며 대열을 유지하는 장병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이니까.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고,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공포로 떨리는 팔을 부여잡고, 울상을 지으면서도 전방을 노려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전방을 가득 채운 엘랑키아 기사들의 대열이 돌입해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안 오는군.”
“그, 그렇습니다···.”
허망하다.
방금까지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결코 서두르지 않지만 무서운 기세를 보여주며 접근하던 엘랑키아 기병대는 돌격해오지 않았다.
그러기는 커녕, 소총 사거리에도 접근하기 전에 말을 돌려 돌아가 버렸다.
공포에 떨면서도 마음을 다잡고, 마지막으로 고향에 있는 가족을 생각하며 억지로 호전적인 고함을 지르던 병사들은 차오른 살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제풀에 지쳐버린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빌어먹을 엘랑키아 놈들! 개자식들이! 덤비란 말이다!”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욕설을 하고 고함을 지르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그 자신도 전방의 비덴누벨 연대에서, 만약 사각 대형이 무너진다면 부하들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오로지 이번 전투의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 마음을 먹었었다. 참모 타를라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전방으로 향한 것은 결코 연극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게까지나 마음의 무장을 단단히 했었기에···.
접근하던 적 기병대가 말머리를 돌려버리자 이루 말하기도 힘든 허탈감이 찾아왔다.
굳이 표현하자면, 총에 맞은것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격렬하게 싸우던 병사가 전투가 끝난 이후에야 통증을 느끼는 것과도 비슷하다고나 할까.
“젠장··· 젠장···.”
펠쿠트 백작은 자기 자신에게 역겨움을 느꼈다.
그 이유는 적이 물러갔다는 것이 확정되었을 때, 처음으로 느낀 보고가 ‘안도감’ 이었기 때문이다.
당장은 위험에서 벗어났다, 지금 죽지 않아도 된다.
인간으로서, 아니 동물로서 당연한 안도감일지 모른다. 하지만 누구보다 깊은 결심을 하고 직접 전방에 나섰던 펠쿠트는 깊은 자괴감과 모욕감을 함께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럴 것인데, 주변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번 최후를 각오했던 것은 그들 역시 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펠쿠트 백작님! 펠쿠트 백작님!”
후방에서 참모 타를라 니케 폰 자이트리츠의 외침이 들린다. 아담한 체구를 가진 그 여참모는 어울리지 않게 키가 큰 군마를 타고 백작을 찾았다.
“무슨 일이오, 타를라 경?”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펠쿠트 백작님. 만약 적 기병군이 정면 돌파를 노리는 게 아니라면 여기 계셔서는 안 됩니다.”
“그건 무슨 말이오!”
“장기전이 되고 기동전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령관을 초전에 잃을 수는 없습니다.”
그제서야 이해가 갔다.
이번에는 엘랑키아 군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돌입해올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전열이 무너지면 지휘관이 살아 있어도 소용 없다는 생각에 배수의 진을 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엘랑키아 군이 이처럼 기만 전술을 사용해가며, ‘무언가 다른 목적’을 노리고 있다면 지휘관으로서 다른 책임이 생긴다는 것이다.
“백작님!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고 지휘에 전념해 주십시오!”
“비덴누벨 연대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펠쿠트 백작 만세!”
“맡겨주십시오!”
전방 한가운데를 지키고 있던 비덴누벨 연대는 펠쿠트 백작 본인의 영지에서 소집한 병력이다.
주군과 참모의 대화를 들은 그들은 어떤 상황인지를 깨달았다.
방금까지 주군이 자신들과 함께한다는 사실에 용기백배했던 그들이다. 그런 만큼, 참모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자 이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지금은 돌아가지만, 때가 되면 또 그대들과 함께 하겠다!”
“기다리겠습니다!”
선언하듯 말하는 펠쿠트 백작에게, 그들의 연대장이 무게 있는 한 마디로 대답하자, 비덴누벨 연대가 한꺼번에 함성을 지른다.
그렇게 부하들을 뒤로 하고, 펠쿠트 백작은 후방으로 물러난다.
“아주 좋은 병사들입니다, 펠쿠트 백작님.”
“젠장··· 나 같은 멍청이에게는 과분한 병사들이지.”
“멍청이라니요··· 백작님의 소중한 병사들이 멍청이를 따를 리가 없습니다.”
“...타를라 경, 귀관은 좀 더 조심스럽게 말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만약 불쾌하시다면···.”
