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6. 폴름스 전투, 첫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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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면서 모든 전선에서는 승패의 명암이 갈리고 있었다.
명백하게 신성 그룬발트 제국군의 패배였다.
남쪽 브레세른을 공격하던 병력은 측면에서 가해진 지원군에 전열이 흐트러져, 끝까지 회복하지 못하고 퇴각햇다.
북쪽 슈뵈켄을 공격하던 병력 또한 우회 포위를 시도하다가 허를 찔리고 간신히 병력을 수습해 퇴각했다.
중앙인 호펜로이테 공격은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나, 결국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시간이 늦어지자 종료되었다.
투입된 총 병력은 엘랑키아 군이 4만이 조금 안되는 숫자, 그룬발트 군이 그 두 배인 7만 가량이었다.
양측 모두 온 힘을 다한 것은 아니다. 최후의 카드라고 할 수 있는 정예군은 전장에 발도 들여 놓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만한 수준의 병력은 아니다. 오히려 숫자만 따지면 역사에서 전례가 얼마 없을 정도로 대군의 격돌이니까.
그 결과 결정적인 승리도 패배도 없었다. 양측 모두 감당 감당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다.
마치 악의로 가득한 전쟁의 신이, 너희는 앞으로도 지루하고 괴로운 대치전을 계속할 것이라고 선언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양측 지휘부가 받은 충격은 달랐다.
엘랑키아 군은 방어 계획이 나름의 역할을 하고, 거리가 다소 떨어진 후방과의 연락망도 잘 동작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우선 요새화 한 마을 중심의 방어 체계가 큰 역할을 했다.
물론 목재로 지어진 집과 나지막한 돌담 정도가 한계인 작은 마을들인 만큼, 아주 많은 방어군을 배치할 수도 없었고 몇 번은 마을의 일부를 빼앗기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매번 공격측인 그룬발트 보병들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했다.
결국 골목마다 반복되는 방어선을 뚫다가 힘이 빠진 그룬발트 군의 공격대는 한 번도 마을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이게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났을 때, 세 개의 마을은 여전히 엘랑키아 수비대의 소유였고.
결국 그룬발트 공격대는 마을 안팎에 무수히 많은 시체를 남겨두고 퇴각하는 수 밖에 없었다.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엘랑키아 수비군의 사기는 올라갔고 자신감은 넘쳤다.
설령 전투가 며칠을 거듭되더라도 거점을 잃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을 주변에서 벌어진 야전 역시 성과는 좋은 편이었다.
국왕 다고베르 2세가 직접 이끄는 아우페브라즈 사령부는 모든 전선의 정보와 위기를 파악하고 처리하는데 능숙했다.
만약을 위해 파견된 기병 지원군의 활약은 적절했으며 실제로 싸우지 않고도 전술적 우위를 달성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국왕 직속의 정예 왕실군 대부분은 아직 전장에 투입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 외에도 비슷한 환경에서 싸울 경우, 엘랑키아 군이 전체적으로 그룬발트 군에 비해 우위라는 것이 모든 전선에서 증명되었다.
하지만 그룬발트 군은 어떤가.
“이걸··· 어쩐다는 말이오? 병력이 두 배나 되는데 어째서··· 어째서!”
“....”
불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어두컴컴한 방 안을, 디오보르크 루프트 폰 제블링 공작은 빙빙 돌았다.
초조함과 두려움이, 이 젊고 잘생긴 차기 황제 후보자의 마음을 좀먹은 끝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 만프레트 그로블 폰 자이트리츠는 눈을 감고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만프레트 경! 이걸 어째야 하오? 나는 귀경만큼 전쟁에 밝지는 않지만, 오늘 전투 결과는 절망적이지 않소? 희망이 있는것이오?”
방 안이 어두워 그림자가 졌기 때문에 더더욱 절망적으로 보이는 디오보르크 공작이다.
물론, 자신이 차기 황제 후보자라는 중요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자각하고 있는 그는 다른 부하들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불과 30분 전 까지만 해도, 전투 결과에 의기소침한 휘하 귀족과 장교들을 위로하던 사람이었다.
