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68화 (509/556)

47-3. 폴름스 전투, 셋째 날

###

“전투가 시작되었어요, 콘도티에레! 예정대로, 사선 형태 대형의 우측부터 교전이 시작되었다고 하네요!”

“그래, 고마워 첼레스티나.”

첼레스티나의 보고를 받았다. 다행히도 예정에서 크게 어긋나지는 않고 있었다.

지금 내 위치는 아우페브라즈의 사령부, 아침까지만 해도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가 머물던 곳이다.

왕실군의 참모와 근위병들이 빠져나가서 그런지, 사령부가 있었던 2층 건물이 유난히 넓게 느껴진다.

아침까지만 해도 십수 명이 둘러싸고 있었던 넓은 작전 테이블 근처에는 나와 첼레스티나, 그리고 정보 참모 서너명이 서 있을 뿐이다.

다고베르 2세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북부 전선에서 그룬발트 군과 결전을 벌이는 동안, 나는 그 외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하지만 말이 좋아 모든 권한이지··· 까놓고 말해서 뒤치다꺼리 담당이 된 것이다.

이제 결전을 위해 알짜배기 병력은 모두 뽑아간 한 줌 뿐인 예비대를 가지고 나머지 전선을 버텨야 한다.

물론 그 병력 배정은 나도 함께 논의해서 정한 것이니 큰 불만은 없다.

국왕이 직접 지휘하는 북부 전선, 양측의 주력군이 격돌하는 싸움의 중요도는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전술적 우선 순위로 보나, 아군이 세웠던 전략적 목표로 보나, 그 결과가 미칠 정치적 후폭풍으로 보나···.

이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면 끝이다.

가뜩이나 수적으로 불리하고 완전 격리는 아니더라도 반포위 상황을 자처한 와중이다. 여기서 주력군이 깨끗이 궤멸한다면 점령지고 방어 계획이고 아무 의미 없다.

그저 파멸일 뿐, 다른 지역의 주둔군은 끝까지 싸우다 죽을 게 아니라면 어느 방향으로 언제 후퇴할지나 정해야 할 테니까.

그래서 원래는 아우페브라즈에 남아 예비대 역할을 할 보병 연대 몇 개도 함께 보내고, 병력 일부를 남겨주려 했던 기병대도 모두 보내버렸다.

그만큼 중요한 싸움이라는 말이다.

덕분에 어제 밤 늦게까지 사령부에서 전술을 논의하고 미리 세울 수 있는 계획은 다 세워 두었다.

내 알량한 의견과 조언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엘랑키아 군은 결코 약한 군대가 아니며, 국왕을 비롯한 지휘관들도 무능한 인물이 절대 아니다.

하물며 현재 지휘관들은 엘랑키아 왕실군의 올스타라고도 할 수 있는 멤버들이 아닌가?

지난 10여년 간 대부분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그러면서도 방심하지 않고 다음 전쟁을 준비해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잘 해 내겠지···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다. 지원 요청이 오거나 현장에서 감당 못할 큰 사건이라도 보고되지 않는 한은 신경을 끄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가장 중요한’ 전선은 국왕 나으리께 양보했지만, 내가 어떻게든 틀어 막아야 하는 나머지 전선 또한 안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게 참 이율배반적인 것이, 남쪽의 브레세른과 아룬하비크에서 좀 밀리더라도 주력군이 후방을 위협당하면 안된다.

···라고는 하지만 그나마 요새화가 되어 있는 거점에서 막아야지, 거기가 뚫렸는데 간신히 수습한 병력으로 평야 지역에서 막을 수 있을리가 없다.

하물며 돌파에 성공하면서 기세까지 오른 적을 말이다.

게다가 내가 맡아야 할 곳은 그 두 마을 뿐만이 아니다.

폴름스를 둘러싼 포위망이며,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통신보급로인 파두자이트 또한 ‘덜 중요할’ 뿐이지 방치해도 되는 건 아니니까.

내가 머리속으로 얼마 안 되는 예비대의 운영을 저울질하고 있는 동안, 어딘가에서 오는 전령이 탄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브레세른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다른 전장에서도 전투가 시작된 모양이다.

###

“귀공, 전쟁관의 검은 늑대에 대해 알고 있나?”

“검은··· 늑대요? 죄송한데 잘은 모르겠습니다···.”

