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69화 (510/556)

47-4.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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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여기저기에서 달려온 전령들이 어지럽게 도착한다.

다섯 군데 이상의 전선에서 산발적으로 도착하는 전령들을 마주하고, 정보를 확인해 전장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자이트리츠 전쟁관 보조 참모들의 역할이다.

철저한 업무 분담 후, 미리 지시가 내려진 부분이라면 참모 선에서 해결한다.

그렇지 않은 부분이라면 상의 후, 더 윗선에 보고를 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그러는 와중, 총참모장인 만프레트 그로블 폰 자이트리츠는 전투 지휘에 몰두할 수 있는 여유를 얻는 것이다.

만프레트는 슬쩍 눈을 돌려 자신의 명목상 고용주이자 주군인 디오보르크 루프트 폰 제블링 공작을 바라본다.

총사령관답게 화려한 복장으로 꾸민 그는 말 위에서 애꿎은 가죽 장갑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초조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뭐, 차라리 잘 되었다. 전투 지휘는 만프레트에게 완전히 이관되었으니, 그대로 구경하고 있으면 된다.

그러면 만프레트가 제국 전역에서 집결한, 제국 최대의 대군을 이끌어 승리를 진상하게 되리라.

괜히 전황을 보는 눈이 있는 척, 이래라 저래라 끼어드는 사령관들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얼간이들의 말을 들어주느라 결정적인 승리를 놓친 게 몇 번이나 되던가.

그러고도 어떻게든 이기기는 이겼으니, ‘승리에 자신의 역할이 있다’면서 기고만장해 하는 꼴을 보는 건 솔직히 역겨운 일이었다.

어쨌거나 자이프리트 전쟁관의 참모들이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승리였으니, 이를 포기할 수는 없었지만.

“모든 전선, 북부의 두 마을은 물론이고, 남쪽의 브레세른에서도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룬하비크로 향하는 도로에서도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음, 알겠다.”

전투 개시 내용이 취합되자, 한명이 다가와 만프레트에게 보고한다.

사실 나머지 전장 따위, 지금 만프레트가 직접 지휘하는 북부의 주 전장을 제외하면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아군이 공격한다고 한들 마을을 함락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며, 역으로 조심해서 공격하는 한, 결정적인 반격을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부차적인 전선의 목적은 적의 신경을 분산시키고 병력의 집결을 막는 것 뿐이다.

결국 자웅을 겨루는 것은, 양측의 주력이 격돌하는 이 북부의 전장이 될 테니까.

만프레트는 쓸데 없는 생각을 멈추고 전진하는 아군을 바라본다.

쾅! 콰쾅! 퍼엉!

멀리서 포성과 총성이 연이어 들려오는 곳은 그가 이끄는 대군의 좌익 방향이다.

만프레트는 특별히 측익을 앞장서서 보냈던 것은 아니다. 병력이 우위에 있는 만큼, 굳이 전군의 일부만 교전을 시작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이렇게 된 것은, 엘랑키아 군이 극단적으로 우측만 앞으로 내세운 독특한 사선진 배치를 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개활지에서 마주본 회전에서, 양측은 수평한 배치를 하고 서로 마주보게 된다.

어느정도 돌출되거나 뒤로 물러선 선봉 혹은 측방 부대가 있을 수야 있지만 대략적으로 동일한 선에서 정리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유독, 이번 엘랑키아 군은 보병 중심으로 배치된 우익군을 마치 미끼라도 된다는 듯, 앞으로 내미는 듯한 전투 대형이다.

그리고 수가 가장 많은 중앙군은 그에 못미치게 더 후방으로 떨어져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엘랑키아의 좌측은 마치 전투에 당장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듯, 후방으로 병력을 깊게 빼놓고 있는 형국이다.

즉 수평으로 배치된 그룬발트 군에 대하여···.

엘랑키아 군은 거의 대각선에 가까운 기묘한 진형으로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엘랑키아 군을 총지휘하는 것은 다름아닌 국왕 다고베르2세이고, 그는 국왕이기에 앞서 유능한 전술가라는 사실은 누가나 알고 있었다.

그러니 현재 이 대형도 어떤 전술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대체 어떤 생각일까.