“아니, 아니오! 딱 좋소. 이제 좀 일을 같이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신뢰 섞인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은 호위병들과 함께 사령부로 돌아온다.
두 사람은 한참 말을 하지 않는다.
타를라는 갑자기 예상도 못한 상황이 되어버린 전장의 다음 국면이 어떻게 돌아갈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미 그들이 있는 전장의 우측을 제외한 나머지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 싸움은 그녀가 보기에 그룬발트 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어 엘랑키아 기병대가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교전은 하지도 않고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다면 무언가 달리 노리는 게 반드시 있을 것이다.
단순히 펠쿠트 백작 휘하의 그룬발트 우익군을 묶어놓기 위해서?
물론 2만에 가까운 상당한 전력을 총 한 발 쏘지 않고 묶어두는 성과는 있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엘랑키아 기병 주력이 묶여서 어쩌자는 것인가!
그룬발트 군 전체에서 펠쿠트 휘하의 우익군이 차지하는 중요도는, 엘랑키아 군 전체에서 마주보고 있는 기병 대군이 차지하는 중요도는 비교도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자칫 공멸할 수도 있는 무모한 돌격을 피한 것인가 라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그래서 다음 수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나머지 전선이 뭔지도록 놔둘 생각은 아닐 텐데.
그렇게 타를라가 말 없이 고민하는 사이, 펠쿠트 백작의 머리속에는 오로지 한가지 광경만이 떠올랐다.
방금, 비덴누벨 연대 한가운데에서 엘랑키아 기사들의 돌격을 기다리던 때였다.
그 때 보았던.
말머리를 나란히하고 속보로 접근하던 기병들이 ‘일제히’ 말머리를 돌려 무심한 척 멀어져가던 모습 말이다.
군사에 밝지 않은 이라면, 독특한 기동이라 생각할 뿐이었겠지.
하지만 어린 나이에 비해 일찍 전장에 나섰고 기마와 무기에 능숙한 펠쿠트 백작은 조금 다른 것을 보았다.
수백 기의 기병이 마치 한 몸 처럼 움직이는 소름끼치는 매끄러움을 말이다.
이는 그냥 훈련시킨다고 되는 수준의 움직임이 아니다.
아니, 대부분의 훈련 교관은 그런 수준의 움직임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평범한 기병대는 그런 움직임을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명령을 전달하고 수행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으니까.
그래서 두려웠다.
부대 구석구석 지휘관의 명령이 확실하게 전달되고, 부대원 전체가 마치 한 몸 처럼 움직이는 호흡과 엄청난 기마술이 말이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기마술을 가진 엘랑키아 기사들은 대체 얼마나 강할까?
휘하 병력이 대등하게 싸울 수 있긴 할까?
라는 공포감이 놀라움에 뒤섞였다. 첫 날 싸움에서 측면을 공격했던 엘랑키아 기병들은 이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들도 충분히 강했는데··· 그보다도 강한 중기병의 대군이 나타난 것이다.
“타를라 경, 다음 대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네.”
“알겠습니다, 백작님.”
홀로 고민해도 소용 없었다. 그에게는 믿음직한 참모가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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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지? 달려들 줄 알았던 엘랑키아 기사들이 도망쳐 버렸소! 어째서지? 역시 돌파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인가!”
“엘랑키아 기병대 지휘관이 부대를 조심스럽게 운용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아하··· 그랬단 말이지! 이건 아군이 유리하다는 신호로 봐도 괜찮겠소?”
“지금은··· 그렇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오호! 다행이군! 역시 우리 그룬발트 군은 강해!”
디오보르크 공작이 홀로 신나서 승리에 대한 상상을 하는 동안, 만프레트 그로블 폰 자이트리츠는 엘랑키아 군의 행동을 분석하기 위해 애를 썼다.
엘랑키아 기병의 선두는 분명 그룬발트 군 최전선에 닿을 듯이 다가온 상태였다.
아마 100여 미터만 더 갔다면 총격전이 벌어졌을 수도 있는 거리이다. 돌격을 위해 속도를 붙인 기병대에게 100미터는 그야말로 지근거리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 거리에서 일제히 말머리를 돌려 돌아갔다는 것은 명령이 미리 전해졌다는 것이다.
