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 폴름스 전투, 셋째 날
“역시! 전쟁관의인재들은 대단하군, 나는 만프레트 경만 믿겠소. 제발 승리를! 나에게 승리를 가져와 주시오!”
“예, 맡겨주십시오, 공작 전하.”
만프레트는 불안에서 벗어났는지, 활짝 웃으면서 신뢰를 표하는 디오보르크 공작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중요한 전투 상황에서 괜한 생각을 했다.
물론 그가 ‘세델레네 공의 또 다른 제자’에게 깊은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로 인해··· 엘랑키아 왕국과 자웅을 겨룬다는 전장을 자신이 맡아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사실이다.
기존에 맡았던 전장을 대리인에게 맡기고, 고용주와의 신뢰를 어느 정도는 저버리면서까지 말이다. 전에 없었던 일이고, 그만큼 집착한 일이 맞다.
하지만 이는 개인적인 문제로 고집을 뿌렸을 뿐, 전쟁관의 참모로서 할 일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차기 황제로 확실시되는 후보자를 섬기며 전군을 통솔하는 총참모장의 입장이다.
이번 전투는 분명, 향후 100년의 역사를 결정할 중요한 전투가 될 터, 개인적인 은원관계는 접어둘 수 밖에 없었다.
하물며, 그의 ‘라이벌’은 이 전장에는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왜냐하면, 어느정도 수준에 오른 전술가 끼리의 전투에서는, 상대방의 기동전만 보아도 버릇이나 특징이 보이기 때문이다.
세델레네 공이 항상 말하기를, 전투는 양측 사령관이 나누는 대화와도 같다 말하곤 했었다.
아마 이 말을 만프레트 만큼 잘 이해하고 있는 이는 대륙 전체에 아무도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전술과 전력이란 마치 인간의 지문과도 같아서, 비슷한 듯 하면서 조금씩 차이점이 있다. 설령 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배운 사이라 할지라도.
특히나 자이트리츠 전쟁관은 이를 파악하는 것을 직접 병력을 움직이는 용병술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가끔은 위험한 강행 정찰 이상으로 적의 다음 수를 읽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상대의 다음 수를 예측할 수 있다’만큼 가치있는 일이 또 있을까?
그래서 전쟁관의 참모들은 무수히 많은 난상토론과 도상훈련, 그리고 야전훈련과 실전을 거쳐서 그 ‘감각’을 익히게 된다.
아니,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절대로 전쟁관의 정규 참모가 될 수 없다.
적의 배치와 기동, 심지어 교전 시작시 접촉하는 각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상대의 버릇과 특징을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그렇게 몇가지 범주로 상대를 묶을 수 있고, 상대의 성격이 급한지, 병력을 구석구석까지 장악하고 있는지 등 또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처음에 엘랑키아 군의 기괴하지만··· 대담하다고 할 수 있는 극단적인 배치를 보았을 때 생각했다.
어쩌면 적진에는 ‘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이건 만프레트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위대한 전술가라 평하지 않을 수 없는, 비젤키르헨의 세델레네 공의 ‘버릇’이었다.
누구보다 효율적인 정석을 개발하고, 이를 남에게 공개하고 알려주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러면서도···.
그래놓고 본인은 극단적인 변칙 전술을 즐겨 쓰는 모순 말이다.
하지만 그 이후의 기동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지켜본 결과, 그렇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적의 배치는 그렇게까지 전술에 통달한 인물이 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열세에 처한 나머지 요행을 바라고, 혹은 충동적으로 한 배치가 분명했다.
괜히 혼자서 흥분한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했다.
그럼 어리석은 배치를 한 적장에게, 상응하는 대가를 주면 될 뿐이다.
그때, 보조 참모가 달려와 전령의 도착을 알린다.
“디오보르크 공작님, 만프레트 경! 우익군의 펠커트 백작께서 전령을 보내왔습니다!”
“무슨 내용인가?”
“전령! 적 기병의 목전에 도달했다. 우익군이 대기병 사각 대형을 갖추는 것을 허락받고 싶다, 이상입니다!”