“그··· 만프레트 경. ‘저것’을 그냥 두어도 되는 것이오? 무, 물론 만프레트 경과 자이트리츠의 참모들이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불안해서 말이오.”

“진정하십시오, 디오보르크 공작님.”

불안함이 지나쳐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디오보르크 공작에게, 만프레트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하··· 하지만 저만한 엘랑키아 기사라니,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소이다! 우, 우리 군이 저걸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있는 거요?”

주군이 계속 우는 소리를 하자, 만프레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 또한, 전장을 대리하는 참모로서 해야 할 의무였다. 고용주이자 주군의 불안함을 풀어주는 것 말이다.

···물론 디오보르크 공작이 저리 두려워 하는 것도 영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만프레트 역시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약 8천 기로 추정되는 엘랑키아 기병군.

지금 야전에 나선 그룬발트 군이 마주보고 있는, 적 측면에 배치된 거대한 덩어리의 정체였다.

“무, 물론 나는 만프레트 경을 믿소! 믿지만···!”

“디오보르크 공작님, 물론 저들은 막강한 전력입니다. 그런 만큼 저들을 상대로 ‘이기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저걸 놔두면 아군이 대체···.”

“하지만 ‘지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뭐요?”

만프레트는 불안해하는 총사령관에게 차근차근 설명한다.

물론 엘랑키아 기사는 막강한 전력이다. 그걸 8천이나 모았으니 만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결국 기병은 기병, 전장에는 상성이라는 것이 있다.

기병은 압도적 기동성을 가지고, 엄청난 충격력 또한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잘 무장된 엘랑키아 기사라면 전투 지속능력도 결코 떨어지지 않겠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보병들이 어깨가 닿을 정도로 빽빽하게 밀집해서 창을 고슴도치처럼 사방으로 세운 사각 대형을 뚫는 것은 어렵다.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인 만큼, ‘절대’가 없다는 것은 안다.

특히 엘랑키아 기병들은 상성면에서 불리한 장창 밀집 대형 앞에서도 권총을 쏘며 약점을 찾다가, 기어코 병력을 밀어 붙여서 보병 연대를 깨 버리는 것으로 악명 높다.

하지만 이는 서로 병력이 비슷하거나, 수비측인 보병이 외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고립 무원인 특수한 경우에 발생하는 일이다.

현재 8천의 기병이 밀집한 엘랑키아 군의 좌익과 마주한 그룬발트 군의 우익은 보병과 기병을 합쳐서 2만을 훌쩍 넘는다.

연대 사각 대형을 하나 깨부순다고 해도, 그 뒤에는 또다른 밀집 대형이 굳건하게 버틸 것이며, 띄엄띄엄 배치된 각 연대는 이웃 연대가 공격당할 때 사격으로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연대 산하에 배치한 소수의 경야포들 또한 적에게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역할이 되리라.

그렇다고 아무리 보병이라지만, 수적으로 두 배가 넘는 보병 연대 전체를 일시에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상대는 기병이다. 선택과 집중, 그리고 충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텐데.

이걸 보병과 대치하듯 힘싸움에 들어가는 것 부터가 기병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아니, 그룬발트 군 입장에서는 이미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지.

“우익을 맡은 펠쿠트 백작의 군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 적이 펠쿠트 공작을 공격한다면, 기병군으로서 더 이상 활동이 어려울 정도의 타격을 입을 겁니다.”

“...그럴 수 있겠소?”

“펠쿠트 백작은 젊지만 유능한 지휘관입니다. 그 휘하에도 동남부 출신의 강병들이 많습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적이 다른 아군을 공격할 수도 있는 게 아니요? 중앙을 공격한다거나···.”

디오보르크 공작의 지적은 타당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런 극단적인 사선진을 취했다는 것 자체가, 마지막까지 전황을 지켜보다가 기병군을 투입하겠다는 이야기니까.

펠쿠트 백작의 우익군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 한다면, 이미 교전에 들어갔을 중앙군의 측면을 노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중앙군에도 예비대를 재편해 우측면을 방비하도록 했습니다. 혹시라도 엘랑키아 기사들이 공격하더라도 잠시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잠시? 잠시만 버텨서 되겠소?”

