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7. 폴름스 전투, 첫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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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지금 몇 시지?”
잠에서 깬 나는 밖이 밝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쟁터에서 고위 장교가 늦잠이라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전투 첫날의 어수선함을 마무리하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일까··· 별 생각을 다 하며 서둘러 옷을 챙겨 입는다.
그때 문 밖에서 첼레스티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콘도티에레? 일어나셨어요?”
“첼레스티나? 왜 안 깨웠어··· 지금 몇 시지? 전황은?”
“네에··· 콘도티에레 이제 아홉 시가 조금 넘었어요. 그리고 폐하께서 별 일 없으면 깨우지 말라고 하셨어요오···.”
“폐하께서? 나를 왜?”
“쉴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쉬시는 게 좋다고 하셨어요. 특별히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는 사령부에 오시지 않아도 된다고도 하셨고요.”
“그래도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데 자고 있을 수는 없잖아. 전황은? 브리핑을 부탁해.”
사람 하는 일이 다 그렇듯, 특별한 일이 없다고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불안해하는 마음에 한 질문에 돌아온 체레스티나의 대답은 의외의 내용이었다.
“네에, 보고 드릴게요. 오늘은 아직 전투가 시작되지 않았어요, 콘도티에레!”
“아직? 그럼 여전히 대치중이란 말인가?”
“그것도 아니예요오. 그룬발트 군이 오늘은 아직 전장에 나오지를 않았다고 해요.”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아직 교전이 시작되지 않았다고 한들, 전장에 나오지도 않았다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나는 첼레스티나에게 오전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았고···.
팔자에도 없는 느긋한 오전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이래···.”
돌과 나무로 된 벽과 지붕이 있고 전용 침대도 있다. 나뭇가지를 엮어서 만든 임시 침대가 아니라, 튼튼한 참나무로 만들어 바닥에 고정된 진짜 침대 말이다.
심지어 아침 식사는 맛있는데다가 딱 기분 좋게 따뜻했고, 제대로 식탁에 앉아서 먹을 수 있었다.
당장 어제만 해도 세 끼 중 한 끼는 말 위에서, 한 끼는 서서 먹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몸을 씻을 온수까지 주어졌다.
아니 전쟁터에서 이렇게 사치스러워도 되는 건가? 라고 생각을 한다. 이 갑작스러운 느긋함에 위화감을 느끼며 첼레스티나가 깔끔하게 정리한 보고서를 검토한다.
어제 그렇게나 격렬하게 싸웠는데, 하루가 지난 오늘 그룬발트 군은 어떤 적대 행동도 하지 않았다.
소수의 정찰 부대를 제외하면 전쟁터에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믿지 못한 내가 실제로 임시 전망대에 올라가 확인한 결과, 사실이었다.
어제 수천 명의 병사들을 앗아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전장은 원인 모를 적막함에 휩싸여 있었다.
본래 각자 야영지에서 밤을 보낸 대규모 부대를 집결시키고, 전투를 위해 정확한 위치에 전개하는 건 상당히 큰 일이다.
어지간히 숙련된 장교들이 숙련병들을 다룬다 할지라도 지형에 따라 시간이 많이 걸린다. 못해도 30분은 걸릴 테고, 상황에 따라 1시간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하물며 여러 개의 연대, 다양한 병종을 유기적으로 배치하는 것은 굉장히 신경써야 하는 일로, 때로는 신경이 곤두선 장교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할 정도이다.
그런데 이 시간까지 배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오전 시간 동안은 전투도 하지 않고 그냥 보내겠다는 것일까?
적이 수적으로 유리하고 우리는 불리하다.
그렇다면 병력 교대를 통해 쉴 틈 없이 몰아 붙이는 것이 수적으로 두 배나 우세한 적이 가진 특권일 터였다.
글쎄 나였다면 어땠을까. 불행하게도 그런 적은 없었다만, 만약 두 배의 병력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다면···.
아침부터 전장에 병력을 배치해 세력을 과시하고, 전장을 확장하며 상대를 괴롭히려고 하지 않았을까?
설령 직접적인 전투에 나서지 않더라도, 이는 분명 열세인 상대에게 부담이 되는 행위일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이렇게나 전선에서 움직임이 없다면 그건 그거대로 불안해지긴 한다.
“후방에서 적의 이동은 분명 관측되고 있어요. 정찰대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니 조만간 보고를 올릴 수 있을거예요.”
“그래··· 고마워.”
난데없이 생긴 여유에 혼자 고민해본다.