“흠···.”
만프레트는 즉각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전장을 다시 살핀다.
현재 가장 먼저 전투에 돌입한 좌익에 이어, 중앙군도 적의 중앙과 교전을 시작했다.
전투 초반과는 비교도 안되는 밀도로 총성과 포성이 울리고 있는 것을 보면, 그 격렬함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서로 전투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펠쿠트 백작의 우익군과··· 문제의 기병 대군으로 이루어진 엘랑키아의 좌익군 뿐이다.
적 기병과 대치하고 있는 펠쿠트 백작이 두려웠는지, 전군을 대기병 대형으로 교체해도 되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허락하는게 낫지 않겠소이까, 만프레트 경? 엘랑키아의 기병을 막아야 하니!”
디오보르크 공작도 한마디 거든다. 어지간히도 엘랑키아의 대규모 기병군이 두려운 모양이다.
하지만 만프레트는 망설인다. 자신이라고 엘랑키아 기사가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물론 거의 자연재해라도 되는 수준으로 과하게 두려워하는 그룬발트 군 수준은 아니더라도, 엘랑키아 기사는 그 자체로 인간 흉기가 맞았으니까.
그러니 대기병 사각 밀집 대형을 미리 취하고 싶은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 이르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대기병 밀집 대형은 기동성이 극도로 저하되기 때문이다.
사방으로 창날을 세우고, 총병의 지원을 받는 대형이다 보니 ‘앉아서 적을 기다리는’ 것에는 적합하지만, 적이 오지 않으면 단숨에 전장의 방관자가 되어버린다.
그러니 적이 올 수 밖에 없는 핵심 방어선에 미리 깔아놓는 게 기본이다.
그러니 이처럼 적과 거리가 있고, 아군이 수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는 정면으로 폭이 깊은 창병 대열을 여럿 배치한 표준 전투 대형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하지만···.
“그렇게 하라 전달하도록. 하지만 중앙과 간격이 너무 벌어지면 안되니, 대열을 갖추고 천천히라도 위치를 맞추라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만프레트 경.”
8천의 기병군에 개활지에서 맞서야 하는 펠쿠트 백작의 상황도 이해는 갔기 때문에, 허가하기로 했다.
분명 엘랑키아 기사들과 마주보고 대치하고 있는 병사들의 신경은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기에.
게다가 펠쿠트 백작의 곁에는 그가 인정하는 여참모, 타를라가 있었다.
“특이사항이 있으면 곧바로 보고해주게.”
“알겠습니다!”
이제 준비는 끝났으니, 그룬발트는 기다릴 때가 왔다.
아무런 이변 없이 그저 힘 대 힘으로 싸운다면 전력에서 압도적 우위인 그룬발트가 질 리가 없다는 논리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서로 한 명씩 서로 맞찔러 죽는다면 훨씬 수가 적은 엘랑키아가 먼저 전멸할 것이다.
“좌측! 적 방어선 일부를 무너뜨리고 전진 중입니다!”
“흐음, 아마도 적의 우측은 호펜로이테 마을에 의지하기 위해 물러서려고 할 것이다. 절대로 재정비할 기회를 주어서는안 된다!”
“옛, 만프레트 경!”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 사선 배치로 인해, 가장 먼저 교전이 시작했던 부분부터 적을 밀어내고 있었으니까.
적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중앙군을 만들기 위해, 한쪽에는 기병을 집중하고, 한쪽에는 병력을 줄이는 극단적인 처방을 했다.
그리고 그 극단적 처방은 서서히 악수임이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이 팽팽함을 가장한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엘랑키아 군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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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신이시여, 제가 무슨 죄를 지었나이까···.”
그룬발트 군 우익 지휘관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은 중얼거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룩스터 연대가 너무 좌측으로 치우친 게 아닌가? 혹시라도 적이 쉽게 통과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면 안 된다!”
펠쿠트 백작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의 전면에는 10개를 조금 넘는 개수의 크고 작은 사각 밀집 대형이 부지런히 대열을 전환하고 있었다.
