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8. 폴름스 전투, 첫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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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 각하께 경례!”
800여 명의 보병들이 얼굴 앞에 무기를 수직으로 세워 예의를 표한다.
유난히 긴장하고 각 잡힌 모습은 최근에는 보지 못한 모습이다. 애초에 그렇게 훈련을 안 시키기도 하고.
“모두 편하게 대기하게.”
나는 다소 놀랍고 흥미로운 마음에 말에서 내려 병사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긴장한 표정으로 대열을 이루어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병사들은 대부분이 어린 청년들이다. 아니, 말이 청년이지 태반이 스무 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다.
통상 대부분의 국가에서 성인 기준이 15살 혹은 16살이니··· 어린 나이부터 용병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적진 않지만 대부분 그런 부대라니.
다행히 부대를 이끌고 있는 장교와 부사관들은 경험이 꽤 많아 보이는 나이대가 많아 보인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어려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귀관의 이름은? 몇 살인가?”
“에, 에르문드 호르덴입니다! 열아홉 살입니다!”
“열아홉이라고? 실전 경험은 있나?”
“용병으로 두 차례, 주디칼리에서 복무했습니다!”
유난히 어려보이는 전열 부사관이 있어 말을 걸어보니 생각보다 나이가 많았다. 나이를 속이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전열 부사관은 하나의 오를 책임지며, 대열의 정면이나 측면에서 진형을 유지하는 역할이다.
실전에서 부하들을 이끌고 맨 앞에서 총탄을 몸으로 받아내고 적과 맞서는 역할이란 말이다.
그만큼 위험하고 존중받는 역할이니, 보기보다 경험도 있고 강단 있는 숙련병이리라.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싶었다.
“에르문드 호르덴이 근무했던 용병 중대는 주디칼리 중부의 도시 타푸나에 고용되어 수비 임무를 수행했었습니다.”
옆에서 침착하게 이 어린 부사관에 대해 설명하는 사람은 이 보병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인 중대장 울리히 헨텔이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정돈한 울리히는 현재 트랑카벨 가문에서 복무하고 있는 지빌링엔 연대장, 에르만 슈피리의 먼 친척이라는 모양이다.
“그렇군. 무기를 보여줄 수 있겠나?”
“옛, 콘도티에레!”
젊은 부사관 에르문드는 들고 있던 무기, 화승총을 내밀어 나에게 보여준다.
총신이 약간 짧고 구식의 격발 장치를 가진 이 총은 보이는대로 약간 오래된 물건은 분명하다.
하지만 부지런하게 관리했는지 녹슨 흔적 하나 없이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나는 무기를 돌려주며 묻는다.
“손질이 잘 되어 있군. 언제부터 쓰던 물건인가?”
“2년 전 입니다, 콘도티에레! 형님이 새 총을 구입하고 물려준 물건입니다!”
“형님이? 형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샹다메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아··· 그렇군.”
갑자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울컥하고 뭔가가 올라온다.
그렇지, 용병들에게는 흔한 일이지. 가족 사이에서 직업을 공유하고 물려주는 경우가 흔한 시대에는 더더욱.
딱히 물려줄 자본도 기술도 없는 평범한 용병의 가족들은, 종종 외지의 전쟁터에 나선 누군가가 피땀 흘려 벌어왔던 금화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금화가 가족에게 주었던 풍족함과 따뜻함도 말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용병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때가 있긴 하지만 운만 따라준다면 제법 고수입 직종이다.
그러니까, 대를 이어 용병이란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이 업계에는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용병이라는 직업군으로서의 사고방식일 뿐이고···.
인간으로서는 아무래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형은 지빌링엔 연대에서 복무하다가, 트랑카벨 가문을 위해 싸우다 전몰. 그리고 그 동생이 다시 지빌링엔 연대의 결석을 채우기 위해 지원했다.
그리고 둘 다 내가 지휘하는 부대에 복무한다. 그들이 목숨을 잃는 데에 내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
“트랑카벨 가문에서 복무하는 것은, 지금 지빌링엔의 청년들에게는 선망할 만한 일입니다. 여기 에르문드 역시, 힘든 선발 시험을 거쳐 입대할 수 있었습니다.”
“아··· 그랬군. 축하하네, 에르문드 군.”
“감사합니다, 콘도티에레! 열심히 하겠습니다!”
에르문드는 자신의 총을 돌려받으며 힘차게 대답한다.
