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3. 폴름스 전투, 첫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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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브레세른 방면에서는 적이 물러났다고 해요!”
“다행이네. 적이 추가로 공격할 낌새는 없을까?”
첼레스티나가 새로 들어온 정보를 취합해서 들려주고 있었다.
쿠웅, 펑! 쿠쿵!
멀리서 끊임없이 포성이 울린다. 아마 이번 전투를 하는 동안 포성이 들리지 않는 곳에 갈 일은 없겠지.
“네에, 콘도티에레. 루제 공작님 보고로는 대응 준비는 하지만 새롭게 공격받을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오.”
“그래. 다른 보고가 있으면 전달해줘.”
“네에, 콘도티에레!”
한 군데라도 전투가 마무리되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첫 날이니 서로 탐색전을 하는 정도로 마무리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한 것은 절반··· 아니 삼 분의 일만 맞아들었다고 해야겠다.
왜냐하면 나머지 두 거점, 북쪽의 슈뵈켄과 중앙의 호펜로이테는 여전히 격렬한 공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말을 몰고 포성이 끝 없이 들리는 북쪽으로 이동했다.
지금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곳은 북쪽, 슈뵈켄을 둘러싼 공방전이다.
호펜로이테에 대한 적의 공격은 평이했다. 마치 자신들의 전력과 물자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정예병력이 끊임없이 교대하여 몰려왔으며, 끊임 없이 마을 외곽의 방어선을 넘어왔고 최악의 상황에서는 마을의 삼 분의 일 가량을 상실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노장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이 직접 이끄는 왕실군의 정예들이 지키는 곳이다.
공격해온 적은 즉각 격퇴당하고 오히려 많은 사상자와 포로를 남겼다. 이는 프레니히 백작이 올린 보고에 자랑스럽게 기록되어 있었다.
‘적의 공세는 강력하고 우리 병사들은 지쳐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마을을 적에게 내 주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입니다.’
호펜로이테는 정공법으로는 결코 빼앗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지.
굳이 마을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만들고, 이를 내세워 적을 맞이하고자 했던 것은 이런 전술적 우위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마을은 상당한 수의 적을 ‘빨아 들일’ 것이다. 그리고 홀린 듯 마을로 돌진해온 적은 상당한 피해를 입을 테고, 그 피해는 단순히 병력 손해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고정된 엄폐물에 헛되게 박힌 탄환 한 발 한 발, 그리고 계속 오르막길을 오르며 위를 보고 싸워야 하는 병사들의 극심한 피로까지.
‘평지에서 엘랑키아 기사를 상대하는 것 보다는 마을 공격하는 게 낫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적이 요새화 된 방어선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아군이 수비하기는 편해지니까.
하지만 멀리 북쪽으로 보이는, 슈뵈켄을 중심에 둔 전투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을 자체가 아니라 마을 주변을 공격하고 있군···.”
목이 말랐기 때문인지, 내 목소리는 마치 신음소리처럼 흘러나와 나도 놀랄 정도였다.
“코, 콘도티에레! 여기 물이요!”
“고마워···.”
나는 체레스티나가 내민 물통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레몬이 들어간 물은 놀랍게도 시원했다. 첼레스티나의 세심함에는 항상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건 역시 목이 마른 일이다.
“슈뵈켄에서는, 아르밀 드 브라뇰 경에게서는 별다른 보고나 요청사항은 없었어?”
“네에, 콘도티에레. 아마도 아르밀 공작님은 결정적이거나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따로 전령을 보내시지 않는 분이신 것 같아요오···.”
“조용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인가···.”
아르밀 드 브라뇰 공작은 약 10년 전, 현재의 국경이 정해지는 계기가 된 팔스부르 전투에서 그룬발트의 반격을 분쇄한 인물이라고 들었다.
성격에 따라 적극적, 소극적 갈리지 않고 상황에 따라서 적합한 전술을 쓰는 인물이라고 하던가.
이번에는 굳이 구분하자면 소극적 전법이다.
슈뵈켄 마을로 군의 정면을 보호하며, 마을의 측후방에 여러 개의 사각 대형을 만들어 적의 진격을 막아내는 형태.
다소 전력 면에서 부족하더라도 대등하고 싸울 수 있는 국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을 타고 가까이 다가가면서 멀리서는 인지하지 못했던 점들이 보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그 와중에도 힘을 아끼고 있다는 점일까.