‘오늘의 열세는 내일의 승리로 뒤집으면 된다!’
라며 주변의 기운을 북돋아 주던 디오보르크 공작은, 자이트리츠 전쟁관 출신 참모장인 만프레트 앞에서 불안해서 미칠 것 같은 속내를 내보인 것이다.
“...분명 아군은 패배하기는 했으나, 치명적인 패배는 아닙니다. 이후의 전투에서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한참 듣고만 있던 총참모장 만프레트가 조용히 대답했다.
‘마치 공작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렇지, 그러면 되겠지. 결국 마지막에 이기면 되니까 말이오. 하지만··· 나는 오늘의 결과를 보고 앞으로 전투를 지속할 수는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 것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분명 우리는 적의 두 배에 이르는 대군이오. 어제까지만 해도 엘랑키아 기사가 강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방어선 뒤로 숨어버린 엘랑키아 군은 별 것 아니라고들 하지 않았소?”
“그런 의견도 있었지요.”
물론 만프레트는 그렇게 말한 적도, 그렇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지금 엘랑키아 군의 방어선이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선을 통한 기동성의 이점을 살릴 수 있는 배치는 분명히 엘랑키아 기사의 강점을 두드러지게 보여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사령부를 방문한 귀족과 군인들 중, 유난히 많은 이들이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게 뭐요? 빌어먹을, 보고마다 엘랑키아 기사에 엘랑키아 기병대에. 마치 어린 아이가 망태를 짊어지고 아이를 납치하는 반인반수 노인네를 두려워 하는 것처럼, 일군을 호령하는 장수들이 두려워하고 있지 않소!”
“과도하게 두려워하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경향! 하지만 오늘 전투로 그 믿음이 더욱 굳어지고 말았잖소! 내일은 엘랑키아 기병이 모습만 드러내도 몽땅 도망갈까 걱정이오.”
이제 디오보르크 공작은 절망보다는 화난 것처럼 보였다. 만프레트는 그 편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실제 전술적 열세는 대부분 보병간의 전투에서 벌어졌습니다. 기병에 대한 과도한 공포증은··· 꾸준히 극복해야 할 과제이긴 합니다.”
“보병! 그것도 문제요. 엘랑키아는 기사가 강한 만큼, 보병은 약체가 아니었소? 오늘 보니 그게 아니더군! 우리 그룬발트 보병대와 호각, 어쩌면 적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소.”
보병 이야기가 나오자 디오보르크 공작은 더더욱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원래 열세라 생각했던 부분에서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아군이 우수하다 생각한 보병 전력에서도 조금도 우세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 충격인 모양이다.
사실 만프레트는 기병 전력이 그렇게 열세가 아니고, 보병 전력이 그렇게 우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보병의 경우, 과거 엘랑키아의 군사 귀족들이 정예 보병군의 양성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 질적으로 문제가 심각했던 경우가 분명 있었다.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이는 과거의 일이다.
현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가 즉위한 이후 그는 기병 만큼이나 보병에도 신경을 썼다. 이제 엘랑키아 보병은 크게 모난 데 없는 평균적인 수준이라 해야 한다.
다만··· 오늘 결과를 보면 엘랑키아 보병의 퍼포먼스는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직접 전장을 돌며 전투를 지켜본 결과, 북부와 남부, 그리고 중부의 엘랑키아 보병들은 모두 조금씩 다른 특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그룬발트에서 활동하는 중상위 용병 연대급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묻고 있지 않소. 기병도 열세, 보병도 열세요. 그런데 아군이 이길 수는 있는 거요? 내일도 모레도 공격을 계속하는 의미가 있는 거요?”
잠시 뜸을 들인 뒤, 디오보르크 공작은 ‘정말로 하고 싶던 말’을 꺼낸다.
“내가 정말로 저 빌어먹을 황좌에 앉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오!”
“....”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시작이나 하지 말 것을! 엘프들의 교언영색은 황금으로 겉을 씌운 똥이라더니!”
그는 현재 신성 그룬발트 제국에서 황위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일곱 선제후의 지지 약속이 문서화 되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잠정적으로 확정이나 다름 없다.
