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 폴름스 전투, 셋째 날
타를라 역시, 그룬발트의 다른 병사들처럼 엘랑키아 기사가 두려웠다.
강하고 끈질기기로 정평이 난, 대륙 최강의 기사들.
어떻게든 빈틈을 찾아내기 위해서 창병과 총병의 틈으로 파고 들 것이고, 자신이 근거리에서 저격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창날의 숲에 바짝 다가와 자신의 권총을 겨눌 것이다.
아주 약간의 틈이라도 있으면 돌입해 올 것이다. 자신의 피와 상대의 피를 동시에 뿌리는 한이 있더라도.
설령 말이 창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쓰러지더라도, 온 몸을 철갑으로 감싼 인간 흉기들은 두 다리가 멀쩡한 한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감히 악명 높은 엘랑키아 기사들과 정면으로 맞서려 했을 그룬발트 제국군 청년들의 최후가 보이는 듯 했다.
엘랑키아 기사들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고 치더라도···.
펠쿠트의 소중한 병사들과 연대들은 절반은 녹아 내릴 것이 분명했다.
양측이 힘을 합쳐 쌓아 올린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연못처럼 고이겠지.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엘랑키아 기병보다 그룬발트 보병의 희생이 더 클지도 모른다.
그게 타를라의 영민한 머리가 짧은 순간의 가정으로 산출한 결과였다.
“...펠쿠트 백작님과 휘하 장병들은··· 승리의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하··· 타를라 경도 결국 그렇게 생각하는군··· 뭐, 나도 어떻게 될지 뻔히 보이는 군. 그래··· 영광스러운 자리라···. 전쟁관에서는 개죽음을 낭만적인 용어로 표현하는 것도 배우는 것 같군.”
“백작님, 결코 개죽음은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황한 듯한 타를라의 말을 들은 펠쿠트 백작은 대답하지 않고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쓰게 웃는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타를라지만, 살짝 가슴이 아프다고 느꼈다.
‘군이 전장에 나서면,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목숨조차도 말이다. 전장의 병사들도, 그들을 지휘하는 장교들도. 나도, 그리고 너희들도 승리를 위해서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하다.’
그녀가 전쟁관에서 가장 존경하는 선배, 그리고 이번 전투에서 총참모장으로서 사실상 사령권을 가진 만프레트 경이 했던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참 냉혹한 말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익군의 남동부 출신 보병 2만여 명을 대가로 엘랑키아 기병군을 묶어버릴 수 있다면···.
냉혹하게 말하자면, 이는 오히려 ‘싸게 먹히는’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이로서 전장에서 그룬발트가 두려워해야 할 ‘이변’은 사라진다.
설령 펠쿠트의 방어선이 엘랑키아 기병대를 끝내 막아내지 못하고 전멸하더라도 결과는 같다.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드는 2만의 잘 훈련된 보병이다. 어떤 기병대가 오더라도 피해 없이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이미 최초의 충격력을 상실하고 숫자도 줄었으며, 말도 사람도 녹초가 되어버린 엘랑키아 기사는 이제 상대가 불가능할 공포의 대상은 아닐 것이다.
이를 제외하면, 보병과 포병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양군이 호각, 압도적인 예비 병력을 가진 그룬발트 군이 패배할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어쩐지, 당당하게 이것을 이야기 하기는 힘들었다.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펠쿠트의 눈이 너무도 슬퍼 보였기 때문일까.
“믿겠소, 타를라 경.”
“...네? 백작님? 무엇을···.”
“귀관을, 그리고 전쟁관의 지휘를 믿겠다는 거요. 좋소, 시체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깔아주지.”
펠쿠트 백작은 공포인지 분노인지, 몸을 부르르 떨며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앙 다문 이빨이 드러난 그 표정은 마치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대신 반드시 이겨주시오. 그리고 여기에서 비덴누벨의 장병들이, 제국 남동부의 청년들이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음을 모두에게 알리시오!”
“배, 백작님?”
“이렇게 된 이상 부하들과 함께 끝까지 싸워 보겠소. 지휘는 맡기겠소. 원하는대로 명령을 내려 주시오.”
“아, 아닙니다. 저는 우익 사령관인 백작님을 보좌할 뿐, 직접 지휘하는 것은···.”
“내가 중간에 끼어 봤자 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이렇게 된 이상, 각자 잘 하는 분야를 맡아 해 보자는 것이오. 전쟁관 출신 아니오? 단순 참모 훈련만 받는건 아니잖소.”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럼 맡기겠소. 뭐 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겠지만, 혹시라도 우리가 힘에 부치는 것 같아 보이면 지체없이 도망치시오.”