다른 전선, 즉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의 호펜로이테 전선이나 루제 드 제브레도뉴 공작의 브레세른 전선에서는 어느정도 강 대 강 싸움이 지속되었다.
비록 수적 열세지만 아군이 가진 전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을 제압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실제로 아군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공격해 온 것 같은 적군에 대해 대등하거나 우세한 싸움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르밀 공작의 전술은··· 근본 부터가 완전히 다르다.
70의 힘으로 막을 수 있다면 70의 전력만, 50의 힘으로 막을 수 있다면 50의 전력만 사용한다.
당연히 언제 어느때나 예비대를 확보해두고 결정적인 순간을 노리는 것은 모든 지휘관이 사용하는 근본 전술이다.
왜 유명한 격언이 있지 않은가. 예비대가 없는 지휘관은 구경꾼에 불과하다는.
하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전장은··· 그런 정도가 아니다. 좀 더 작은 단위, 구체적으로 중대 단위로 계산된 방어전이라고나 할까.
아마 노장 프레니히 백작이라면, 70의 힘만 써도 막을 수 있다면 나머지 30을 공세에 써서 상대의 공격을 조기에 차단하는 데 썼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아군의 세를 과시하고, 전선의 균형을 되찾는 방식이다.
하지만 현재 아르밀 공작이 보여주는 방식은 남는 힘은 고스란히 남기는 방식으로 굉장히 특이한 방식이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해도··· 이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겠지만···.
보통은 이렇게 칼같이 소요 전력을 계산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 전쟁은 게임이 아니다. 전황을 설명해주는 유저 인터페이스도 없고, 전선을 유닛 단위로 나누어서 보여주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병사들의 머리 위에는 스테이터스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정도 병력이면 전선을 지탱할 수 있겠군’ 이라는 확신을 어떻게 가지느냐는 말이다.
넘친다면 굳이 이런 계산을 하는 이유가 없으며, 모자라다면 전방 부대가 붕괴되어 기껏 아낀 전력이 전선 땜빵에 낭비 될 것이다.
이러면 오히려 비효율적인 축차 투입, 병력 낭비가 되고 만다.
물론 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내 경우는 그런 세세한 데 신경을 쓸 자신이 없어 병력의 표준화에 집착하는 편이다.
모든 단위는 동등한 전술적 가치와 능력을 가지며, 마치 벽돌처럼, 언제 어느 끼워 넣어도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대.
그게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군의 모습이다.
···물론 다 같은 벽돌이라도 모서리를 지탱하거나 무게를 받아줘야 하는 특수한 구조가 필요한 경우도 있긴 하지. 슈토르히의 돌격대처럼 말이다.
아무튼 내가 보고 있는 게 맞다면··· 아르밀 공작의 전선에서는 ‘특별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엄청난 일이 발생할 것이다.
사령관이 전선에서 병력을 아끼고 아껴서 별도 임무 부대를 편성한다면··· 그게 앞으로 할 일이 뭐가 있겠냐는 말이다.
“디타레 경, 조만간 할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저희는 언제라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처럼 첼레스티나가 권한 레몬수로 목을 축인 왕실군의 기병대장, 디타레 드 카울 경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한다.
‘폐하께서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엘랑키아의 왕실 기사로서 본연의 임무를 해 보았으면 하는 욕심은 있습니다.’
샹다메리 전투에서는 적장으로 만났던 이 젊은 기병 전문가는 이번 전쟁이 시작된 후로 계속 선봉을 맡아 정찰, 전초전, 연락선 차단과 같은 임무를 훌륭하게 해 왔었다.
임무니까 해 왔고, 그것도 꽤나 잘 해왔지만 그래도 역시 엘랑키아 귀족 기사라면 바라 마지않는 임무가 있겠지.
이번에는 아마도 그 ‘본연의 임무’를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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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이상한데!”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은 혼잣말을 내뱉었다.
어째서일까. 공세를 아무리 강화해도 효과가 없다는 느낌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마치 단단히 고정된 문을 힘으로 열기 위해 밀고 있다는 느낌일까.
문 자체가 잠겨서 열쇠가 필요한 경우와, 경첩이 느슨해 바닥이 잘 맞지 않거나 반대편에 무거운 짐이 놓인 경우는 명백히 다르다.