“허허허헛 이 사람, 그룬발트 제국에서 군문에 발을 들인 귀족으로서, 자이트리츠 전쟁관 최고의 전략가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제가 경험이 일천해서 말입니다. 백작님께서 가르침을 내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자네에게 조금 설명해 주겠네.”

엘랑키아 방어선의 남동쪽 모퉁이를 책임지는 마을, 브레세른을 공격하고 있는 그룬발트 군은 전투 첫 날에 비해 초라하다.

그도 그럴 것이, 엘랑키아 군이 사력을 다해 북부 전선의 결전 부대를 지원했듯 그룬발트 군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래 브레세른 공격을 책임지고 있던 브라우나인의 세두시온 공이 ‘전출’가는 바람에, 남은 병력 또한 반토막 난 것이 현재 상황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1만을 훌쩍 넘는 결코 적지 않은 병력이다. 그 병력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것은 두 사람의 그룬발트 귀족이었다.

먼저 주장을 맡은 것이 그로트 데르젠 폰 리고비츠 백작, 부장을 맡은 것이 알트브란트 비켈 폰 트롬자이트 후작이다.

백작이나 후작이나, 엘랑키아나 라솔이라면 대귀족의 반열에 오르는 높은 직위이다.

특히나 고위 귀족의 수가 적은 엘랑키아라면, 어지간한 약소국 수준의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영주일 가능성조차 있다.

하지만 원래부터 고위 귀족의 수가 많았고, 그 후에도 가문 분할이라는 제도에 의해 작위의 수가 계속 늘어온 그룬발트는 조금 다르다.

결국 현재 그룬발트에서는, 어지간히 높은 작위라고 할지라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영토는 손바닥만한 마을 하나에 불과하거나, 그마저도 없는 쭉정이 작위가 상당히 많았다.

다행히 그로트 백작이나 알트브란트 후작은 그 정도는 아니었으나, 평범한 중소 영주에 속하는 귀족들이었다.

때문에 그로트 백작이 이끌고 온 병력의 수는 2600명, 알트브란트 후작의 병력은 그보다 조금 적은 2300명으로 만 명 단위의 대군을 동원하기도 하는 대영주들에 비하면 초라한 수는 분명했다.

하지만 현재 브레세른을 공격하는 다른 그룬발트 영주들은 세력이 더 작은 고만고만한 귀족들이었기에, 원래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세두시온이 물러나자 지휘권을 물려 받게 되었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트 백작은 마르고 키가 큰 초로의 남자였으며, 반대로 알트브란트 후작은 키가 작고 통통한 체형을 가진 청년이었다.

“검은 늑대라는 이명을 가진 전략가의 이름은 만프레트 그로블 폰 자이트리츠! 지금 우리가 모시는 디오보르크 공작을 모시는 총참모장이오.”

“아아, 그랬군요. 그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른···.”

“그렇지, 귀공도 보았구만! 그 만프레트 경일세. 현재 그룬발트 전역에서 다섯 손가락, 아니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 전략가로 정평이 나 있지.”

“세 손가락이요? 그럼 나머지 둘은 누구입니까?”

“첫째는 명확하지, 바로 전장의 상사화, 비젤키르헨의 장로인 세델레네 공일세! 수백년 간, 우리 신성 그룬발트 제국이 얻은 군사적 성취에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해야겠지!”

“아, 세델레네 공은 저도 압니다.”

“그렇지, 모를 리가 없겠지 말일세.”

그로트 백작은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지만, 사실 알트브란트 후작은 다소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로트 백작이 그다지 훌륭한 이야기 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트브란트 후작 입장에서도 그럭저럭 궁금한 주제이긴 했고, 실제로 군을 이끄는 입장에서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왜인지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이야기 도중에 다른 분야로 흘러들어가며, 기이할 정도로 장황하게 말하곤 해서 금새 대화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 검은 늑대 만프레트 공이 바로 암월 검희의 직계 제자라는 말일세! 수백 년 만에 거둔 유일한 인간 제자라고 하지!”

“아니··· 아니 백작님, 잠시만요. 암월 검사? 그건 또 누구랍니까?”

“암월 검희! 세델레네 공을 말하는 게 아니라면 누구를 말하는 거겠나?”

“아니, 아까는 전장의 상사화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허헛, 수백년 간 수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략 전술은 물론, 검술 분야에서도 수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의 이명이 하나일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그게···.”

알트브란트는 뭔가 따지려다가 그냥 참기로 했다. 더 이상 대화가 장황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래서 아군을 지휘하는 만프레트 총참모장이 대단한 인물이라는 이야기시네요?”