비록 돌격속도는 아니었으나, 수천 기가 속보로 대열을 유지한 채 무서운 기세로 접근했었는데··· 반전할 시기를 노리면서 그런 기세를 보였다는 것인가.
과연 엘랑키아 기사가 정예 중의 정예라는 것은 이견을 제시할 방도가 없다.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만프레트는 우익군 지휘관 펠쿠트 백작이 느꼈던 것과 비슷한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엘랑키아 기병은 그럼에도 병력을 되돌렸다.
무엇을 위해서일까.
아마도 정면의 그룬발트 우익이 아닌, 중앙이나 반대편 좌익을 노릴 생각은 아닐까?
불가능한 생각은 아니었다.
본래 이처럼 양측의 보병이 전선을 뒤덮고 꽉 맞물린 상황에서 기병이 할 일은 많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막기 위해서 가득 들어찬 상황에서 기병이 돌아다니다간, 기동성은 기동성대로 잃어버리고 괜히 아군 보병만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괜히 아군 창대를 꺾어 버리거나, 총병의 사격 각을 막아버리는 등의 일 말이다.
이런 좁고 복잡한 환경에서 무사히 돌입한다 해도, 적에게 충분한 충격력을 발휘할지도 미지수였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말에서 내려 예비대 보병과 섞여 권총을 비롯한 화약 무기라는 충격력을 살린 도보 돌격대로 참전하는게 나을 것이다.
만약에··· 그 기병이 8천을 넘는 대군이라면? 이들 상당수가 말에서 내려 돌격대로 활용된다면?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끝도 없이 후방으로부터 밀고 들어오며 충격력을 투사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두렵지만 상황이 조금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미 적 보병과 싸우느라 기진맥진하고, 총이 비어 버린 보병 연대의 약점을 기어코 찾아내 뚫고 들어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예 기동성과 충격력을 이용해 방어선을 돌파해버리는 기병과는 다르지만, 전선에 혼란을 주고 일부 연대에 돌이키기 힘든 피해를 주는 정도는 가능하리라.
···그건 용납할 수 없다. 우직하게도 조금씩 우세를 쌓아가고 있던 그룬발트 군 입장이 아니던가.
그 외에도, 마을을 우회해서 측후방을 노리거나, 엉뚱한 방향에서 공격을 시도할 수도 있었다.
당장 전술적인 성과가 나오는 공격은 아니겠지만 그룬발트 군에게 혼란을 주고 대응을 위해 병력을 낭비하게 만드는 목적은 가능하다.
전형적인, 열세에 몰린 쪽에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혼란을 일으키는 전법이다.
허나 기병의 기동성을 이용해 엉뚱한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만프레트는 디오보르크 공작의 직할군으로 5개 연대의 보병과 4개 연대의 기병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설령 적군이 어중간한 병력을 보내 좌충우돌로 혼란을 유발하려 한다 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전력이다.
하물며, 그 경우 우익의 펠쿠트 백작 휘하 군이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 기병을 막기 위해 묶여 있을 뿐인데, 그 견제해야 할 기병이 사라지면 당연한 것이 아니겠나.
결국 기책은 기책일 뿐, 제대로 된 대책이 아니기에 근본적 해결이 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목을 조일 뿐.
···그래도 전장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두려웠다. 지금 그룬발트 군에게 필요한 것은 확고한 질서였다.
이대로 현 상황이 지속되며, 팽팽한 싸움이 거듭되고 거듭된 끝에 투입할 수 있는 전력의 차이로 어차피 승리는 그룬발트 군의 것이다.
그런데 전장에 혼란이 발생하면 ‘만약···’이라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좌측에 지원군을 보낸다.”
“옛, 만프레트 경. 얼마나 보낼까요?”
“보병 2개 연대와 기병 1개 연대를 보낸다. 적이 측면에서 싸우는 것을 거부했으니, 아군이 유리한 반대편 측면을 완전히 밀어 버리겠다.”
“과연! 명안이군요, 만프레트 경! 즉시 명령을 전달하겠습니다.”
“역시 대단하군! 만프레트 경만 믿겠소!”
명령을 전달하는 작전 참모와 디오보르크 공작이 동시에 감탄한다.
전장의 주도권은 결코 내주지 않는다. 적은 이대로 허덕대다가 어느새 자신이 패배한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만프레트는 좀 더 승리에 다가갔다 느끼면서도, 만약을 위해 엘랑키아 기병 쪽을 계속 주시한다.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