펠쿠트 백작의 말은 비장했다. 타를라는 너무 놀라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첫 날 전투에서도, 펠쿠트는 의도적으로 타를라를 다른 부대로 보냈었다.
이는 참견을 듣지 않고 자신만의 의지로 전투를 지휘해 승리하겠다는 유치한 생각의 발로였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적의 기습 공격에 처참하게 깨졌고, 계속 전장을 주시하고 있던 타를라가 때맞춰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면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은 조금 다르다.
펠쿠트는 타를라의 조언을 듣기 싫어 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휘권을 완전히 위임하고 조언이라는 중간 과정 없이 직접 부대를 이끌라 말한 것이다.
자신은 압도적인 적의 돌격에 무너지기 쉬운 전방 부대와 함께하며 최후까지 사기를 올릴 생각이다.
다행히도 휘하 병력의 상당수, 특히 폰 비덴누벨이나 그 이웃 가문 출신의 숙련된 장교들은 펠쿠트와 친했고, 서로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자, 적이 온다! 믿겠소, 타를라 참모!”
“백작님···.”
“뒤를 부탁하겠소!”
어느새 전면에서, 길게 횡대를 이룬 엘랑키아 기병의 선두 대열이 접근해오고 있었다.
부대 사이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장교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분위기가 술렁거린다.
다들 어느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각오만 하고 기다리는 것과, 각오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후방 사령부에 남겨진 타를라는 펠쿠트 백작의 뒷모습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마치 다시는 보지 못할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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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쾅 쾅! 퍼버벙! 뻐엉!
타타타탕! 타타타탕! 타타탕!
만프레트 그로블 폰 자이트리츠가 지휘하고 있는 총사령부는 전장 최후방에 위치한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들리는 포성과 총성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과거에도 만프레트는 고용된 참모로서 5만을 넘는 대군을 지휘했던 적이 있었다.
다만 당시에는 그 압도적인 병력 자체가 무기가 되었었고, 이번처럼 격렬한 결전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적이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례적인 초반 교전을 겪은 후, 무언가 약점을 찾아보려던 적이 사기를 잃고 패주하면서 전투가 싱겁게 끝나 버렸던 것이다.
이번에도 그만한 압도적 전력 차이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만프레트는 전쟁관의 전략가이자 참모로서, 자신이 갈고 닦아 깨우친 이론을 전장에 적용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격렬하고 유혈낭자한 전투를 좋아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선호하는 것은 ‘싸우기 전에 이겨놓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병력 격차이든, 지형적 우위이든, 아니면 단순히 외교적 수단이든 상관없었다. 싸우지 않고도 적에게 압박을 줄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나름 그런 기대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10만 대군을 모았다고 하면, 엘랑키아 군이 전투를 꺼리지 않을까··· 라고 기대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는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철저한 항전 준비를 마치고 도발했다. 올 테면 와 보라는 듯이 말이다.
게다가 사방에서 공격하기 까다로운 방어 준비를 갖춘 덕택에, 병력과 전술을 이용한 압박을 할 기회도 없었다.
···뭐 시간도 없었지만.
이번의 엘랑키아 군은 병력 차이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무섭게 도전해온다.
아마 10만이 아니라 20만 대군을 동원했더라도 엘랑키아 군은 물러서지 않았으며, 전투는 벌어졌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크고 작은 내전이 끊이지 않았던 그룬발트나 주디칼리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말 그대로 사생결단을 낼 각오인 군단.
이기더라도 정복하지 않고, 지더라도 멸망하지 않는 ‘미적지근한’ 싸움에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었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프레트 경, 적 중앙군의 화력 압박이 상당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화력이? 포대를 집중시킨 상황을 말하는 것인가?”
“예, 포대와 총병 대열을 거의 수평하게 배치해서, 아군 전방 연대들이 애를 먹고 있는 모양입니다.”
“흠···.”
화포의 절대 수량은 그룬발트 군이 조금 더 우위였다. 거의 사 분의 일 정도의 수량은 더 많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그룬발트 군은 그 우세한 포대를 전선마다 균일하게 분산배치하고 있었고, 엘랑키아 군은 중앙에, 그것도 전방에 집중배치하고 있었다.
화승총 사거리 안쪽에서, 수평으로 놓고 쏴대는 직사 포격의 위력이 무시무시하다는 것은 당연했다.