문제는 이번 엘랑키아 왕국의 침공을 극복한다는 조건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전쟁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는데도 선제후들의 지지가 유지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현재 공작이 누리고 있는 권력이나 정치력은 미래의 권좌에서 빌려온 것이나 다름 없다.
제국 전역에서 구름처럼 모여든 인재들은 미래의 황제를 섬기는 것이지, 흔해빠진 지방 공작을 섬기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평범한 궁정 귀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 온 만프레트로서는 디오보르크 공작의 불안함을 전부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눈 앞에 내려진, 영광으로 가는 무지개 사다리가 금이 가는 것을 보는 느낌이리라.
진정한 성공을 목전에 두었기에 더더욱 불안하고 목마르리라.
물론 만프레트로서도 아무 생각이 없어서, 할 말이 없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허겁지겁 도착해서 연합군을 파악조차 못했는데 전투를 준비해야 했다.
디오보르크 공작이 사전 상의도 없이 공격 개시 날짜를 공표하는 바람에 전군이 준비가 미흡한 상태로 전투를 시작해야 했다.
지휘권을 통일하지 못해 많은 병력이 후방에서 구경만 해야 했다.
통상적인 용병들과는 다르지만, 전쟁관 출신의 참모들은 ‘남의 전쟁을 대신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때로는 과도한 요구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많았다. 이번도 비슷한 상황이었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작 각하께서 무사히 황위에 오르실 수 있도록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오오오!”
이 과묵한 참모로서는 드물게도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자, 디오보르크 공작은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한편 어느 정도는 립서비스가 섞이기는 했지만, 만프레트는 현 상황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이 정말로 황제가 되고 싶어하는 것인지, 그냥 실패하기가 싫은 것인지는 몰라도 몸이 달아있는 황제 후보자는 대군의 사령관으로서 나쁜 인물은 아니다.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감정을 폭발하는 것을, 모두가 있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는 별실에 오기 까지는 참았다는 점이 믿을 만 했다.
최소한 완전히 제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니까.
단점이 많은 인간이다.
욕심이 많고 허영심도 많은데, 게으르고 소극적이다. 수습하지도 못할 큰 소리를 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도 잘 알지도 못하는 전술에 대해 아는 척 하면서, 비싼 돈을 들여 참모를 불러 놓고 조언도 안 듣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나름 실력에 자부심을 가진 만프레트 개인의 권위가 아니라, 전쟁관이라는 집단의 권위를 빌려야 한다는 것이 씁쓸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황위에 오르도록 해 준다면 디오보르크 공작가 재산의 절반을 자이트리츠 전쟁관에 양도하겠소! 내 약속하지!”
“공작 각하의 자비로우신 말씀에 감사를 표합니다.”
재산의 절반을 양도한다는 그 제안은 분명 파격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만프레트는 그다지 감흥을 받지는 못했다.
이런 기분에 따른 구두 약속이 모두 이행되었다면, 폰 자이트리츠 가문은 신성 그룬발트 제국 제일의 대영주이자 대부호가 되었으리라.
뭐, 그래도 실제로 파격적인 수준은 아니더라도, 조금씩 들어온 제국 전역의 재산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전쟁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도 했으니까.
또한 그런 약속이 없다고 한들 전쟁관에서 전에 없는 대규모의 보좌진을 파견한 이상, 패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프레트 자신의 사사로운 문제도 엮여 있고 말이다.
“잠시 나가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공작 각하?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이런 시간에도 말인가?”
“예. 아직도 지원군과 보급물자들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다음 전투를 위해 준비해두고자 합니다.”
“아, 그렇군! 그렇게 하도록 하시게!”
이동 계획이 너무 급하게 수립되었고, 병력 집결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 때문에 제한된 도로를 통한 이동 과정에서 온갖 사고가 발생했다. 여전히 많은 병력과 물자가 전장에 도착도 못한 상태였으니까.
한편 전장의 반대편에서는, 엘랑키아 군 역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추가 보급 물자와 증원 병력을 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