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 폴름스 전투, 첫째 날
타탁, 딱. 카앙!
잔뜩 긴장한, 그러나 힘이 넘치는 창병 대열이 서로 접근하기 시작한다.
따다다닥, 타닥! 따닥! 딱!
타탁, 딱! 카카칵! 팅!
“신성 그룬발트 제국 만세!”
“겁 먹지 마라!”
“밀어 붙여! 한 걸음 앞으로!”
“으읏, 조심해!”
날카로운 듯 뭉특한 듯, 사람 키의 두 배가 넘는 길고 긴 장대 끝에 박힌 작은 쇳조각이 서로의 목숨을 노리기 시작한다.
단단하면서도 탄력있으면서, 사람이 양 손으로 다룰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창대는 잘 말린 목재로 만든다.
본래 창은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공격 무기이면서도, 거리를 유지하고 상대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는 방어 무기이기도 하다.
서로가 비슷한 길이의 창을 들고 비슷한 기량을 갖추었다, 라고 하는 것은 공격도 방어도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철저한 공격 일변도의 무기이기 때문에, 아예 숨어서 사선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면 먼저 상대를 쏴버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총과는 다른 점이다.
최대한 자신과 아군은 안 찔리면서 상대를 찌르기 위해서, 상대의 창은 밀쳐내고 내 창은 밀어 넣기 위해 경쟁한다.
그렇게 부딪치면 소리가 울렸고 중대급 이상의 대규모 창병 대열이 격돌하면 그 소리는 어지간한 북소리 이상으로 시끄럽다.
“흐이야압!”
“죽여라! 죽여버려라!”
“물러서지 마! 우리는 트라스켈의 어금니다!”
“우베노! 우베노의 깃발을 세워라!”
거기에 격돌 직후 흥분 가득한 창병들의 외침까지 더해지자, 지독한 밀도의 창병 싸움의 한 가운데는 총성은 물론 포성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별세계가 된다.
어중간한 실력 차이로는 길을 낼 수 없고, 상대를 쓰러뜨릴 수도 없다.
드문드문 나무로 된 창대와 철로 된 촉이 이쪽을 노리고 있을 뿐이지만, 실질적으로 나무와 철로 지은 장벽 이상의 압박감을 준다.
용기와 기세, 그리고 무모함을 지닌 숙련병들이 상대의 기량을 가늠해 보며 한계까지 앞으로 나아가 보지만, 역시 쉽지 않다.
변칙적으로 앞으로 나온 상대의 팔을 찌르거나, 창대를 잡은 상대의 손을 창대로 후려 치려는 시도도 있으나 또한 호락호락하지 않다.
창대를 이용해 뭔가를 해 보려는 시도 자체가 창끝이 조금이든 많이든 어긋난다는 이야기.
따라서 자칫하면 내가 견제해야만 하는 상대에게 활동 영역을 주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서로 최소한의 갑주는 걸친 상황이고, 선두 대열에 서는 베테랑과 부사관들은 더더욱 그렇다.
두꺼운 천이나 가죽 정도만 되어도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는 창 끝의 공격이 닿는다고 상처를 입히기는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끄아아악!”
무모하게 나아가려 했던 것인지, 기량 차이가 심하게 났던 것인지 약점을 내주는 경우도 있다.
턱 아래에 창이 찔린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다. 그의 무릎 앞 흙바닥에 덩어리 진 선혈이 철퍼덕 소리와 함께 쏟아진다.
하지만 한 군데에서 서너 명이 동시에 쓰러지면 모를까, 한 명 정도의 대열 이탈은 곧장 후열의 동료에 의해 채워진다.
결국 악을 쓰고 욕설을 퍼붓지만, 그 기세가 무색하게도 서로에게 잔 상처를 입히는 이상으로 의미 있는 행동은 어렵다.
서로 조금씩 다가서던 대열이 이내 완전히 막힌다. 양측의 창대가 서로 물고 물려 꽉 물린다. 처음부터 그런 형태의 목재 구조물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이라도 전진하고 적을 상처입히기 위해 눈치를 보지만 마땅히 방법이 없다. 이대로는 전과를 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된다.
“저 새끼들 창대 밑으로 기어온다!”
“모두 조심해!”
“내가 간다. 뒤를 부탁하마!”
“맡겨주세요!”
이럴 때 나서는 것이 소수의 난투전 요원들이다.
서로 맞물린 창대라는 천장 아래의 좁은 공간은 쪼그린 자세를 한 검투사들의 전장이 된다.
일부는 미리 계획되어서, 일부는 충독적으로.
또 일부는 어쩌다보니 이탈이 늦어 창병 끼리의 교전에 휘말려버린 총병인 경우도 있다.
“이 새끼!”
“그룬발트 개자식들이 뒈질라고 아주 환장했구만!”
“덤벼! 덤벼 버러지 새끼야!”
그들은 엎드리거나 쪼그린 자세로 이동하며 무기를 겨누고 적을 위협한다.
대체로 편한 무기는 단검이지만, 곤봉이나 장검은 물론 손도끼가 등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죽어 시팔!”