“그리고 저 또한, 콘도티에레의 휘하에서 근무할 수 있어 영광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모두, 같은 마음입니다.”
울리히의 말투에서는 진심이 느껴진다.
그는 80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나를 찾아왔다.
계약이야 트랑카벨 가문과 했다지만, 엘랑키아 남부의 블랑독으로 향하는 대신 그룬발트를 가로질러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배나 되는 그룬발트 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임을 모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대대로 산악지대에서 살아온 가난한 민족인 지빌링엔은 예로부터 대륙 전역으로 떠나 용병업으로 돈을 벌어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나이가 들거나, 부상을 입어 은퇴한 용병들은 고향으로 가서 다음 세대의 용병들을 교육한다고 한다.
그러니, 이들을 육성한 용병들 중에는 샹다메리나 생뢰르반에 참전하고, 부상을 입어 은퇴한 부상자들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용병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트랑카벨 가문은 훌륭한 고용주이다.
평균 임금이 적은 편도 아니며, 지급이 밀리거나 나중에 가서 딴 소리를 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사망이나 큰 부상으로 인해 더 이상 복무가 불가능한 경우에는 약간의 보상금도 있었다.
이전 세계,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야 큰 의미 없는 수준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애초에 그런 복지 자체를 제공하는 고용주 자체가 이 세계에는 없다.
오죽하면 임금을 6개월이나 1년 단위로 지급해가며 사망시 떼어먹는 계약이 정말 많다!
이런 경우 체불되면 진짜 몇 년씩 못 받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고··· 그러다 고용주가 죽거나 망해버리기라도 하면 몇 년 시간만 날리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 트랑카벨 가문에 고용되어 일한다는 것은 용병으로서는 축하할 만한 내용은 분명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게 좋겠지만.
그래도 이런 저런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울리히 경의 지빌링엔 부대··· 임시로 지빌링엔 반 연대라고 하지. 아무튼 울리히 경과 휘하 병력은 남쪽으로 이동해 아룬하비크에 주둔하게 될 걸세.”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아룬하비크는 어제는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지만, 내일도 그럴지는 알 수 없네. 후방이지만 반드시 지켜야 하는 위치니 십중팔구 적이 공격하려 하겠지.”
“목숨을 걸고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울리히의 말에 나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리타르몽 드 당세르 참모가 안내를 해줄 테니, 앞으로 지시에 따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리타르몽 경.”
“필요하신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참모 리타르몽과 울리히가 악수를 나눈다.
그나저나 리타르몽 키가 정말 크구나. 원래 거미같은 체형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울리히도 키가 꽤 큰 편인데도 차이가 많이 난다.
지빌링엔 연대가 그 동안 트랑카벨 가문의 전쟁들에서 했던 활약들이 생각난다. 그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가 남쪽으로부터 이끌고 온, 트랑카벨 가문 소속이거나 생뢰르반 파견군 소속인 병력들은 대부분 아룬하비크에 집결해 있었다.
아룬하비크 방어 책임을 맡았기 때문도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예비 전력이 필요할 때는 익숙한 병력을 활용하고 싶다는 욕심도 없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는 ‘안전한 후방’이기에 배치한 것이 절대 아니다.
실제로도··· 점점 전투가 격화될 수록 안전한 후방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이번에 추가로 도착한 병력은, 정말 빠듯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아군의 방어 전술에 숨통이 트이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국왕의 처소를 호위하는 직속 근위병 소수를 제외하면, 보병 예비대가 전혀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국왕 직할의 기병 대군이 강력한 충격 병력으로서 든든하게 대기하고는 있지만, 이들은 말 그대로 결정적인 순간을 위한 결전 부대에 가깝고.
적절한 타이밍에 중대급이나 연대급 소방수로 활약해 줄 수 있는 부대들이 늘어나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나저나··· 오늘 그룬발트 군은 왜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이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불안한데.
병력 배속과 다른 잡일들이 마무리되고 나면 아우페브라즈의 사령부에 들러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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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그룬발트 군의 총사령관인 디오보르크 공작의 사령부에서는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참모들이 회합을 가지고 있었다.
보조 참모들을 포함하면 20명이 훌쩍 넘었으나, 권한과 직위를 가진 정규 참모들만의 모임이다.
모두 일곱 명의 정규 참모들은 현재 그룬발트 대군의 다양한 곳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어느새 그들 없이는 부대가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목적으로, 말 그대로 평생을 훈련받아온 인물들이니까.
