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1. 폴름스 전투, 첫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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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떻게 할까요? 물러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안 돼! 여기서 우리만 빠졌다가는 공격 대열 전체가 무너진다! 준비가 될 때 까지는 우리가 버텨야 한다!”
미클라크 벨치 폰 귄터젠은 짧은 망설임 직후에 휘하 장교의 제안을 거절했다.
본래 그와 그 휘하 병력의 위치는 브레세른 마을 서쪽으로 펼쳐진 긴 전투 대열의 중간 정도로, 정면의 적을 상대하는 것만 신경쓰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재 좌측의 부대들이 몽땅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이다.
가장 측면을 지켜야 할 부대는 대기병 방어를 위해 기동성이 떨어지는 사각 밀집 대형으로 변환한 뒤 그저 버티고 있었다.
엘랑키아 기사들이 더 위협적이니, 그렇게 행동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들이 갑자기 대열에서 빠져버리는 바람에, 훤히 드러나버린 아군 측면을 공격한 것은 엘랑키아 기병이 아닌 보병이었다.
“전방의 적도 공세로 전환했습니다!”
“빌어먹을, 손발이 척척 맞는군!”
이게 문제였다. 아군은 연대 단위로 연계가 잘 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도 진격 명령이 제각각 내려져서 초반 공세부터가 일관되지 못했었으니까.
그 후에야 적당히 알아서들 눈치보며 발걸음을 맞춰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이기는 동안’만 가능한 일이다.
원래 유리한 상황에서 아군을 돕는 것은 신나는 일이고 쉬운 일이다. 그냥 둬도 이길 수 있는 상황에 숟가락을 얹는 행동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불리한 상황에 처한 아군을 구한다는 것은··· 어쩌면 다른 아군이 입을 피해를 대신 당해야 하는 일일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는 패배의 책임까지도 떠안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미클라크는 폴름스 선제후령을 섬기는 용병대장이자, 남부 영주들의 지휘권을 위임받은 대리 지휘관이었으니까.
병사들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았다. 지휘관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말이다. 그렇다고 부하들 살리겠다고 임무를 방기할 수도 없었다.
현재 그의 좌측면을 지켜줘야 할 아군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대로 퇴각하기라도 한다면 두 방향에서 적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미터스하임에서 병력이 줄 대로 줄어서 정면의 적과도 안간힘을 써 가며 간신히 싸우고 있는 부하들이 말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여기서 적을 틀어 막는다. 전령! 전령을 보내라. 사령부에 현재 상황을 알려라!”
“옛, 알겠습니다!”
“이제 명령 없이는 전진도 후퇴도 없다! 방어선을 굳히고 여기서 기다린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만 지키자!”
“옛!”
이미 사방이 아군이고, 수적으로도 유리하다.
그런데 도와줄 병력이 없··· 지는 않겠지.
최악의 경우, 버림돌이 되어 이대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두가 허둥대면서 각자의 병력만 수습해서 빠지는 상황이라거나 말이다.
···자칫하다가는 여기서 휘하 병력과 함께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브레세른 공격을 책임진 지휘관이 다름 아닌 미터스하임 전투에서의 상관, 세두시온 공이기 때문이다.
“대장님, 아군 기병대가 전진하고 있습니다!”
“정말인가? 오오···.”
“휴우, 살았다, 살았어!”
“긴장은 풀지 마! 다음 명령이 있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옛, 전달하겠습니다.”
다행히도 아군 기병대는 이 상황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측면으로 크게 우회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저 위치라면 측면을 노리고 있는 적 보병과, 새롭게 나타난 적 기병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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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 지휘관 계십니까? 기병 지휘관님!”
휘하 기병과 함께, 전장에서 살짝 벗어난 지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렐 드 상포리앙 소백작은 낯선 전령의 방문을 받았다.
다급한 표정의 전령은 브레세른 수비군의 어딘가에서 온 것이 분명했다.
“우베노 연대의 피락스 우베노 대장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우베노? 실례지만 우베노 연대가 어느 부대인가?”