“바로 그렇지. 분명 오후가 되기도 전에 북쪽에서 승전보가 올 게 분명하네. 만프레트 경과 디오보르크 공작이 엘랑키아 국왕의 목을 땄다는 소식 말이지.”

“허어··· 네, 그러면 좋겠네요.”

그로트 백작은 열성적인 디오보르크 공작의 추종자로 보였지만, 알트브란트 후작은 사실 특별히 줄을 서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훨씬 쟁쟁하고, 황금도 병력도 많이 가져다 바친 인간들이 수도 없이 줄 서 있는데 자신까지 차례도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에 영지 다운 영지는 거의 사라져버린, 이름뿐인 후작가의 주인으로서 지금 보유한 병력도 대부분 장인 어른이 챙겨준 ‘빌린’ 병력이었다.

그의 장인은 알트브란트가 폰 트롬자이트 후작가의 옛 명성을 되찾기를 원하며 빚을 내어 병력을 마련해 보내주었다.

모처럼의 기회라 생각하여 처음에는 나름 야심을 가지고 연합군에 참전했으나, 10만 대군 사이에서 자신의 병력은 한 줌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저 너무 큰 피해 없이, ‘승리하는 아군’에 업혀서 무난하게 승리자라는 성적표를 달고 고향으로 가고 싶을 뿐이었다.

지금쯤 고향에 있을 아내와 어린 아들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로트 백작은 말을 지루하게 하고, 자꾸 작위가 더 높은 자신에게 말이 짧아지고 있어서 신경쓰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박식해 보이기는 한다.

그러니 몇가지 궁금한 점을 물어본다.

“그런데 그로트 백작님, 그 검은 늑대 총참모장이 전쟁관 사람이라면, 우리 군에 파견온 저 쌍둥이 형제는 어떻습니까?”

“오호, 좋은 질문이군! 에올로스와 가레트 형제, 저 두 사람도 쟁쟁한 인물들이지. 전쟁관의 참모들 중, 서열이 7위나 8위 정도는 될 테니.”

“7위나 8위라··· 그럼 높은 겁니까?”

“이 사람,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그 전쟁관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실력자라는 말인데. 그래서 이 그로트 역시 지휘를 믿고 맡기고 있지 않나?”

사실 전체에서 7등이라거나,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실력자라거나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똑같이 생겼으나, 동생 쪽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두 형제는 부지런히 지휘를 하고 있었다.

···원래 그 역할을 해야 할 그로트 백작과 알트브란트 후작이 잡담이나 하고 있는 동안 말이다.

하지만 이는 전투 준비 단계에서부터 그들이 원한 것이었으며, 그로트도 알트브란트도 큰 불만은 없었기에 완전히 그들에게 전투를 맡기고 있었다.

아직 세두시온 공이 지휘를 맡았던 시절, 부대를 보좌했던 플로리안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형제는 빠른 속도로 부대를 장악해나갔다.

그로트와 알트브란트에게 지휘권을 위임받아 지금도 성실하게 지휘하고 있었고 말이다.

“저 형제는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아도 뜻이 통한다고 하더군.”

“무슨 그런··· 설마 기프트입니까?”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두 사람이 마치 한 사람처럼 지휘를 하고 있지 않던가!”

“네··· 뭐 저는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확실히 에올로스와 가레트 형제는 서로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유려하게 지휘를 하는 것은 신기해 보이기는 했다.

벼락치기로 전략전술을 공부하기는 했으나, 영 자신이 없었던 알트브란트로서는 자신 없던 일을 대신 해주는 이들이 나타나서 다행이다··· 정도의 생각이었지만.

“그러고보니 세두시온 공의 군대는 어디로 이동한 겁니까?”

“아··· 귀공은 듣지 못했는가?”

“예, 저는 전혀요.”

“아아, 부장인 귀공에게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군.”

‘주장인 자신에게만 알려졌다’라는 데서 만족감을 느끼기라도 한 모양이다.

뺨이 움푹 들어가 시체처럼 보이는 그로트 백작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고, 목소리가 사근사근해졌다.

“세두시온 공은 큰 계획을 노리고 있는 모양일세!”

“큰 계획이요?”

“그렇지. 놀라지 말게! 세두시온 공은 폴름스의 수비군과 연계하여 포위망을 돌파할 생각이네!”

물론 대체 무슨 상황인지 감이 잘 오지 않은 알트브란트 후작은 다행히 놀라지는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