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0. 폴름스 전투, 첫째 날
###
“적은 불리한 전선에서도 잘 싸우는군.”
“숙련병들을 이끌고 온 모양입니다.”
“하나같이 전투에 익숙해 보이는데··· 외부에서 용병을 고용했는지도 모르지.”
미클라크 벨치 폰 귄터젠은 휘하 연대를 이끌고 적진을 돌파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얼마 전 미터스하임 전투에서 누적된 피해 때문에, 재편성을 마친 그의 휘하 연대는 전력이 부족했다.
도저히 엘랑키아든 그룬발트든 다른 1개 연대를 독립적으로 상대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싸우지 않거나, 독립적으로 편성된 두 개 연대를 하나로 통합해 버리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규모로 인한 힘싸움에서 밀릴 뿐이지 각 연대의 핵심 전력은 아직 건재하니까.
게다가 언젠가 병력이 보충될 것 까지 고려하면 연대 수를 줄이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대신 미클라크가 선택한 것은, 자신이 좀 더 세심하게 병력을 지휘하는 것이었다.
1천명이 안되는 두 개의 연대를 적 연대 하나에게 붙여 협력하게 해서 2천 명이 넘는 단일 연대 이상의 역할을 하게 한다.
이는 이론상이 아니라 실제로 충분히 가능하다. 각 연대의 조직이 건재하고 장교의 수와 질도 정규 연대에 필적할 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대신 지휘관인 미클라크가 신경을 갈아넣을 정도로 신경을 써야했고, 직접 전투를 지휘하는 하급 장교들도 평소보다 고생을 해야 했을 것이다.
만약에라도 서로 협력할 수 없는 상태에서, 병력이 크게 떨어진 연대가 집중 공격 당하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깊고 깊은 창병 대열의 질량으로 밀어 붙이는 시원시원한 돌격도 할 수 없었다.
원래 보병 출신으로, 최전방에서 정예 보병 중대를 이끌고 적과 드잡이질을 하며 출세했던 미클라크로서는 조금 아쉬운 일이었다.
허나 주어진 전장 상황에 불평을 가질 수도 없다.
적어도 지금은 전선이 유리하기라도 하지 않은가!
주변 상황에 신경쓸 필요 없이 눈 앞에 직면한 적만 신경쓰면 된다. 적이 힘싸움을 피하고 각도를 조절해가며 슬금슬금 후퇴하는 게 짜증나기는 하지만···.
시간을 두고 천천히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 두 배의 전력이란 그런 힘을 가진다.
눈 앞의 적 연대를 무너뜨리고 아군 전력을 보존하는데 전력을 다 하자. 자신은 전장 전체를 읽을 수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되는 현재가 좋았다. 미클라크 자신은 다시 생각해봐도 이런 역할이 딱이었다.
투퉁! 퉁! 펑!
“서쪽에서··· 포성?”
“아군의 포대일까요?”
“...왠지 불길하군.”
지금 그들은 브레세른 마을에서 서쪽, 아룬하비크 마을로 이어지는 대로를 남쪽에서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군 포병의 주력은 브레세른 마을에 몰려 있으니 포성이라면 현재 미클라크의 위치에서 동쪽에서 들려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쪽에서 들리는 포성이라니. 게다가 상당히 멀리서 들리는 소리였다.
포성이 너무 멀고, 전장에는 다른 소음도 많았기 때문에 아직은 파악할 수 없었다.
애초에 최전방에서 지휘하기 위해 승용마도 두고 온 입장에서, 일개 보병들과 눈 높이가 같은 미클라크가 파악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가 믿을 것은 서쪽, 그의 좌측으로는 최소한 수천 명의 아군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몇 개 연대나 되는 아군이 측면에 있는데, 별 반응이 없다는 것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겠지.
자자, 신경을 끄자. 미클라크는 사령관도 아니요, 한쪽 측면을 책임진 중견 지휘관도 아니다.
그저 전력 미달인 슬픈 연대 몇 개를 최대한 활약시키기 위해 조욜하는 데도 정신 없는 어중간한 지방군 장교일 뿐이었다.
“적군이 계속 물러서고 있습니다, 미클라크 경.”
“힘 싸움에 붙들려서 물러날 때를 놓치기 싫은 모양이겠지. 우리는 잘 하고 있다.”
엘랑키아 보병은 예상과는 다른 노련함을 보여주었다.
그룬발트의 군인들은 대체로 엘랑키아 기사들에 대해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가진 것과 반대로, 엘랑키아 보병들은 얕보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래도 엘랑키아라는 왕국 자체가 시간과 비용을 들여 보병 부대를 양성하는 대신, 원래 가진 강점인 기병 전력을 갈고 닦는데 신경쓴다는 인식이다.