“가장 우측, 지금 적의 측면을 공격하고 있는 부대입니다.”
“아···.”
“피락스 대장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연대의 뒤를 지켜달라, 그렇게 해 준다면 오늘 전공의 절반은 귀하와 기병대의 것이다!’ 이상입니다!”
방금 적의 측면으로 순식간에 돌아가 수세 일변도이던 전황을 삽시간에 뒤집어 버린 부대에서 온 전갈인 것 같았다.
그럭저럭 군사 경험이 생기고는 있지만, 이런 대규모 회전은 낯선 카렐이 보기에도 적의 측방에 갑자기 나타난 것 같은 대단한 기동이었다.
확실히, 저 부대 입장에서는 적 기병이 나타났다고 현재 포지션을 포기하고 다시 수세로 전환하기 아쉬워 보였다.
사실 자신이 받은 명령은 1차적으로는 적의 대열이 길게 연장되어, 혹시라도 아군의 측면이 위험해 보일 때 모습을 드러내는 것, 그게 끝이었다.
‘브레세른을 포함한 전방의 아군들은 열세 상황에서 힘든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부담을 줄이는 것, 그게 임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행동을 제약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아우페브라즈의 남방을 지킨다는 임무를 방기하지만 않는다면, 기병 지휘관으로서 자율권은 보장받고 있었다.
원래는 직접 싸울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알겠다. 그러기 위해 왔다고 답하겠다.”
“옛, 감사합니다!”
전령이 돌아가고, 휘하 지휘관들과 후위대를 맡은 티테니아 드 몽파르지에에게 전령을 보내 알렸다.
지원 요청이 왔으니 대응하겠다. 아군의 측방을 적 기병으로부터 지켜야 하지만, 병력 온존을 최우선 해달라는 말을 전했다.
다소 이율배반적인 명령이지만, 병력 온존 또한 카렐이 맡은 아주 중요한 임무 중 하나임은 분명했다.
전령들이 오가고, 다소 느긋했던 기병 대열에 다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준비 완료를 확인한 지휘관 카렐이 검으로 전방을 향하며 외쳤다.
“앞으로! 적 기병을 격파하고 아군을 돕는다!”
“앞으로오!”
“앞으로!”
그가 지휘하는 엘랑키아 기병대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진 돌격은 아니다. 대신 전장에 발을 좀 더 깊숙이 들여놓고, 만약 그룬발트 기병이 계속 적극적으로 나온다면 교전한다.
전방에는 이미 전군을 우회하듯 움직이기 시작한 적 기병이 보인다.
숫자는··· 2천 명 정도? 적어도 카렐과 티테니아가 이끄는 기병보다는 수적으로 더 많았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이 정도의 병력 차는 흔한 일이고, 기병전이라는 특성상 즉각적으로 숫자의 힘이 영향을 미치기 전에 빠져 나갈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열심히 싸우고 있는 아군 보병들의 사기나 전황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겠지만.
“적 기병도 우리를 보았군요.”
참모의 말대로였다. 실제로 우회하여 브레세른 수비군의 측후방을 공격할 생각이었는지, 그러는 척만 해서 아군을 압박하려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허둥대며 이쪽을 향해 부대를 재배치한다. 장교와 전령들이 버럭버럭 지르는 고함 소리가 여기까지도 들린다.
이것만으로도 카렐이 기병을 전진시킨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고 하겠다.
이제부터 어쩐다···.
카렐은 재빠르게 주변을 살핀다.
적 측면을 강습해 몰아붙이고 있는 아군 우베노 연대의 기세는 여전하다. 그 외에도 보병 대열 전체적으로 수세였던 걸 잊기라도 한듯, 전선 자체를 밀어 올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에 비해서 뒤로 빠진 적 보병들은 여전히 소극적인 모습이거나, 오히려 계속 후퇴하려는 듯한 모습이다.
적 기병까지 나타났으니, 저들이 우베노 연대를 견제한다면 브레세른 수비군으로서는 답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드는데.
다행히 적은 그러지 않고 있었다.
만약 기병이 멈추거나 물러선다면, 굳이 교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지만···.
