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66화 (502/556)

47-1.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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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순간이 왔군.”

“그렇습니다, 폐하.”

아침 일찍 아우페브라즈의 사령부로 찾아간 내 얼굴을 보자마자,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가 한 말이다.

완벽하게 군장을 차려입고 측근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그는 약간 상기된 모습이었다.

즉위한 이래로 약 10년. 대부분의 시간을 전쟁, 그것도 대체로 이기는 전쟁으로 보내온 전쟁군주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지금까지 다고베르 2세와 대화하면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은 거의 없다.

물론 내가 무려 엘랑키아 국왕을 평가할 입장도 아니고, 오래 알아온 것도 아니며, 한 나라의 통치자 정도 되는 인간이 속내를 다 내보였다는 생각도 들지는 않는다.

그렇다 해도 전쟁을 앞두고 상당히 치밀한 인간이다··· 라는 인식은 받았어도 좋아서 전쟁을 한다는 인상은 거의 받지 못했다.

나름 성실하고 유쾌한, 지도자의 기품은 가졌어도 오만함은 드러내지 않는 왕이라는 느낌이었지.

뭐, 섬기는 대상으로서는 썩 나쁘지 않다고나 할까.

하지만 오늘 모습을 보면··· 거대한 전투를 앞두고 평소의 엄격한 자기 관리를 비집고 속마음이 나온다는 느낌이다.

만약 패배하기라도 한다면 정말 많은 것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

분명 이 전쟁의 승패가 끼치는 영향은 최소한 한 세대는 갈 거다. 장담할 수 있다.

어쩌면 대륙 중앙에 위치한 전통의 강국, 엘랑키아가 몰락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전쟁 하나 진다고 오랜 전통의 강국이 망하지야 않겠으나, 그게 몰락의 시작이 되어 다시는 전성기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나.

그런 상황에서 다고베르 2세가 내비친 속마음은 약간의 불안함, 그리고 그 불안함을 압도하는 흥분이었다.

좋아서 전쟁을 하는 말 그대로의 전쟁광은 아니지만··· 그 본질은 이랬단 말이지. 오히려 평소에 억누르고 있었던 게 대단하다 느껴진다.

어쨌든, ‘우리가 기다리던 순간’은 오고야 말았다.

“적은 거의 한 시간 전부터 병력을 전개하고 있네. 정찰병들의 보고를 취합해 보면, 어제는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던 부대들도 있는 모양이고.”

“대군은 전투 구역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요···.”

어제 밤 늦게까지도 적 후방에 증원 병력이 끊임 없이 도착하고 있던 것은 이미 확인 된 사항이다.

물론 대부분의 주력 부대는 이미 도착했을 테고, 일부 낙오된 후속 병력이나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후위대, 그리고 보급부대가 대부분인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이는 ‘어제 까지’의 일이고, 앞으로 또 얼만큼의 증원군이 도착할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

엘랑키아가 이번 원정에 전력을 다 한 것이 아니듯, 그룬발트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엘랑키아는 본토에서 떨어져 있어서 더 이상의 증원은 기대할수 없다는 것이고.

“여기 지도를 봐 주게. 전투 계획을 이야기하지.”

탁자에는 폴름스와 그 주변 마을들, 그리고 엘랑키아 군이 도착한 후 건설한 각종 거점들이 표시된 지도가 놓여 있었다.

아마 이번 원정을 시작한 후로 수십 번은 보았던 지도일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도에 그려져 있는 ‘배경’이 아니라, 거기서 활동할 병력들이겠지. 나는 다고베르 2세의 설명에 집중한다.

“결전의 장소는 여기 아우페브라즈와 북쪽 슈뵈켄 사이의 어디인가가 되겠지. 역시 에트 경의 말대로 였소. 어째서 그렇게 예상했나?”

“지형과 아군의 배치를 보았을 때, 저라면 그렇게 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당장 브레세른 호수까지 있는 남쪽보다는, 북쪽이 좀 더 평탄해 대군이 기동하기 좋았다.

물론 핵심 거점인 아우페브라즈 까지의 거리가 더 가까운 것은 물론이고.