아군은 적지 한 가운데에서 싸우고 있는 만큼, 시간을 무한정 보내기만 하는 것이 좋기만 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걸 제외한다면, 어느 정도 여유있는 싸움을 하는 게 아군에게 불리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적은 어떤 형태로든 부담을 안고 있다는 뜻이겠다.
이유로는 무엇이 있을까.
어제 전투가 생각보다 소모가 심각했나?
흠,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남부의 브레세른과 북부의 슈뵈켄에서, 적은 치명적인 타격은 피했지만 크게 패해 퇴각했으니까. 중부의 호펜로이테 전선은 그렇다 쳐도 말이지.
전술적 타격도 이만저만이 아니겠지만, 실제 전투를 겪은 병사들은 죽다가 살아난 심정이겠지 말이다.
전장에서 소모란 실제 병력이 사망하거나 물자를 손실한 것만 말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강건한 군인이라도 정신력이나 체력이 무한이 아니니까, 패배를 경험한 부대가 다시 전투력을 회복하려면 나름의 시간과 준비가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병력을 교대해서라도 전장에 투입하거나, 후위에라도 배치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아니라면, 적은 대규모의 재편성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여기에서의 재편성은 작전 계획의 수정 역시 포함된다.
어제의 공세는, 적이 부근에 도착하자마자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나 늑장을 부리더니 갑자기 전광석화와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건 많은 부담을 수반한다. 분명 준비는 충분치 못했을 테고, 많은 혼란과 불편이 뒤따랐겠지.
전쟁은 마치 반상 위의 장기처럼, 부대를 전투 위치로 이동시켰다고 자동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사람이 몇 명만 모여도 온갖 일이 벌어지는데, 수천 수만 명이 우르르 움직이는데 별 일이 없다면 그게 이상할 일이지.
어쩌면··· 그게 전장의 상황을 잘모르는 ‘나서기를 좋아하는 높으신 분’의 독단으로 벌어진 일이라면?
그러면 조금 이해가 간다.
급하게 움직이느라 적의 내부는 완전히 지리멸렬한 상황일 테고, 첫 날 전투에서 이겼으면 모를까 비참하게 패배까지 했으니 부대를 추스르고 있는 것이겠지.
누군가는 그 똥을 치우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렇게 나서기는 좋아하면서 전쟁에는 무지한 분이 또 실수를 해 주었으면··· 하는 기대감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이 두가지가 모두 아니라면···.
약간 두려운 예상이 되겠는데, 이게 전략적인 기다림이라면··· 이라는 케이스이다.
전장에서 기다림이 의미가 있는 상황이라면 뭐가 있을까.
적이 약화되기를 기다린다?
보급이 열악한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는 장기전이 되는 게 이득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번 엘랑키아 군은 국왕이 직접 이끄는, 정말 독하게 준비를 많이 한 원정군이다.
물론 몇 달이나 되는 장기간을 버틸 수야 없겠다면 며칠만에 물자가 떨어지고 사기가 떨어질 그런 상황은 전혀 아니다.
혹은 시간을 들여서라도 기다릴 법한 엄청난 지원구늬 존재?
글쎄··· 이미 그룬발트 제국은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대군을 동원한 상태이다.
여기서 ‘기다릴 가치가 있을 만큼’ 압도적인 병력이 추가 될 정도라면 전쟁일랑 얼른 집어 치우고 엘랑키아로 돌아가서 국경 지킬 걱정이나 하는 게 맞겠지···.
그러니 그런 종류의 기다림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일단 적에게는 선제후령 폴름스가 포위당했다는 약점 또한 있다.
시간을 끌다가는 폴름스가 먼저 함락당한다··· 이런 1차원적인 문제는 아니다.
지금 상황에서 엘랑키아 군이 무슨 수로 대도시 폴름스를 함락하겠는가?
사실 대치 상황만 유지해도 이 연리목 세계수의 도시가 갑자기 무너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야 한다.
다고베르 2세가 양면 전투의 불리함을 감수하고도 폴름스를 포위한 상태로 전투를 진행하는 선택을 한 이유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 때문이다.
일단 그룬발트 제국 전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일을 크게 키우는 것이었고, 이는 성공했다.
다음으로 제국 전역에서 대군을 불러 모아 집결하게 만든다. 이 또한 아군 입장에서는 두렵기는 하지만 성공 아닌 성공이다.
마지막으로, 이 두가지 상황은 대치한 적 지휘관에게 심각한 정치적 부담을 지게 만들었다.
그룬발트 제국 전체, 아니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군대가 주어졌다.
그런데 어서 엘랑키아 군을 격멸하고 폴름스를 해방하지 않고 뭐 하는 건가?
