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9. 폴름스 전투, 첫째 날
“브라우나인 선제후령은 디오보르크 공작의 중요한 지지 가문이다. 세두시온 공은 그 중요 인물이니 함부로 대할 수는 없지.”
만프레트가 일반론을 말한다. 다른 전쟁관의 참모들 역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자이트리츠 전쟁관 출신은 단순한 전투 전문가를 파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눈 앞에 직면한 전투를 이기는 데에 집착하지 않는다.
설령 전투에서 이긴다고 한들, 이것이 고용주의 장기적 이익으로 전환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이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또는 군사적이든.
만약 브라우나인의 후게자인 세두시온을 홀대하여 지지를 거두기라도 한다면, 디오보르크 공작은 전쟁 결과와 무관하게 황제가 될 기회를 잃어버릴 것이다.
이는 디오보르크 공작은 물론, 그를 지지하는 엘프 선제후 가문들 입장에서도 크나큰 손해가 되리라.
“세두시온 공에게는 유격군으로서, 서쪽의 아룬하비크 마을을 공격하는 임무를 부여하도록 한다.”
브레세른을 공격하는 일군의 지휘관이라는 입장에 비해서 다서 격이 떨어지는 역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양새로 보면 독자적인 작전권을 가지는 만큼 자율성이 올라가는 역할이며, 전날의 패배를 책임지고 경질 당하는 대신 오명을 반납할 좋은 기회라고 볼 여지도 있었다.
그룬발트 제국 총사령부 입장에서도, 이미 숫자가 많이 줄기는 했어도 여전히 대군을 보유한 브라우나인 선제후령의 군대를 활용할 수 있다.
주 전선은 아니라지만, 1만 이상의 유격군이 후방인 아룬하비크를 공격하게 되는 것이다.
엘랑키아 군으로서도 합당한 병력을 파견해 지켜야만 한다.
그만한 병력을 묶어둘 수 있다는 것은 훌륭한 조공의 역할이다. 가뜩이나 병력이 부족한 엘랑키아 군은 부족한 예비 병력을 또 쪼개야만 하겠지.
“정찰을 통한 추측으로는, 아룬하비크는 엘랑키아 군의 예비대가 주둔하는 후방 기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세두시온 공의 병력이 이를 압박한다면, 적 예비대가 제때 활용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는 플로리안이 조리있게 설명한다.
그는 지난 전투에서 브레세른을 공격하는 세두시온을 보좌했었으나, 좌익이 지리멸렬한 졸전 끝에 자멸한 것을 막지 못한 것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 플로리안 경은 계속 브라우나인의 유격군을 보좌할 생각인가?”
“예, 만프레트 경. 제 책임도 크고, 저만 다른 임무를 맡는다면 세두시온 공이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니까요.”
“자네가 괜찮다면, 알았네.”
“게다가 브라우나인 군은 여전히 1만을 훌쩍 넘는 강군입니다. 유효하게 활용할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도 그렇지. 자네에게 맡기겠다.”
이번에 파견온 전쟁관의 인재들 중, 플로리안은 서열 2위 참모이다.
1위인 만프레트는 당연히 디오보르크를 보좌할 테니, 플로리안이 세두시온을 보좌한다는 것은 그를 존중한다는 명백한 증거가 될 것이다.
전군의 인사 참모 역할도 겸임하고 있는 플로리안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리석은 지휘관을 보좌하는 일이 걱정되어서는 아니다. 오히려 이는 기본 중의 기본으로,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인사 참모로서 지휘관 하나 임명하는 데도, 직책과 계급, 이끌고 있는 세력까지 파악해야 하는 현실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가문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으며, 지지하는 세력은 어느 정도이며, 직속으로 이끌고 있는 병력은 어느 정도인지 등등.
이렇다 보니 오히려 지휘관으로서의 유능함은 뒷전이 된다.
물론 전술적 능력은 자이트리츠의 참모들이 보좌하면 된다 생각하는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제 브레세른을 공격하기 위한 지휘관을 임명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세두시온의 경우, 가문의 명성이나 본인의 위치나 이끌고 있는 병력이나 압도적인 편이라 오히려 임명이 쉬웠었고.
“세두시온 공이 물러난 후, 브레세른 공격군의 후속 지휘관은 휘하 중견 장교들 중 적합한 인물을 임명하도록 하겠네.”