“우욱!”
머리 위에서 동료들의 창대가 요란하게 부딪치고 있는 높이 1미터 미만의 기묘한 전쟁터에서 양측이 내보낸 투사들이 맞붙는다.
일어설 수도, 무기를 크게 휘두를 수도 없는 상황.
필연적으로 양측의 싸움은 서로 붙잡고 밀고 당기거나 맞잡고 구르는 난투가 되고 만다.
사용이 불편한 데다, 서로 최소한의 갑주까지 입은 상태, 게다가 상대방도 전투에 익숙한 숙련병이다.
맞부딪치는 과정에서 서로 때리거나 작은 상처를 입히기는 하지만 쉽지 않다.
“끄아아악! 제기랄!”
“어디 덤벼보라고!”
“뒈져 시팔!”
마침내 승부가 나고 만다. 날카로운 칼날이 흉갑과 배갑을 연결하는 죔쇠를 쑤시고 들어가 옆구리에 박혔다.
“우욱, 쿨럭!”
고통에 몸부림치는 희생자의 상처에서 시커먼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온다. 흙바닥에 얼굴을 묻은 병사가 부르르 떨더니 이내 축 늘어진다.
“허억! 허억!”
승자의 상태도 좋지는 않다. 방금 쓰러뜨린 상대가 휘두른 도끼를 막고 나아가는 과정에서 각도가 좋지 않았다.
새끼 손가락이 부러진 모양이다. 어쩌면 절단해야 할지도 모른다.
조금 움직여보자 아파서 쌍욕이 나올 것 같지만 지금은 치료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이 정도 상처는 호승심 넘치는 용병들 표현으로 ‘긁힌 상처’에 속했다.
적병의 피가 만든 피웅덩이에 바지가 축축하게 젖었으나 상관하지 않고 피투성이 무릎을 질질 끌며 반쯤 엎드린 자세로 나아간다.
물론 적 대열을 향해서이다.
“어어? 시팔! 저새끼 온다!”
“내, 내가 간다!”
“창대가 얽혀서 시팔! 누가 막아!”
또 다른 ‘투사’가 나오기 전에, 대열에 바짝 달라 붙는다. 어차피 창을 버리고 창대 아래의 싸움에 참여한다는 것은 전열에서 한 명이 줄어든다는 이야기다.
보면서도 꼼짝 못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니까.
“꺼져 이새끼야!”
발길질을 해 보지만 이를 피해 정강이에 상처를 내는 데 성공한다. 가죽 띠를 둘러 놓았기에 치명상은 아니다.
“커헉!”
퍼억! 하지만 상처 입은 병사가 마침내 창대를 놓고, 쇠 주먹을 휘두른다. 투구 위로 맞았는데도 상체가 휙 돌아갈 정도의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내 충격에서 시작하고 다시 자세를 잡는다. 그 사이 상대방도 단검을 뽑아든다.
이 기묘한 쪼그린 자세의 전장에서 2차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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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룬발트 놈들 숫자 하나는 징그럽게 많군!”
브레세른 마을 방어선을 책임지는 지휘관, 루제 드 제브레도뉴 공작은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몰려드는 적병들을 바라본다.
“공작님, 위험합니다!”
“아아, 알았다, 알았다고.”
부하들의 만류에 루제 공작은 창가에서 떨어졌다.
“전황은 어떤가?”
“예상대로 적은 마을 우측 전선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좌측과는 병력이 거의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허어, 무엇을 노리길래 그렇게까지. 불리하지는 않고?”
“옛! 우측 끝에는 피락스 우베노 경이 있으니까요!”
“뭐 그렇지. 우베노라면 걱정할 필요 없지.”
피락스 우베노는 드 제브레도뉴 영지군 소속의 용병 연대 중 하나를 이끄는 베테랑 용병대장의 이름이며, 휘하 연대의 이름이기도 했다.
엘랑키아 왕국과 신성 그룬발트 제국 사이의 접경지대에 영토를 가진 드 제브레도뉴 공작가는 엘랑키아 귀족으로서는 드물게도 용병 사업주였다.
상시 운영하는 여러 개의 연대 중 일부는 외국, 주로 주디칼리에서 활동하며 스스로의 유지비 이상을 벌어오곤 했다.
특별히 대단한 이상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선대 드 제브레도뉴 공작들이 그래왔기에, 가문의 전통이 되었을 뿐.
다만 이런 특이한 점과, 드 제브레도뉴의 조상이 그룬발트 제국의 신하였다는 점 때문에 종종 백안시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허나 루제 공작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에게 ‘조상의 국적’ 따위는 아무 상관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그룬발트 제국의 인간들이란 틈만 나면 영토를 침범하고 변경을 약탈하려 드는 개자식들의 모임이었으니까.