전쟁이 거대한 기계이고 그 연료가 군인들의 목숨이라면, 전쟁관의 참모들은 이를 움직이는 윤활유라고도 하겠다.
그런 이들인 만큼, 한 자리에 집합했다는 것은 큰 일이었다. 단순히 친목을 위한 정례 모임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방금 책임자이자 총참모장인 만프레트 그로블 폰 자이트리츠를 포함하여, 각자가 짧게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진행 상황을 공유했다.
하지만 업무 상황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그들이 함께하고 있는 ‘인간’들에 대한 보고였다.
지금 발언하고 있는 인물은 남쪽의 브레세른 공격을 맡은 전선을 보좌하고 있는 인사 참모, 플로리안 도프 폰 자이트리츠였다.
“...어제 공격 이후 세두시온 공은··· 다소 불안한 상황입니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고 할까요?
“정신적으로 말인가요?”
“예. 최근, 폴름스에 도착하기 전에 벌어진 전초전에서 중요한 측근이 눈 앞에서 살해 당한 모양입니다. 의지하던 스승이었던 모양이고요.”
“곤란한 일이군요. 그래도 제 때 후퇴를 한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전선 하나를 담당한, 일군을 이끄는 사령관이 정신적으로 불안하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한편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사령관은 전투 중에 실로 많은 정보와 감정이 쏟아지는 환경에 노출된다.
거기다가 근거는 미약하고 시간은 부족한 상황에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를 강요 받는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판단이 늦어지거나 실수하면, 그 결과는 부하들의 죽음이라는 형태로 돌아온다.
아무리 냉정하고 무비한 인간일지라도 견뎌야 하는 스트레스는 보통 수준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인간 참모들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어린 브라우나인의 후계자라 할지라도 이미 인간으로 치면 일생 이상의 삶을 살아온 존재가 아니던가.
아무리 길고 긴 수명을 가진 엘프라고 한들···.
“인간 또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나잇값 못하는 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누군가가 냉정한 말투로 말했고, 세두시온을 보좌하는 당사자인 플로리안은 씁쓸한 미소만을 지었다.
고용주에게 직접적인 험담을 하는 것은 당연히 금기 사항이다. 그러니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돌려서 상당히 큰 비난을 한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혹자는, 보좌 담당인 플로리안에게 ‘감정적 케어를 하지 않았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쟁관의 참모들은 아무도 그런 말을 꺼내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고, 하고 있다는 것을 서로 알고 이해하기 때문이리라.
“...세두시온 공은 다른 전선으로 돌리도록 하지.”
잠시 고민하던 만프레트가 입을 열었다.
그는 내심, 이런 복잡한 전장 상황을 만들어낸 엘랑키아 국왕에 대해 감탄했다.
완전히 지리적으로 독립되거나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지만, 엘랑키아 군의 방어 배치 때문에 전선이 여러개로 나뉘었다.
그룬발트 군은 당연하다는 듯이 엘랑키아 군의 구상에 맞춰 공격하고 있는 상황이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선이 여러개라면, 전선을 담당하는 ‘군단장’급 인재도 여러 명이 필요하다.
어제의 전투를 지켜본 결과, 엘랑키아 군은 그만큼의 전선을 담당할 군단장급 인재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서··· 그룬발트 군도 그런지는 의문이었다.
설령 인재가 있다 해도, 급조된 연합군인 이상 적합한 능력과 권위를 가진 인물이 재능까지 가지고 있는지 검증할 방법이 없었다.
시간을 두고 편성을 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문제는 이미 전투가 시작되어 버렸다.
세두시온과 같은 경우가 그랬다.
이웃한 브라우나인 선제후령에서 직접 대군의 지휘를 맡겨 보냈고, 당사자는 다음 선제후 작위를 계승할 유력한 후계자.
이 이상으로 완벽한 위치에 있는 인물은 없었다. 그를 배제한다는 것은 그 휘하 병력까지 배제하는 꼴이 되니 그렇게 할 수도 없었고.
그리고 그 결과가 꼴사나운 패배였다. 심지어 그 패배는 세두시온 자신의 정신도 좀먹어가고 있었다.
뭔가 다른 형태의 대책이 필요했다.
조금 덜 중요하지만, 조금 더 쉬운 다른 역할을 부여할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