“그럼 그 보좌 참모로는 에올로스, 가레트 형제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플로리안의 후임자 추천에, 만프레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막중한 임무를 맡겨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희 형제는 승리를 위해 모든 역할을 다 하겠습니다.”
에올로스 베르젠 폰 자이트리츠가 자신을 추천해준 것에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그 동생, 가레트 토브루 폰 자이트리츠 역시 고개를 숙인다.
에올로스와 가레트, 같은 날 태어난 형제인 두 사람은 절반은 닮았고, 절반은 전혀 닮지 않았다.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 짙은 파란색 눈, 그리고 그룬발트 북부 특유의 창백함이 감도는 피부는 빼다 박은 듯 똑같다.
만약 두 사람을 나란히 세워 놓고 오른편에서 본다면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왼편에서 보면 두 사람이 형제라는 것을 인지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동생인 가레트의 좌반신에 남은 기형의 흔적 때문이었다.
왼쪽 눈 아래에서 시작되는 변형은 짙은 회색에 마치 고목의 표면처럼 갈라지고 주름 잡힌 피부이다.
목을 타고 내려간 왼쪽 어깨는 앞으로 심하게 굽어 기괴하게 왜소했고, 왼팔의 길이는 오른팔보다 거의 절반 길이밖에 되지 않는다.
어찌하여 하늘이 한날 한시에 태어난 형제 중 한 명에게만 이런 저주를 내렸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전쟁관의 교육과 시련을 통과해 폰 자이트리츠의 이름을 허락받은 정규 참모들이다.
그 자리의 어느 누구도 이 형제가 중요한 전선의 보좌로 임명된 것에 반대하지 않는 것만 보아도 그들의 평판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시급했던 전선 하나의 인선 문제가 마무리되었다.
“아마 여러분은 내가 어째서 오늘 전투를 금하고, 무엇보다 바쁠 여러분을 이 자리에 소집했나를 궁금하게 생각하겠지.”
만프레트는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허나 이는 모두가 궁금해하던 일이 맞는 듯, 경청하기 시작한다.
“원래라면 폴름스 주변에 집결한 이후, 충분한 공격 준비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그 이유야 물론, 공격 개시일을 호기롭게 결정해버린 디오보르크 공작의 무모함 때문이다.
10만 대군이 집결한, 숙적 엘랑키아 왕국과의 결전이다. 군사적은 물론 정치적인 중요성도 얼마나 큰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최소한 사흘, 길면 일주일 이상 준비에 투자해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덕분에 이 자리의 참모들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업무의 폭탄에 며칠씩 철야를 해야만 했고.
지금 생각해도 만프레트는 아쉬웠다.
제국 전역에서 집결한 각양각색의 영주군과 용병대를 재편하고 하나의 군단으로 정련하지 못했다.
디오보르크 공작 휘하에 집결한 인물들의 능력과 그릇을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임명하지 못했다.
적국 한 가운데 쳐들어와서는, 의뭉스럽게도 수비를 자처하는 엘랑키아 군의 의도를 파악하고 공격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그러기는 커녕, 당사자들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병력 규모를 행군 중에 파악해야 했으며, 행군 순서도 바꾸지 못하는 악조건 속에 도착하는 순서대로 배치해 공격 계획을 수립해야 했다.
만프레트 이하 모든 폰 자이트리츠 참모들이 죽을 고생을 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기는 어려웠다.
그 결과가 어제의 졸전이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이 여러분을 모은 이유이고, 오늘이라는 하루가 이토록 소중한 시간인 까닭이다. 우리가 실무에서 벗어난 지금이 시간 낭비라 생각하지 말고 확실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다.”
“공격은 내일 오전에 재개합니까?”
“물론. 디오보르크 공작의 권위와 재편성이라는 이유를 가져다 대어도 시간을 더 쓸 수는 없다. 이는 우리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신뢰도 달린 일이니까.”
“...다른 선택지가 없겠군요. 알겠습니다, 만프레트 경.”
어떤 일을 하는 데에 시간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완성에 신경쓰느라 시간을 너무 낭비했다가는, ‘시간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아니야?’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다.
불합리하지만, 결국 전쟁관 참모들이 얻는 기회는 이런 명성과 권위에 기대었기에 주어진 것이다.
스스로를 증명하는 데 주저한다면, 참을성 없는 귀족들은 금방 이 기회를 회수해 갈 것이다.
“그러고보니 타를라는? 슈뵈켄 전선 쪽은 별 일 없었어?”