그나마 현 국왕이 신경쓰기 전에는 지역마다 보유한 화승총 비율도 제각각이었다고 하던가.
오죽하면 ‘적국의 적국’인 라솔 왕국의 경우에는, 엘랑키아 보병들을 ‘돼지’라는 멸칭으로 부른다고 했다.
덩치만 크고 느릿느릿한데, 겁만 많아서 그렇다던가.
하지만 이번 적은 좀 달랐다. 둔하다는 느낌도 없었고 오히려 규모는 2천명 이하로 그룬발트 기준으로도 적당한 규모의 연대 단위로 움직였다.
오히려 숙련된 그룬발트 용병들과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적어도 비슷한 규모로 격돌했을 때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마도 타국으로 원정을 오는 상황이니, 보병들까지 골라 뽑아서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물러날 수도 없을 것이다.
적 방어선의 핵심은 브레세른이라는 고정된 마을인데, 이걸 버리고 도망치겠다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까.
게다가 적 후방에는 호수··· 라고 이름은 붙었지만 아무튼 늪지대가 있어서 적에게는 까다로운 위치가 될 것이었다.
휘하 병력이 부족한 게 너무 아쉬웠다. 이럴 때 1개 연대 정도 깊은 종심 대형으로 약점을 찔러볼 수 있었다면···.
“너무 서두르지 말고, 적이 멈추면 교전하고 그렇지 않으면 추격한다. 굳이 따라잡으려 하지 말고 창병과 보병이 보조를 맞춰라.”
“예, 대장님.”
지금은 확실하지도 않은 전공에 낚여 부하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들은 미터스하임에서 이미 충분히 희생을 경험했으니까.
아군 전체가 숫자와 힘으로 눌러 얻는 ‘큰 승리의 일부’라도 상관 없었다.
그때까지 최대한 안정적으로 움직이고, 폴름스 본성의 포위가 풀리면 그 다음은 선제후 전하의 지시에 따를 뿐이었다.
타타타탕! 타탕!
타탕! 따다다당! 타탕!
또다시 멈춰선 적 총병이 어설픈 견제 사격을 하더니 우르르 도망친다. 놓치지 않고 전진하던 아군 총병이 반격한다.
물러서던 적 중 몇 명이 허공에 춤을 추듯 빙글 돌다 쓰러지는 것이 보인다. 그의 병사들은 잘 싸우고 있었다. 마치 단단한 벽처럼 느리지만 단호하게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전장의 다른 곳에 대해서는 관심을 쓰지 않고 앞만 보고 가고 싶었으나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서쪽에서 뭔가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쿠쿠쿵! 투퉁!
멀리 서쪽에서 들려오는 둔한 포성도 계속되고 있었고 말이다. 불길한 일이었다.
“내 말을 가져오게. 그리고 전령을 보내서 좌측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해 보도록.”
“알겠습니다!”
“전방 지휘는 잠시 맡기겠다. 지금까지처럼, 침착하게 부탁한다.”
“맡겨주십시오.”
어쩔 수 없이 말을 타고 부대 후방으로 빠진다. 얼마 안되는 예비대를 지나오자, 대략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전군의 좌측 끝에 위치한 부대가 어째서인지 한참 후방에 위치해 있었다.
진격 도중에 멈춘 것인지, 아니면 후퇴해서 그 위치로 이동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 부대는 몇 개의 큰 덩어리로 나눠 똘똘 뭉친 대기병 사각 대형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다. 측면에서 대규모 적 기병이 활동하고 있었나?
흙먼지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서야 진격하다 말고 측익 부대가 갑자기 멈춰서 저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지?
공포의 대상인 엘랑키아 기사들의 내습에는 항상 대비하고 있었다.
후방에는 우리 그룬발트 기사들도 집결해 있었고. 다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적 기병이 돌입해왔다면 아군 기병도 구원을 올 것이다.
그런데 그걸 기다리지 않고, 분명 수적으로 우세한 아군이··· 갑자기 저렇게··· 소극적으로 나올 이유는···.
“전령! 전령!”
미클라크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말의 옆구리를 차 속도를 올린다.
“진격을 멈춘다! 측면 조심! 측면을 조심한다!”
좌측 끝의 아군이 그렇게 소극적으로 나온 이유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진격을 멈추고 대기병 전투를 준비하는 사이, 비어버린 아군 측면으로 어느새 적 보병들이 공격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정면은 후퇴하며, 오히려 측면은 전진하여 아군의 측방을 노린다. 초보적인 전술이지만 효과적이다.
“빌어먹을, 대체 왜 저렇게 된 거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전군 정지! 여기서 멈춰!”
“전군 정지이이!”