사방으로 고슴도치처럼 장창을 세우고, 그 보호를 받는 총병들의 총구가 역시 접근하는 적을 노리는 보병 연대의 전매특허 대기병 진형이다.
평소라면 장엄한 광경이었을 테고, 실로 든든한 광경이 아닐 리 없었으나···.
문제는 빌어먹게도 저 건너편에 도사리고 있는 엘랑키아 기병들의 존재였다.
전날, 오늘의 결전에 우익 지휘관을 맡게 되었을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게 봐도 첫 날 그의 싸움은 완패였고, 졸전이었으니까. 전방 지휘관 자리에서 경질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측익 지휘관으로서, 슈뵈켄을 공격하는 임무를 계속 맡았고 결전에서 일군을 맡게 되었다.
첫 날에는 무모했다. 쉽게 이길 수 있다 판단한 것이 가장 큰 문제이고, 전쟁관에서 붙여준 참모를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 다음 문제였다.
이제 같은 실수는 절대 하지 않는다. 오늘의 승리로 오명을 반납할 것이며, 당당한 승장의 반열에 올라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게 마치 한참 과거의 일로 느껴졌다.
그런데, 전장에 나서고 보니 그가 맞서야 할 상대는 다름아닌 엘랑키아 기사, 그것도 무려 8천 기에 달하는 엄청난 기병군이다.
2~3천 기만 되어도 쉽게 상대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힘든 싸움을 했던 게 지금까지의 상황 아니었던가.
그런데 무려 8천이다!
당연히 숫자로 따지면야 펠쿠트의 휘하 병력이 훨씬 많다. 하지만 보병과 기병이라는 차이, 그것도 엘랑키아 기병이라는 이름이 그 격차를 무색하게 만든다.
“포병! 포병은 무사히 전방 연대로 인계되었나?”
“옛, 아까 명령은 내렸습니다. 다시 확인해 볼까요?”
“그래주게! 엘랑키아 놈들이 접근하기 전에 완벽히 마무리해야 하네!”
“알겠습니다, 백작님.”
평소라면 든든하고 강력한 방어진으로 느껴져야 했을 사각 대형들이, 오늘따라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너무 불안해 하지 마시지요. 펠쿠트 백작님.”
“타를라 경, 나는··· 아니오. 귀관의 말이 맞겠지.”
타를라 니케 폰 자이트리츠, 펠쿠트를 보좌하는 전쟁관의 여성 전술가는 침착한 모습으로 말을 이어간다.
“현재 마주한 적이 전무후무한 엘랑키아 기병의 대군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오로지 중장기병만으로 이루어진 군도 아닐 뿐더러, 아군의 방비도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말은 지극히 옳은 일반론이다.
적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마주한 펠쿠트 백작의 방어선에 정면 돌격을 해온다면 그 대가는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단한 방벽을 쌓은 사각 대형을 무시하고 우회하거나, 그 틈을 통과해 온다고 한들 다음 열에 막히거나, 마지막 기병 예비대의 요격에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럼 여러 개의 사각 대형 사이에 끼어 난타당해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고.
“타를라 경, 귀관의 말은 분명 맞소. 하지만···.”
말을 하기 전에 잠시 망설인다. 일군을 책임진 지휘관으로서 과연 해도 되는 말일까. 자신과 타를라는 그만큼 격의 없는 관계일까.
그럼에도 도저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그럼 내 군대는, 병사들은 살아남을 수 있겠소? 내 고향에서 온 병사들, 제국 남동부의 청년들은 어떤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이오?”
“....”
타를라의 눈에 아주 잠깐이지만 당황하는 빛이 머문다.
펠쿠트가 지휘하는 우익군은 과연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다. 몇 번이나 생각해도 답은 그렇다.
분명, 장창과 총구가 기다리는 보병의 장벽으로 돌격해온 엘랑키아 기사들은 거기서 돈좌될 것이고, 부대는 흩어져 통일성과 충격력을 잃을 것이다.
하지만 엘랑키아 기사들은 호락호락하게 거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영민한 그녀이기에 알 수 있었다. 상황은 결코 그들에게 긍정적이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