전자의 경우는 열쇠를 가져오지 않는 한, 잠금 장치 자체를 부숴 버리기 전에는 아무리 힘을 쓴들 소용이 없으리라.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충분한 힘을 들인다면 억지로라도 방해물을 밀어내며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후자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왠지 전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결국 적도, 슈뵈켄 마을 자체의 요새화 된 방어선이 아니면 평지에 진을 친 보병 대열이다.
병력과 화력을 그 이상으로 쏟아 부으면 밀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의지가 쌓아 올린 장벽이란 말이다.
그런데 마치 돌로 된 벽을 공격하는 느낌이다. 병력을 투입했을 때··· ‘손 맛’이 없다고 해야 할까.
적이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으니, 예비대에서 추가 병력을 보내 전선을 연장하고 압박한다.
분명 밀어낼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으니까.
지금까지 펠쿠트 백작 휘하의 부대는 조금씩, 꾸준하게 전진해오고 있었다. 그 결과 지금은 슈뵈켄과 엘랑키아의 수비 병력을 반포위하는 형국이 되었다.
그런데 그게··· 어느 순간부터 턱 막혀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펠쿠트 백작은 20대의 젊은 나이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게 꽤나 많은 전장에서 싸워온 역전의 용사였다.
그래서 주변 영주들에게도 인정 받았고 기꺼이 자신의 병력을 맡겨 전장으로 보낸 것이니까.
다만 그는 대단한 전술적 지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가문의 베테랑 가신들로부터 기초적인 교육을 받았을 뿐, 대부분은 전장에서 감각으로 익혔다.
다행히도 펠쿠트 백작의 ‘촉’은 대단히 뛰어난 편이었고, 신뢰하는 부하들이 겪고 있는 상황을 빠르게 깨닫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이번에는 잘 통하지 않고 있었다. 부하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지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참모장은··· 타를라 참모는 어디 있나?”
“아마 반대편, 우익 쪽에서 부대를 지휘하고 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백작께서 부르신다고 전할까요?”
“아, 아니다.”
디오보르크 공작의 총사령부에서 파견온 여참모, 타를라 니케 폰 자이트리츠를 반대편으로 보낸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다 느끼기는 했으나, 특별히 배척한 것은 아니다.
다만 아군이 적을 밀어내면서, 슈뵈켄 마을을 중심으로 병력이 둘로 나눠질 수 밖에 없었고, 자신이 마을의 동쪽을 맡는 좌측을 맡고 반대편을 그녀에게 맡겼을 뿐이다.
참모 타를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무리 가깝다고는 해도 지휘 체계를 둘로 쪼개는 것에 걱정을 표시했지만, 펠쿠트 백작의 전술 구상을 납득하고 측익 지휘에 동의했다.
바로 그녀의 우측 부대가 모루가 되며, 펠쿠트 백작이 직접 이끄는 좌측 부대가 망치가 된다는 것이었다.
아니··· 약간은 자기 마음대로 지휘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대로 진격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첫 날 부터 적을 격멸하고 슈뵈켄을 탈환하는 것은 어려우니, 야전에서 충분히 타격을 입혀 앞으로의 싸움을 유리하게 만든다··· 라는 목적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망치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드는 정찰 보고가 올라왔다.
“펠쿠트 백작님! 멀리 엘랑키아의 지원군이 보입니다! 기병입니다!”
“뭐? 기병? 병력이 얼마나 되나?”
“수천 기는 되어 보입니다! 정찰을 보내고 측면 방어를 지시할까요?”
“잠시 날개를 접는다! 이제 와서 무슨 짓을 하려고···.”
까다로운 일이다. 펠쿠트 백작은 그룬발트 군 병영에 널리 퍼져있는 대로 엘랑키아 기사를 공포에 가깝게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하들이 두려워한다는 사실도 알았고, 엘랑키아의 기사가 강하다는 것도 인지는 하고 있었으므로, 측면을 그냥 노출할 수는 없었다.
엘랑키아 기사도 갑옷을 입고 말에 탄 인간이고, 좀 더 용맹하고 잘 싸울 수는 있지만 결국 창날로 밀어붙이고 총으로 쏘면 쓰러뜨릴 수 있다!
그의 판단은 그렇게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다소 무리해서 밀어붙이기 위해 압박을 더하던 병력을 조금 물리고, 예비대를 포함해 일부로 측면의 방어를 더한다.
이 또한 매우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렇기에, 그 행동이 어떤 ‘트리거’가 된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