그에 비해서 보병대가 진격하고 양측이 근접전에 들어가면서 그룬발트 군의 포대 상당수는 표적을 잃고 대기하고 있었다.
만약의 경우 균열이 일어나거나, 적이 결사적인 측면 공격을 해 오면 대응하는 용도로 활용할 생각이었으나···.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이쪽도 맞대응해서 적의 기세를 누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적 중앙군이 화력 우위를 보이는 것은 지엽적인 상황이다. 그만큼 양 측면을 포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수적으로도 부족하고, 포대 지원도 빼앗긴 적 우측은 계속 밀려나고 있었다. 아군이 좀 더 비집고 들어간다면 적 중앙군 측면을 노리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적 좌측은 기병만 집중된 극단적인 대형이다. 하지만 기병만으로 무언가 하기에는 그룬발트 보병이 너무 많았다.
최종적으로 적의 양 날개를 잘라내고 나면, 강력하지만 둔한 적의 중앙을 반포위 할 수 있으리라.
“후방의 포병대에게 전달해라. 아군 전열의 측면에 집결, 새로운 포대를 만들라고 말이다.”
“옛, 만프레트 경.”
“적군처럼 보병 위치까지 나아갈 필요는 없다. 비스듬한 측면에서 지원 포격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그리고 예비대에서 좌우 각각 1개 연대씩 파견해 포대를 호위한다.”
“곧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우세할 때, 예비대를 적절히 활용해 우세를 확정짓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열세인 군은 누구나 ‘지금은 불리하지만, 반격의 기회는 반드시 온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지 않고선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불리하지만 이길 수 있는 싸움과, 그저 패배를 늦출 뿐인 싸움에는 임하는 각오 자체가 달라진다.
그러니 조금 더 압박해서, 당장의 상황을 해결하기 급급해 반격의 씨앗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도 전술이다.
역전 당하는 것은 역전의 여지를 주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그룬발트 군은 압도적인 대군이다. 병력과 화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해결해 버릴 여유가 있다는 말이다.
엘랑키아 군은 오늘이 지나기 전에, 이런 열세에도 불구하고 개활지에서의 회전을 받아들인 것을 후회하게 되리라.
“아앗! 만프레트 경! 오고 있어요! 엘랑키아 기사들이!”
“예? 디오보르크 공작님?”
“움직인다! 엘랑키아 기사 놈들이 전진해옵니다!”
“흐음···.”
확실히, 아군 우익과 대치하고 있던 엘랑키아 기병대가 서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아직 서두르지 않고 대열을 갖춰 걷는 정도였지만, 양측이 교전 거리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결국엔 정면 돌파를 생각하는 것인가···.
어쩔 수 없는 타이밍이다. 마지막까지 좌익군은 아껴 두려고 했겠지만, 중앙은 호각세에 우익군은 밀려나고 있었다.
말이 호각세지, 수적 열세가 확연한 지금 비슷하게 소모전이 벌어지면 불리한 것은 엘랑키아 군이니까.
사실 지금이 아니면 활용할 기회도 없을지도 모르지. 나쁜 판단까지는 아니지만, 지극히 평범한 판단이다.
“마, 막을 수 있겠소? 아군이!”
“...예. 펠쿠트 백작군은 남동부 출신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유대가 깊고 훈련도 충실한 정예군입니다. 반드시 엘랑키아 기병대에게 큰 피해를 줄 것입니다.”
“오오, 다행이군! 역시!”
이제 디오보르크 공작은 불안해 하면서도 승리 자체를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총사령관이 불안해하는 것은, 군 전체의 분위기에 영향을 주니까.
그나저나··· 펠쿠트 백작은 부디 살아남았으면 한다. 타를라도 그렇게 말했지만, 저 나이에 보이기 쉽지 않은 기량을 가진 인물이라 생각한다.
다만 적은 대체 전력을 상상하기도 어려운 기병의 대군이다. 잘 막아낸다 할지라도, 잘 해 봐야 공멸일 상황.
펠쿠트 백작과 그 부하들에게는 애석한 일이지만, 그걸 각오하지 않고서는 저 기병의 대군을 막을 수 없다.
그것을 위해 디오보르크 공작 직속의 예비대는 언제라도 출동 준비를 마치고 있었고.
이떤 형태로든, 엘랑키아 왕국이 자랑하고 지금까지 아껴두었던 최후의 카드, 기사대는 사라지게 되리라.
“마, 만프레트 경! 저걸 보시오? 기병 놈들이··· 왜 저러지?”
디오보르크 공작이 또 호들갑을 떤다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옮겼을 때, 만프레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