“엘랑키아 기사들을 일단 멈추는 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펠쿠트 백작의 병력이 그걸 덮칠 수 있을 겁니다. 기동성을 잃고 멈춘 기병을 보병으로 덮치는 건 필승 전술이기도 합니다.”

“오호··· 오··· 확실히 그렇겠군!”

비로소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총참모장이 이중삼중으로 안전장치를 만들어 두었다는 것을 느꼈는지, 디오보르크 공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안타깝게도 아까부터 잘근잘근 씹던 장갑은 이미 구멍이 뚫린 뒤였지만 말이다.

뭐, 이렇게 호언 장담을 하기는 했으나 만프레트 자신도 어려운 싸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 어려운 싸움이 지속될 수록, 엘랑키아 군은 점점 약해지고 그룬발트 군은 점점 유리해지게 되리라.

그 이유는 양측의 병력 구성 특징 때문이다.

이번 전장은 평소보다 폭이 좀 넓은 편이다.

이는 서로 투입된 병력이 굉장히 많다는 이유도 있지만, 호펜로이테와 슈뵈켄이라는 두 마을을 연결하는 공간을 가로지르듯 전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만프레트는 중앙과 좌우익의 삼군을 어느정도 균일하고 동등하게 전력을 배정했다.

총 숫자는 예비대가 포함된 중앙군이 훨씬 많기야 하겠지만, 보병과 기병, 그리고 포병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편성했다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각각의 군은 전체의 일부를 담당하면서도, 독자적으로 야전군으로서 행동할 수도 있음을 말했다.

따라서 만프레트가 다소 놓치는 부분이 있더라도, 모든 것을 갖춘 각 군이 즉각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빠지는 경우는 없으리라.

그에 비해서 엘랑키아 군은, 대부분의 기병을 측익에 몰아 배치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 극단적이었다.

중앙이 눈에 뜨이게 병력이 많다. 이건 이해할 수 있다. 마주하는 그룬발트 중앙군 역시 가장 수가 많고, 중앙이 무너지면 전투 지속이 불가능해지니까.

그리고 포병 역시 중앙에 상당수가 몰려있었다.

아마 가장 먼저 교전이 시작된 우익군은 최악의 경우 호펜로이테 마을을 기반으로 버틸 수 있다 생각하여 열악한 병력만 배치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이는 적절한 전술 배치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정도가 아닌 사도, 당장의 열세를 숨기고자 하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물론 전력이 부족한 이상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이는 장기적으로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꼴이 된다.

쉽게 무너지기 어려운 강력한 중앙군을 형성해, 전선의 핵심을 지키겠다는 의도 자체는 좋다.

하지만 좌측에 압도적인 기병을 집결시킨 대가로 나머지 군은 기병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한다.

저 기병이 마음대로 날뛴다면, 분명 그룬발트 군은 엄청나게 큰 위기에 처하겠지.

하지만 일단 저들을 힘으로 제압한다면? 제압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를 악물고 달라붙어서 붙들어 놓기만 한다면?

저 압도적인 기병군의 가치는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만다.

그렇게 극단적이고 비상식적인 배치가 부린 ‘마술의 시간’은 끝날 테고··· 균형이 무너진 엘랑키아 군의 중앙은 외로이 싸우다 최후를 맞이하게 되리라.

그것이, 만프레트가 자신감을 가지고 현재의 배치를 지속하는 이유였다.

“그것 참, 만프레트 경의 전술은 대단하오. 내가 군무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경처럼 싸우는 것은 처음 보았구려.”

“...전쟁관에서 배운 것입니다.”

디오보르크 공작의 말은 분명 칭찬이었다. 칭찬이었지만···.

만프레트는 어쩐지 가슴 한켠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이러한 전술을 전쟁관에서 배운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걸 가르쳤던 인물은··· 전쟁관의 강사가 아니었다.

그가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했던 비젤키르헨 선제후령의 장로, 세델레네 공이었다.

아마도 그렇게 되리라 믿었다. 전쟁관 역시 수십년 만에 나오는 세델레네 공의 직계 제자가 전쟁관 내부에서 나온다는 것을 기뻐해 전폭적으로 지지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 바람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라이벌이라 생각한 적도 없었던 다른 이가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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