때문에 가장 중요한 장소, 그리고 많은 피가 흐를 장소는 슈뵈켄과 아우페브라즈를 연결하는 도로가 될 것이라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핫, 적에게도 에트 경 정도의 인물이 있다 가정하고 싸워야 한다는 것인가?”

“더 뛰어난 인물이 있다 가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핫!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자신이 없어지는군.”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다고베르 2세는 평소의 유쾌함을 되찾은 것 같았다.

국왕의 손이 슈뵈켄과 호펜로이테 사이에 적군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놓더니, 이를 아우페브라즈 방향으로 이동시킨다.

“적은 전처럼 외곽을 지키는 마을 요새들을 공격하는 대신, 개활지를 통해 돌파하려는 모양이오. 당연히 그럴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고.”

예상은 했지만, 마을을 두고 옥신각신하는 중소규모 전투가 며칠 정도는 더 지속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아무리 전력이 우세하다고 해도, 개활지에서 서로 마주보고 한나절만에 승패를 가르는 회전은 필경에는 도박수이다.

승승장구하던 대군조차도, 아주 작은 틈을 놓치지 않은 적의 반격에 붕괴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런 만큼, 두 배라는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 있다면 도박에 가까운 회전 대신, 차근차근 거점을 함락해 상대를 몰아 붙이는 지구전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생각했고.

하물며 그룬발트 군 사이에는 엘랑키아 기병에 대한 공포감이 만연해 있었다.

사람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불리한 상황을 목도하기를 피하게 마련이므로 적을 회전으로 불러내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룬발트 수뇌부는 과감한 인물이 지휘하는 모양이다.

적 총사령관으로 알려진 디오보르크 공작은 비교적 최근에 선제후들에게 지지를 받기 시작한 신흥 귀족이라고 하는데, 그의 판단일까?

엘랑키아 왕실에서 수집한 정보로는, 디오보르크 공작의 군사 커리어에 대한 내용이 부족해 확실히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어쨌든··· 요새화 된 마을을 공격하느라 심신이 소모된 그룬발트 군을 결전에서 끝장낸다··· 라는 초기의 계획은 약간 어긋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은 우리가 바라던 상황은 분명하다.

양 측면이 굳건한 요새화 마을로 지켜져 전장의 너비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크다.

전장이 제한되는 만큼 적은 대군의 강점을 살리기 어려워진다.

심지어 마을에 설치된 포대 사거리까지 고려하면, 아군은 마을에 안심하고 접근할 수 있으나 적군은 그렇지 않으므로 더더욱 기동이 제한 될 것이다.

뭐 물리적으로 막혀있는 것은 아니니, 결정적인 순간에는 적도 약간의 견제를 감수하고 움직이겠지만.

그래도 ‘안전하지 않은 기동로’라는 심리적 제약은 때로는 실제로 막혀있는 돌벽 보다도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법이지.

말하자면, 이 전장에서 그룬발트 군은 함정에 빠진 둔중한 거인이다.

좁은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사냥꾼’들이 집어 던지는 그물을 찢어버리기 위해 몸을 비트는.

하지만 그럼에도 거인이다.

어설픈 공격으로는 숨통을 끊을 수 없으며, 실수로라도 붙잡히면 사냥꾼을 찢어 죽일 수 있는 무서운 손아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적이 아우페브라즈에 다가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지. 아군은 적을 영격할 것이오. 그것도 전력을 다해서.”

“예, 폐하.”

“좌측은 아르밀 공작이 슈뵈켄 수비군과 함께 담당할 것이고, 우측은 물론 호펜로이테 수비를 맡은 프레니히 백작이 담당할 것이오. 두 사람은 마을의 방어와 함께 측익 지휘관을 동시에 수행할 것이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두 분은 잘 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엘랑키아 군의 두 기둥, 왕국 전역에 딱 두 명이 있는 왕실군 원수들이 각각 좌익과 우익을 담당한다.

그리고 중앙은 당연히···.

“짐이 친위군을 이끌고 직접 중앙에 나설 것이오. 오늘을 위해 예비대 소집령을 내렸고 말이오.”

다시 한 번, 다고베르 2세의 태도에서 전투를 향한 흥분이 드러난다.