생뢰르반 파견대 휘하에서 드 레뮤즈 혼성 기병대를 이끌고 있던 카렐 드 상포리앙은 부대를 멈추었다.
속보 정도의 속력으로 이동하고 있던 기병들이 일제히 멈추었다.
아군 선두에서 적 까지의 거리는 500미터 정도 될까.
기동성을 가진 기병대인 만큼 공격을 결심하면 당장이라도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미 카렐이 지휘하는 기병대가 여기까지 위협적으로 진격해온 것 만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룬발트 인들은 엘랑키아 기사를 두려워합니다.’
이번에 자신에게 임무를 맡기면서 에트 경, 콘도티에레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 정도 거리까지 접근하자 그룬발트 보병들은 화들짝 놀라면서 부대 방향을 애매하게 틀거나, 똘똘 뭉쳐서 대기병 방어전을 만들었다.
펑! 뻐어엉!
콰쾅! 콰가각! 퍽!
멀리 후방에 배치된 장거리 포들이 쏜 포탄이 주변에 떨어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물론 잘 보이지도 않는 먼 거리에서 쏘고 있는 것이라 명중률도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위력도 반감된 포탄들이긴 하다.
‘위력아 반감된 포탄’이라 해도 보병이 맞으면 그냥 상처로는 끝나지 않을 공포스러운 달구어진 쇳덩어리이다.
그래도 피해를 감수하고 밀집대형을 취하며 ‘엘랑키아 기사’에 우선적으로 대응하는 모양이었다.
카렐의 역할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찬찬히 보조를 맞춰 진격하던 적 보병 대열의 한쪽 끝이 얼어 붙었다.
일부는 기병을 막겠다며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일부는 명령을 못 받았는지 사이에 껴서 어정쩡한 위치에 멈춰 있었는데···..
그걸 지키는 쪽이었던 엘랑키아 보병, 루제 드 제브레도뉴 공작의 우측 끝을 지키던 보병 연대가 벼락처럼 우회해서 측면을 쳐 버렸다!
일시적으로 대열을 풀었다가 다시 밀집 대형을 만드는, 정말 대담한 진격이었다.
만약 그 틈을 노려 적이 공격해 왔다면 오히려 유리한 포지션을 잃고 퇴각해야 했을 위험을 감수한 일격이란 말이다.
전장 전체에서 그룬발트 군이 수적으로 1.5배 우세하다, 이런 건 아무 소용도 없었다.
당장 날벼락을 맞은 적은 정면과 측면에서 2배의 보병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도록 빈 공간을 지켜야 했던 그룬발트 보병들은 카렐의 기병대를 두려워한 나머지 측방을 경계하며 기동성을 포기한 대기병 대형을 취하고 있었고 말이다.
“카렐 경, 저기 그룬발트 기병대가 접근해 옵니다.”
“흠, 수가 많군. 하지만 겁 먹지 마라! 우리는 엘랑키아의 기사들이다!”
“우와아아아아아!”
카렐의 호기어린 외침에 휘하 기병들이 함성을 지른다.
비록 지금은 견제를 위해 출전한 상황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전투를 결심할 수 있는 병력이다.
휘하의 드 레뮤즈 백작의 이름으로 소집된 기병의 숫자가 약 1천 기, 중기병 비율은 70퍼센트 이상이었다.
그리고 바로 후방에는 서부군의 영애, 티테니아 드 몽파르지에가 이끄는 3백 기 정도의 경기병들 또한 후속하고 있었다.
멀리서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는 그룬발트 기병의 숫자는 그거보단 훨씬 많아 보였지만··· 그렇다고 두 배 이상이 될 정도로 수가 많지도 않았다.
전투를 결심한다면, 언제든 싸울 수 있었다. 기병 지휘관의 권한이자 책임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적이 먼저 오지 않는 한 나서지 않기로 했다.
지금 카렐과 기병대가 그 위치에서 적을 위협하고 있는 것만으로 전황이 확 바뀌었다.
수세 일변도였던 루제 공작의 브레세른 수비군이 반격에 나섰으며, 공세 일변도였던 그룬발트 군은 자신들에게 화들짝 놀라 일관된 움직임을 보이지도 못한다.
‘이게 나의, 아니 우리의 힘이다!’
묘한 쾌감이 카렐과 주변에서 지켜보는 기병들의 마음 속에서 피어 올랐다.
분명 에트 경이 자신을 보낼 때, 이런 상황을 설계하고 있었으리라.
카렐 자신은 ‘혹시라도 아우페브라즈로 적이 직행하면 무슨 수를 써서도 막아야 한다’는 애초의 역할을 수행하과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장거리 포 몇 발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룬발트 보병과 기병 합쳐서 최소 수천 명의 발을 묶어놓고 있는 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