뭐, 엘랑키아와 그룬발트의 역사가 조금 달랐으면, 현재 루제 공작 자신도 엘랑키아의 군주가 아니라 그룬발트의 텅 빈 황좌를 섬기는 와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또 지금과는 정 반대로 그룬발트를 위해 싸우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의 신하와 병사들도 마찬가지다. 영지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조상이 그룬발트 출신인 경우는 수도 없이 많았고, 친척 중에 그룬발트 인이 있는 경우도 흔했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걸로 신경을 쓸 만큼 고상한 삶을 살지는 않는다. 자신은 물론이고 신하와 병사들도 말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게 살 뿐.
뭐··· 가끔은 자기네 최전방에서 고생하고 있는데도 ‘근본이 그룬발트 종자’라며 뒷담화 하는 자들이 역겨운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측에 압박이 심합니다, 공작님.”
“그래, 우베노 연대에 너무 고생을 시킬 수는 없지. 슬슬 날개를 접으라고 하게.”
“옛, 그렇게 하겠습니다!”
루제 공작은 병력을 배치할 때, 브레세른 마을을 중심으로 양측에 동등하게 전력을 배치했다.
특이하게도 마을을 중심으로 한 중앙에 상대적으로 경험이 적은 신병과 엘랑키아 계열 제후들의 병력을 배치했다.
그리고 자신이 신뢰하는 직속 병력과 용병 연대들을 배치했다.
중앙이 약하고 측면이 강한 대열이다.
심지어 중앙 방어선의 핵심인 브레세른 마을 자체는 요새화 하기는 했지만 병력을 그다지 많이 배정하지는 않았다.
그나마도 총공격이 시작되고 병력을 뺐기 때문에 약간의 포대와 모서리마다 1개 중대씩 배치한 정도로, 객관적으로 봐도 위태위태했다.
만약 적이 작정하고 인해전술로 몰려들면 함락당할지도 몰랐기에 휘하 지휘관들 중에서도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중앙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적의 노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번 전투에서, 모서리 방어선에 불과한 브레세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배후에 브레세른 호수가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다고베르 2세 국왕의 본진이 있는 아우페브라즈로 향하든, 폴름스 본성으로 향하든 브레세른을 통하는 길은 가장 먼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적은 브레세른 자체를 함락하느라 병력을 낭비하는 대신 고립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 전장은 호펜로이테나 아룬하비크 마을로 향하는 도로가 될 것이다.
그 예상은 정확히 들어 맞았다.
적은 포격을 집중하며 브레세른을 공격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척 하다가, 총공격이 시작되는 순간 의도를 숨기지도 않고 병력을 빼 버렸다.
그리고 북쪽의 호펜로이테 대신 서쪽의 아룬하비크로 향하는 도로에 주력을 투입할 것이라는 예상도 했다.
만약 자신이 브레세른을 공격하는 그룬발트의 지휘관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호펜로이테로 향하는 길을 장악해 병력을 투입해 봤자, 이는 호펜로이테를 통과하는 적군의 보조 역할밖에 되지 못한다.
그에 비해서 만약 브레세른 - 아룬하비크를 통과하는 길을 장악하게 된다면 아우페브라즈로 통하는 독자적인 진군로를 확보하게 된다!
잘 되면 엘랑키아 국왕의 본진을 측면에서 공격하고 최대의 전공을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양측에는 병력을 동등하게 배치했다.
적이 훨씬 중점을 두고 공격할 것으로 생각되는 지점이지만, 굳이 병력을 증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된다 생각했으니까.
루제 공작은 문득 웃음이 나왔다. 못 이기는 척, 적이 아우페브라즈로 진군하도록 통로를 내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적장은 아룬하비크로 향하든, 중간의 도로에 설치된 방어 거점을 통과해 아우페브라즈로 직접 향하든 끔찍한 꼴을 볼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전투 직전, 갑자기 국왕의 측근이 된 젊은 용병출신 참모인 에트 경과 나눈 대화는 좋은 경험이었다.
그에게 어느 정도의 천재성이 있는지 아직은 잘 모를 일이다. 뭐 국왕이 보낸 2만의 토벌군을 격퇴했을 정도니 상당한 능력이 있겠지만···.
적어도 대화를 통해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은 했다.
자신도 대략적으로 감은 잡았지만 그래도 혼란스럽고 고민스럽던 부분들이 이야기하면서 모조리 정리가 되었으니까.
예를 들자면 배후의 호수 문제라거나, 적의 주공 방향 문제라거나.
뭐, 어느 정도는 아는 문제라 해도 신뢰할 수 있는 대화 상대와 이야기를 나눠 확신을 가지게 되는 건 중요한 일이거든.
그러니 이번에도 도움을 받아야겠다.
“공작님! 우익이 천천히 후퇴하고 있습니다. 적 우회에 대비해 기병을 준비할까요?”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돌출되어 측면을 지키던 우베노 연대가 천천히 도로 뒤편으로 물러서고 있었다. 활짝 편 형태였던 오른쪽 날개가 비스듬히 사선 형태로 접혔다.
전투 끝에 이동로를 확보한 적군은 이를 통해 더 압박을 할 수도 있고, 크게 우회해 아예 배후를 노릴 수도 있겠지만···.
‘그 인간’이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