이런 상황이니 충분히 시간을 보내면서 유리한 전략적 상황을 기다린다는 선택지는, 아군에게 없는 만큼 적에게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좋든 싫든, 양측은 빠른 시일 내로 승부를 내야 한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적이 생각보다 서두르지 않고 있다는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이겠지만.
“콘도티에레, 새로운 보고가 왔어요!”
모처럼 생긴 느긋한 오전 시간을 적의 분석을 빙자한 망상으로 녹이고 있던 나에게 드디어 ‘일’이 들어온 모양이다.
“무슨 일이지?”
“네에··· 지원군에 대한 건이에요. 어제 밤에 도착한 지원군이요오.”
지원군이라.
적이 어떤 지원 병력을 기다리는지 몰라도, 반갑게도 아군 역시 약간의 지원군을 받았다.
북서쪽으로 향하는 길목의 파두자이트 마을을 통해 도착한 지원군은 상당한 수의 병력과 보급물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저번에 함락한 로델베르크 요새를 지키고 있던 수비대.
엘랑키아 본토에서 랄렌 강을 건너 ‘마지막으로’ 보내온 대량의 보급 물자.
그리고 어느 정도의 용병 부대.
얼마 전, 다고베르 2세 국왕의 사령부는 로델베르크 요새를 유지하는 것을 포기했다.
아무런 이득도 없이, 가뜩이나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병력만 분산된다는 의견 때문이었다.
그래도 의미 있는 첫 점령지이자, 엘랑키아 본토와 이어지는 연락보급망으로서 유지하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보병 연대 한두 개라도 남겨 지키자는 것이었다. 적 역시 병력을 할애해 공격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일 테니까.
하지만 본토로의 연락 및 보급선은 루트가 여러 개 있었고, 로델베르크가 그 핵심 지역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위치였다.
그래서 로델베르크 하나를 지킨다고 지켜지는 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1, 2개 연대로 지키기에는 성이 커도 너무 컸다. 알맹이도 없는 데 공성 과정에서 성벽이 너무 많이 상해 지키기도 어려웠고.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하고, 그곳을 지키던 병력은 폴름스 주변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보급물자야, 워낙 물량이 많아서 순차적으로 오던 것을 로델베르크 주둔군이 호위해서 함께 온 것이다.
여기에는 로델베르크와 그 주변에서 현지 조달된 그룬발트 군의 군수품도 대량으로 포함되어 있었고 말이다.
음, 이로서 아군은 한 달은 더 싸울 수 있다!
···설마 지구전을 하게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병들은··· 예상하지 못한 지원 병력이다.
“사령부에서는 새로 추가된 용병 부대를 내가 지휘하는 후위대에 편성··· 예비대로 활용하도록 지시가 내려왔구나.”
“네에, 콘도티에레. 병력이 늘었네요!”
“그러게나 말이야.”
내가 용병 출신이니까, 용병을 맡긴다··· 라는 단순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내가 담당한 후방, 아룬하비크는 그 자체로 전군의 후방을 지키는 방어 거점이기도 하지만 전투가 격화되면 지원군으로 활용할 예비대 거점이기도 하니까.
그나저나 지금 외부에서 보면, 폴름스를 함락하지 못한 데다가, 두 배의 그룬발트 군과 대치하고 있는 아군은 위기 상황으로 보일 수도 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엘랑키아 군의 승리에 배팅하는 용병단이라니, 뭔가 과감하구나.
물론 지는 쪽에 선다고 반드시 전멸하는 것도 아니고, 과정에 따라 나름의 커리어가 될 수는 있으니까.
그리고 사령부 측에서 용병을 모으면서 승리에 대한 인센티브를 강하게 걸었을 수도 있겠다. 두 배 전력차임에도 불구하고 참전을 결심하다니.
평균적인 수준의 중소 규모 용병단이 몇 개 정도 증강되었다. 이들에 대한 정보나 역할은 지금부터 파악을 해 보아야지.
“...어라?”
그런데 보고서가 한 장 더 남아있었다. 한 줄만 써 있는.
“이게 뭐지? 어? 지빌링엔?”
“네에, 콘도티에레! 아쥬흐 양이 보내신 진심어린 선물이에요!”
첼레스티나가 또 괴상한 소리를 한다.
진심어린 선물로 현지에서 고용한 수백 명의 무장한 우락부락한 남자들을 보내는 여자라니··· 이 무슨···.
여기가 전쟁터라는 단서가 붙지만, 끝내주게 멋진 여자라고 밖에 할 말이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