적은 아군과 마찬가지로 속보 정도의 느린 속력이지만, 계속해서 다가온다.
이미 양측 선두의 거리는 수백 미터 까지 가까워졌다. 본대는 좀 떨어져 있다 해도, 기병 입장에서는 정말 한달음에 좁힐 수 있는 거리였다.
“전군 전투 준비.”
“옛, 전달하겠습니다!”
“전투 준비잇!”
카렐은 전투를 결심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명확한 명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전투를 결심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그저 전투 준비 명령이 내려왔을 뿐, 실질적으로 바뀐 것은 없다.
움직이는 속도도 여전히 말과 기수 양쪽 모두에게 부담이 가지 않는 총총걸음, 대열도 방금 전과 동일하다.
그런데도 갑자기 휘하 기병들이 사방에서 내뿜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괜히 가슴이 뜨거워진다. 적도 이런 기운을 내뿜고 있을까?
“예정대로 선봉과 양 측익먼저 돌격한다. 본대는 상황을 봐서 결정하겠다.”
“옛, 카렐 경!”
“각 부대,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
“전달하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천 기 정도의 기병대가 크게 네 개의 덩어리로 나뉜다.
마름모 꼴의 진형을 한 선두와 양 측익이 앞서 나간다. 적은 여전히 거대한 횡대 진형에서 변화하지 않는다. 수적 우세인 띠 형태의 본대 전체로 몰아 붙이려는 것일지.
순간, 우측방에서 날카로운 돌격 나팔 소리가 들린다.
“가자! 나를 따르라! 돌격 앞으로!”
“돌격 앞으로! 돌겨억!”
“돌겨억!”
얼마 지나지않아 반대인 좌측과 선두 부대도 돌격을 시작한다.
적의 전체 규모를 생각하면 작은 규모인 세 개의 창날이 앞장서서 뛰쳐나간다.
적은 여전히 움직임의 변화가 없었다. 대신 전체적으로 속도를 조금 올리며 돌격에 대응하려는 모양이다.
“본대도 아군의 뒤를 따르겠다. 각 중대장 판단에 따라 돌격한다!”
“옛, 중대 단위로 돌격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일이 전령을 보내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었다. 깃발과 나팔 신호로 사전에 정해둔 전술은 전달이 가능했다.
명령을 알아 들은 중기병 중대들이 함성을 지르며 속도를 올린다.
현재 카렐이 지휘하는 부대는 이론상 드 레뮤즈 백작의 권위에 의해 편성된 부대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구성원의 출신은 제각각이다.
드 레뮤즈 백작령 직할의 젊은 기사들이 있는가 하면, 카렐 자신처럼 동맹 가문들에서 보낸 병력, 옛 블랑독 출신에 이스키비르 강 건너 라솔 계열 영주들이 보낸 병력도 있었다.
일부 핵심 인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생뢰르반 군이 새롭게 증강되며 소집된 신규 인원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중대 단위로 혼성 배치된 이들은 모두 일관된 지휘체계에 따라 움직이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 분명한 경쟁심리는 있었다.
특히나 귀족 가문이나 향사 출신이 많은 중기병들이 더더욱 그랬다. 창과 권총을 휘두르며 높이 외치는 호기 넘치는 함성은 단지 적을 향한 것만은 아니겠지.
‘부대 간의 적당한 경쟁심은 병사 개인과 부대 전체에 모두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이를 조장하면 그 책임은 부대 전체가 지게 됩니다.’
카렐은 콘도티에레, 에트 경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편으로 백작가의 후계자라는 카렐의 입장이 서로 다른 출신자들이 가지는 크고 작은 불만들을 중재할 수 있었던 터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이번 전투를 거치면 다소 따로 노는 이들이 하나의 부대로 거듭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타탕! 타타타탕!
타타탕! 따당! 따다다당!
“교전이 시작됐습니다!”
참모의 보고보다도 빠르게, 전방에서 주고받는 총소리가 귀를 때렸다.
서로 보병의 도움을 받지 않는, 순수 기병끼리의 격돌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