플로리안의 물음에,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이 앉아만 있던 타를라 니케 폰 자이트리츠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북쪽에서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을 보좌해 첫날의 전투를 보냈다.
초전에서 우세를 오판한 펠쿠트 백작은 과감한 공세를 선택했고, 엘랑키아의 기습적인 반격에 전열이 붕괴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궤멸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래도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타를라가 보낸 적시 원군 덕이었다.
“...펠쿠트 백작님은 훌륭한 분입니다. 분명 좋은 사령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오오 그래? 성격이 급한 분으로 보였다만···.”
조용한 타를라의 대답에, 플로리안은 조금 놀란 것 같았다.
현재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고위 지휘관들 중 가장 어린 펠쿠트 백작의 보좌를 그녀게 맡은 것에 대해 걱정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그간의 군사 경력이 어떤지는 확실히 알지 못해도, 그가 무모하고 오만한 성격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분명 그런 점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투 이후 솔직하게 본인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셨습니다. 다음 전투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거··· 정말 의외인데. 그런 자질이라면 앞으로 훌륭한 지휘관으로 성장할 수 있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플로리안 경.”
자신의 단점을 알고 실수를 인정한다는 것은 사람이 성장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자질이다.
보통은 자존심 때문에 그러기가 쉽지 않다. 특히나 오만함에서 권위가 나온다 착각하는 귀족들이라면 더더욱.
설령 수염을 걱정하다 목이 잘리는 상황이 오더라도 이를 감수하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말이다.
그러고보니, 가장 젊고 자신만만해 보이는 펠쿠트 백작에게 서열 3위, 타를라를 보좌로 보낸 것은 만프레트의 판단이었다.
플로리안 본인은 여기에 대해서 걱정했었지만··· 만프레트의 판단을 신뢰하지 못한 자신의 ‘오만’이었던 모양이다.
이렇게까지 됐다면 믿는 수밖에.
그렇게 세세한 전선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오늘의 본론, 내일 있을 총공격의 작전 계획이 도마 위에 오른다.
“기본적인 구도는 적이 차지한 각 마을에 하나의 야전군이 대치하는 어제와 유사하다. 물론 이번에는 아룬하비크에 대한 공격도 더해지겠지만.”
만프레트가 언급하자, 플로리안이 지도 위에 작은 조형물을 놓아 아군과 적군의 배치를 표현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협의가 된 작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격의 개념을 바꾼다. 엘랑키아가 마을을 요새화하고 기다린다고, 아군이 거기에 맞춰서 공격해야 할 의리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런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졸렬한 작전이 수립된 것은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작전을 세울 시간도 그렇지만, 병력을 편성하고 배치할 시간이 특히 말이다.
대신 만프레트는 큼직한 조형물을 직접 집어, 슈뵈켄과 호펜로이테를 연결하는 선 위에 놓는다.
“이게, 디오보르크 공작의 본진이 된다.”
이미 이야기를 들은 플로리안은 평온하지만, 나머지 참모들이 술렁거린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혁신적인 전술 구상이었다.
그리고 디오보르크 공작이 직접 전장에 나선다는 것은, 그의 권위를 이용해 총참모장 만프레트가 직접 전장에 나선다는 말이기도 했다!
듣고있던 타를라가 질문한다.
“만프레트 경, 그럼 슈뵈켄을 공격하는 저희 군은 만프레트 경 휘하에 합류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다. 슈뵈켄과 호펜로이테에 대한 공세는 유지한다. 하지만 어제와 달리, 두 전선을 연결하는 하나의 거대한 전선 개념을 새롭게 만들어 낸다.”
그의 손이 지도에 선을 주욱 그었다.
통상적인 전장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다소 멀다 생각할 수 있는 거리지만,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아니, 엘랑키아의 구상에 휘말려 마을이라는 거점에 집착해 옥신각신하고 있었을 뿐, 이만한 병력을 이끌고 중앙을 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 거대한 중앙군에게는 호펜로이테가 좌측, 슈뵈켄이 우측이 된다. 각 마을을 공격하는 병력 중 일부를 차출해 중앙을 보강한다.”
“그렇다면··· 중앙군의 총 병력은 얼마나 됩니까?”
“예비대를 포함하여 최대 6만을 예상하고 있네.”
그 순간, 전쟁관 참모들의 머리속에는 다섯 개의 마을이라는 방어 거점에 집착하다 묶여버린 엘랑키아 군을 6만 대군이라는 망치가 내려치는 모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