수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두 나라 사이의 결전, 반드시 자기 손으로 승리로 이끌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그러니 에트 경이 맡은 임무도 막중하오. 남은 예비 전력을 통솔해 주시오. 전장 전체를 시야에 둘 수 있는 인물은, 지금은 에트 경 밖에 없으니까.”

“견마지로를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고베르 2세는 오늘 아침부터 예비 전력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심지어 폴름스 도시를 둘러싼 포위군에서도 일부 병력을 끌어왔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강 대 강의 싸움인 만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 병력을 최대한 차출하고 남은 나머지··· 가 내가 커버해야 할 영역이라는 것이지.

남쪽, 아룬하비크와 브레세른이 전장 반대편이라고 적이 그냥 내버려둘 리는 없었다.

오히려 여기를 공격해서 아군의 신경을 분산시키는 게 두 배나 되는 병력을 활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

“에트 경에게는 어려운 임무를 맡기게 되는군. 하지만 짐은 이 북부 전선이 주된 전장이라 생각하오.”

“폐하께서 집중하실 수 있도록, 다른 곳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내 말이 바라던 대답인지, 국왕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거기서 어쩐지 ‘나는 전력으로 이 일을 하고 싶다. 나머지 귀찮은 일은 네가 해 달라’ 라는 느낌도 받는다. ···설마 착각이겠다 싶지만.

아니, 왠지 다고베르 2세는 이 역사적인 결전이 하고 싶어서, 10년 넘게 상식적인 군주인 척을 하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라는 망상이 갑자기 떠오른다.

“물론 짐의 능력이 모자라 북부 전선에 문제가 생긴다면 적절히 지원 해 줄 것도 믿고 있소.”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병력을 좀 넉넉히 챙겨 주고 할 부탁일 텐데, 뻔뻔한 국왕이라 생각해도 좋소.”

그래도 진심으로 미안하긴 한 모양이다.

이제 나는 구두쇠 가주를 섬기는 집사처럼, 얼마 남지 않은 예비 전력을 박박 긁어 모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임무가 생겼다.

당장은 후방에 있지만, 사방 천지로 불려다니며 소방수 역할을 해야 할 생뢰르반 파견대 소속의 부하들에게 벌써부터 미안한 마음이 든다···.

“폐하, 그럼 저는 예비 전력 챙기고 남부 전선을 점검하기 위해 가 보겠습니다.”

“그러시오, 에트 경. 나도 배치 중인 병사들을 만나러 가 봐야겠군.”

“무운을 빌겠습니다, 폐하.”

“귀경 또한 건승할 수 있기를 바라오.”

우리는 마지막으로 진심어린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이건 진심이 아닐 수가 없지.

이미 배치 계획은 정해졌다. 사실 진작부터 정해져 있기는 했다.

하지만 다고베르 2세는 병사들에게 무척 인기가 많은 군주이며, 그 자신도 병사들을 사랑하는 군주임은 분명했다.

오늘은 이 ‘자신의 군대를 사랑하면서도 사랑받는 엘랑키아 국왕’이 마음껏 날뛸 수 있도록 후방을 관리하는 것이 임무겠구나.

머리속으로 보유한 전력을 생각해본다.

···정말 병력을 박박 긁어모으다시피한 상황이다.

특히 기병의 경우는, 북부나 북서부 출신 기병대는 거의 다 국왕 직할군에 내줘야 했다.

필연적으로 열세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일까. 다고베르 2세는 직할군에 압도적인 숫자의 기병군을 보유하는 데 집착했다.

아마 대륙 최강의 기병대라고 해도 반박하는 이가 많지는 않을 왕실 친위군을 중심으로 집결시킨 기병군의 숫자는 거의 9천 명에 달한다고 알고 있다.

음··· 상상해보니 그룬발트 군이 엘랑키아 기사 노이로제에 걸리는 것도 이해가 간다.

전부가 중기병은 아니겠지만 9천 기가 일시에 돌진해 온다 생각하니···.

아군이라서 다행이야 정말.

정말로, 샹다메리 전투 당시에도 왕실군과의 싸움이 아니라서 다행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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